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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독소 불가침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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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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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부터 네빌 체임벌린[1], 에두아르 달라디에[2], 아돌프 히틀러[3], 베니토 무솔리니[4], 갈레아초 치아노[5]
히틀러와 무솔리니 사이에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가 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1e52306b228a44dcc4528e33d067ff40.jpg
이오시프 스탈린: 뭐? 내 의자는 없다고?[6]

1. 개요2. 서론3. 배경4. 전개
4.1. 1938년에까지 이르는 배경4.2. 1938년, 9월 이전4.3. 1938년 9월
5. 뮌헨 회담6.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는가?
6.1. 여론6.2. 군사6.3. 경제6.4. 외교6.5. 작동하지 않는 안보 체제
7. 결과8. 후일담
8.1. 뮌헨 협정 관련국들의 말로8.2.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8.3. 뮌헨 협정 대신 전쟁이 곧바로 벌어졌다면?
9. 녹색 상황10. 명칭

[clearfix]

1. 개요

My good friends, for the second time in our history, a British Prime Minister has returned from Germany bringing peace with honour. 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We thank you from the bottom of our hearts. Go home and get a nice quiet sleep.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평안히 주무십시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7]
뮌헨 협정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체결된 협정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중 독일인의 인구가 많은 곳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로는 수데티로, 독일어로는 주데텐란트라고 불리던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협정이다. 종종 '뮌헨 회담'으로도 불리지만 이는 당시 진행된 4국 정상 간의 회담만을 뜻하며 뮌헨 협정은 그 결과물을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는 나치 독일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 협정으로 나치 독일이 당시 체코의 영토였던 주데텐란트 지역의 병합을 묵인해 주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1년 늦췄는데 이는 1년 뒤 폴란드 침공의 도화선이었다는 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베르사유 조약 민족자결주의 체제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훗날 역사학자들은 동서유럽 국가들 간의 야합으로 여겨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의도는 둘째치고 그 결과가 미증유의 비극이다 보니 아예 거짓된 평화 취급받으면서 무시당하고 있다.

2. 서론

뮌헨 협정 이후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뮌헨 협정은 기본적으로 주데텐란트라는 독일인 인구가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양도하는 대신 독일이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맺은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민족자결주의 베르사유 조약 사이의 모순이 원인으로 꼽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독립하여 같이 건설한 국가로,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였다. 국가를 지배하는 두 민족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수백년 동안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으며 다양한 국경, 영토 문제로 졸지에 중부 유럽의 수많은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거대했던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주데텐란트 독일인이었다.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는 줄곧 민족자결주의를 역으로 이용해 독일인의 자결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주변국들의 영토를 병합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고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병합함으로써 한번 실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다음 목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기 시작했고 아직 독일과의 정면 충돌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영국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우선 주데텐란트를 양도함으로써 유럽 내 군사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결국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이탈리아의 중재 하에 만난 영국, 프랑스, 독일 정상들은 엄연한 주권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한 채 나치 독일에게 주데텐란트의 영유권을 양도하는 대신 독일이 더 이상 이웃나라의 영토 병합을 하지 않는 것에 합의하였다. 이 협정으로 인해 주테텐란트를 상실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하루 아침 만에 전체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명의 인구를 잃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거기서 만족할 의향이 전혀 없었고 고작 6개월 만에 약속을 깨버 린 채 체코를 완전히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전락시켰다. 체임벌린이 떠벌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는 고작 6개월 만에 깨져 버리고 유럽의 주요 산업국 중 하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수중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자 굴욕적인 평화를 맺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자충수만을 두게 된 꼴이 되어 버린 뮌헨 협정은 네빌 체임벌린이 언급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 내지는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in our time)"라는 구절로 기억되며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중 있었던 매우 중대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3. 배경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독립하여 같이 건설한 국가였으며 이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8] 역사상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최초의 독립 국가였다.[9] 그런데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나라를 독립시키자니 다양한 국경선, 영토 관련 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졸지에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독일인, 유대인, 집시 등이 한 데 모여 섞인 다민족 국가가 되었는데 국가의 핵심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지녀 온 사실상 다른 민족[10]이었고 남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 지방의 헝가리인과 테셴[11] 지방의 폴란드인[12], 동부 끝자락의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그 외에도 정해진 근거지 없이 주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의 도시권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계통의 유대인들도 다수 존재했고[13] 제법 많은 수의 집시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분포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최대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주데텐란트 독일인이었다.[14]

중부유럽은 오랜 기간 신성 로마 제국과 그의 계승국인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아 왔고 비록 중세 이래 슬라브계가 대다수인 곳이었지만 오랜 기간 독일인들의 이주 운동이 벌어진 곳이었으므로 제국 내부의 행정구역상 구분만 있었지 국가나 민족 단위의 확고한 경계선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체코인 거주 구역으로 분류된 지역 한 가운데 독일인 촌락이나 도시가 들어서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협상국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하고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주변국들이나 새로 독립한 국가들에게 원래 예상되던 영토보다 좀 더 큰 영토를 할양해 주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 영토에 거주하던 이질적 민족들이 다른 민족 국가들의 소수민족으로 편입됐다. 이것이 다민족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이었고 이는 베르사유 체제가 대원칙으로 삼은 민족자결주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15] 그런 상황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자결과 독일인의 생활권인 레벤스라움을 외치면서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기 시작했다.

