슬로바키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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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Карпа́тська Украї́на Karpats’ka Ukrayina |
|||
국기 | 국장 | ||
위치 | |||
1938년 12월 30일 ~ 1939년 3월 18일 | |||
국가 |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 | ||
수도 | 우주호로드 | ||
정치체제 | 공화제 | ||
통화 | 체코슬로바키아 코루나 | ||
언어 | 우크라이나어, 슬로바키아어 | ||
역사 |
• 자치령: 1938년 12월 30일 • 건국: 1939년 3월 15일 • 멸망: 1939년 3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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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8년 11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개정으로 생겨난 루신인의 자치지역이다. 1939년 3월 14일의 슬로바키아의 독립선언이 3월 15일에 받아들여지면서 독립을 선언하고 바로 다음날 헝가리에게 합병당한 미승인국가이다.2. 뮌헨 협정과 빈 중재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에 국경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겼으며, 헝가리 왕국은 외교적 차원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여 헝가리 영토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20만 명에서 35만 명 사이의 병력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뮌헨 협정 이후 헝가리 육군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위협적인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1938년 중반 헝가리 왕국은 체코슬로바키아 남부 국경을 따라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로 게릴라를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뮌헨 협정의 내용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상호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기로 결정하였고, 최종 합의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빈 중재를 받아들였다.
11월 2일 헝가리 정부는 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과 카르파티아 지역을 병합했고, 59만 명의 헝가리인이 이주했을 뿐만 아니라 29만 명의 슬로바키아인과 37,000명의 루신인이 이주했다.
헝가리 왕국의 결정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의 편제는 재편성되어야 했으며, 다뉴브강에 있던 방어 진지를 잃었고, 헝가리 국경을 따라 있는 거의 모든 요새와 주요 기지를 잃었다.
3. 독립과 헝가리-카르파티아 전쟁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는 더욱 강렬해졌으며, 결국 3월 14일 슬로바키아가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자,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는 먼저 독립한 슬로바키아를 따라 독립을 선언했다.1939년 3월 15일, 헝가리 정규군이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의 비정규군은 추가 지원 없이 빠르게 궤멸되었다. 다음날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 영토를 합병했다.
3월 17일 밤, 잔존한 카르파티아 비정규군이 카르파티아를 떠나 루마니아 왕국 국경으로 후퇴했고, 그 사이 헝가리 육군은 최고 속도로 진격하여 폴란드 국경에 도달했으며, 폴란드 시민으로 위장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의 소수 주민들은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었다는 이유로 헝가리인에게 붙잡혀 폴란드 군인들에게 넘겨졌으며 그 중 500~600여명은 폴란드 군인들에게 처형되었다.
침공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헝가리 육군이 아직 완전한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고,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부과된 보상금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헝가리는 자국 군대와 민중의 사기와 민족주의 정신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고, 군대를 재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헝가리의 침공 이후 몇 주간 이어진 테러로 2만7000여명이 재판과 조사 없이 사살됐다. 75,000명이 넘는 카르파티아 주민들은 소련으로 도망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 이주했다.
4. 나치 독일의 점령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남다
1944년 3월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한 이후, 아돌프 아이히만은 모든 헝가리 유대인들의 추방을 감독했다.동년 10월 28일 두클라 고개 전투에서 소련은 독일 국방군과 헝가리 왕국군을 몰아냈으며,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해방시켰으며, 10월 28일은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 해방절로 기념되고 있다.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의 지배권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돌아갔으며,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의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건국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대표단이 도착했다. 그러나 몇 주 후, 소련군과 내무인민위원회는 망명 정부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고,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대표단은 2개월간의 분쟁과 협상 끝에 1945년 2월 1일 카르파티아 지역을 소련 지배하에 두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했고, 1945년 6월 29일 양국은 카르파티아를 소련에 양도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며, 조약의 결과 카르파티아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소련 해체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