4. 전개

4.1. 1938년에까지 이르는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9-040-27%2C_Gustav_Stresemann.jpg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모습
그는 서방과 독일의 외교를 어느정도 중재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배경이 있어도 어쨌든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국으로서 의무를 이행하는 데 어느 정도 충실하였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등의 지도 아래에 어느 정도 서방 국가들과 타협점을 찾는 등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영-프도 전후 복구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뒤집힌 계기가 바로 대공황인데 대공황으로 인해 영-프 양국은 물론 독일에까지 대규모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던 영국 중심의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며 세계 여러 국가들에 타격을 줬는데 특히 1차 대전으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한 독일은 이런 자유무역 체제의 붕괴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었다.[16]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의 농간 때문이라는 배후중상설이나 영국과 프랑스가 죄없는 독일을 겁박한다는 피해망상적 주장들까지 등장했으며[17] 마침내 독일이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일 민족을 위한 거대한 생활권, 레벤스라움의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주장들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주장들을 흡수하며 위대한 독일의 재건, 독일 민족을 위한 제국의 건설을 기치로 본격적으로 집권한 것이 나치당이었다.

나치 독일은 이 레벤스라움의 건설을 위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주변 지역으로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으며 국가의 사회/문화/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를 이를 위한 대비 상태로 만들어나갔다. 집권 직후 독일 내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 추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데 이어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1936년에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선언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목표는 당연히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있었고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중부 유럽 지역이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 병합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팽창이 시도되었고 나치는 이를 시작으로 범게르만권[18]으로의 팽창을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파일:8cdatuqnf8001.jpg
1938년 유럽의 GDP 지도
독일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각각 뛰어넘고 있었지만 둘을 합친 정도는 아니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프랑스와 영국은 아직 대공황의 타격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으나 독일은 이미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중공업에 군수산업을 접목시켜 빠른 경제회복을 이루어냈다. 게다가 영-불 양국은 독일의 성장세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고 영국 프랑스를 합한 정도의 국력이 있어야만 독일과 동등할 것이라는 오판을 내렸다. 사실 당시 나치 독일의 경제력은 프랑스를 능가하긴 했으나 영국 본토+자치령(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과는 비등한 수준이었고 따라서 전체 국력도 프랑스보다는 강했어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정도의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다.[19]

게다가 그마저도 농업 생산량은 프랑스가 훨씬 우위에 있었고 1차 대전의 여파로 청년층이 크게 줄어들긴 했지만 자국 방어에 필요한 수백만 명을 모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요새와 방어 전략을 이용해 버티기만 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전쟁의 양상이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반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도 둘을 합친다 하더라도 독일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고 독일과의 전쟁은 양국에 큰 피해를 입힐 것은 분명했다. 즉,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어떻게 됐든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던 것이다.[20]

더불어 영-불 양국은 "독일 또한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도 전쟁을 피하려 할 것이다."라고 오판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한 세대도 안 지난 20년 전에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고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영-프 양국의 기대와 달리 그런 건 히틀러의 우선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전선이 고착화되기 전에 빠르게 승전을 거두면 된다는 지극히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독일 제국 군부와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도, 대공황 이후 줄곧 암울했던 독일 경제의 반등도, 프랑스를 상회했던 국력도, 당시의 독일 행정체제까지도 군수산업에 기반을 둔 지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넘쳐나는 물자는 다시 칼끝을 돌려 독일에 엄청난 행정적, 경제적 마비를 불러올 것이었고 공약을 지키지 않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자칫 정부 전복이라는 대위기를 불러올 것이었다.

파시즘의 대두와 나치의 집권,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내부 파시스트 세력들이 준동하는 사태는 영국 · 프랑스 양국이 독일을 잠재적 위협으로 보게 만들고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낮추게 했다. 나치라는 공동의 적이 생긴 덕분에 옛 3국 협상 체제가 다시 집단 안보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독일을 경계해 왔고 전간기 독일의 부활과 나치의 집권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프랑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1920년대에 협력 관계를 구축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소련과의 관계도 개선했으며 미국과의 협력 관계 구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10월 14일, 나치 독일이 국제 연맹과 군축 회의에서 탈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는 이를 문제 삼고 독일과 협상을 벌였다. 1934년, 독일과의 군축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는 외무장관 장 루이 바르투[21]를 중심으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동유럽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을 추진했다. 서방 자본주의와 러시아 사회주의 간의 적대 관계도 완화되어 소련이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또한 ' 소(小)협상국'이라는 별도의 체제를 수립해 자국의 안보를 보장받으려고 했다.[22]

1935년 소련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 · 프랑스 · 소련 · 체코슬로바키아 4국이 참여하는 집단 안보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이에 더해서 영 · 프 양국은 독일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기 위해 무솔리니가 지배하는 파시즘 이탈리아와 손잡고 스트레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4국 집단 안보 체제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체코, 소련이 나치 독일을 동 · 서에서 협공하고 군사적으로 공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련이 독일이나 체코 국경으로 접근할 수가 있어야 했는데, 이러려면 붉은 군대가 폴란드나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할 권리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폴란드, 루마니아 정부와 협상해 군사 통행권을 받아내려 했고 영국과 프랑스에도 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생각은 해보겠다는 투로 거절했으며[23] 소련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빴던 폴란드는 프랑스의 협력 요청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군사 통행권을 내주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4국 집단 안보 체제는 독일에 맞서 군사력을 투사하기 어려웠다.

미국을 유럽 문제에 끌어들이려 한 시도는 프랑스가 빚지고 있던 전쟁 채무의 일부 탕감과 상환 유예 조치,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체결이란 성과로 이어졌으나, 대공황 문제와 미국인의 강력한 고립주의 정서 때문에 그 이상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1932년부터 집권한 미국의 루스벨트는 영 · 프와 협력해 유럽에 개입하려고 했지만 강력한 반전주의, 고립주의 여론과 의회의 고립주의자들 때문에 개입할 여지도 갖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의 무기 금수 조치 법안이 1933년에 폐기당하고 1935년에 하이람 존슨, 제럴드 나이 같은 의회 내부의 고립주의자들이 미국의 고립주의 노선을 못 박는 중립법을 제정하는 것을 눈 뜨고 쳐다봐야 하는 신세에 빠질 정도였다.[24]

국무부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개입주의적 성향이 강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대립에서 여론을 등에 업은 입법부가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나치 독일의 팽창 야욕이 본격화된 1930년대 말까지도 미국은 유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25]

4.2. 1938년, 9월 이전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나치 독일이 국민 투표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26], 리투아니아[27],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28], 스위스[29] 등에 나뉘어진 독일계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 쥐트티롤[30]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31] 하지만 쥐트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티(Sudety) 지방, 즉 주데텐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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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삼키려는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노리고 그곳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32]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으며 프랑스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은 즉각 붉은 군대를 준비하고 프랑스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개입을 주장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 상 군사 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고 이에 따라 3월 14일 프랑스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에게 조약 준수를 약속하는 한편 영국의 입장을 캐물었으나 영국은 조약 준수만을 확인할 뿐 참전 문제에는 미적지근했다. 애당초 프랑스는 영국 없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는 상황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국이 미온적으로 나오자 난처한 상황에 몰렸다.

4.3. 193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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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15일 뮌헨에 도착하여 친위대의 사열을 받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영국 측 인사들. 가운데 있는 남자는 당시 독일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다.

그러다가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9월 1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군부의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다.[33]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영국군 또한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이미 앞서서 프랑스는 독일 국방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참전하겠다는 입장은 주데텐란트 위기가 터진 이래로 프랑스가 고수했던 입장이었다. 만약 프랑스가 체코 슬로바키아를 포기할 경우 지금까지 체결되었던 프랑스와 중부 유럽 국가들 간의 조약들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여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는데 이 경우 프랑스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 국가들이 자연히 근접한 강대국,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 붙을 것이며 그러면 프랑스는 서구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으로 고립당하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참전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제는 영국의 참전 여부였는데 당시 독일의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독일과 1:1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또다시 1차 세계대전처럼 인구를 갈아가며 나라를 멸망의 문턱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그야말로 최악의 수였고 여기에 이탈리아도 독일 측으로 기울어 버린 상황이라 전쟁이 발발할 시 제2전선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앞선 3월에 프랑스 정부가 영국의 입장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육군 강국 프랑스와는 달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육군력도 없었고, 그나마 있던 육군력 역시 1차 대전 이후 사실상 박살이 나면서 한창 재군비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영국은 당장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로카르노 조약 상으로도 참전 의무가 있었던 것은 프랑스 뿐이고 영국은 그럴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전을 안 하자니 당장 영불동맹이 붕괴하는 것은 물론 유럽 대륙에서 영국이 완전히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고 프랑스가 패배하여 유럽의 균형이 무너질 공산이 컸다. 이 난처한 상황 속에서 영국이 참전도 안 하고 프랑스와의 동맹도 유지하는 길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가 침공을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을 외교적으로 잘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 독일이 들고 나온 구실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이고 주데텐란트에서 실제로 폭력 소요가 발생한 것 자체도 일단은 사실이라 명분이 독일 쪽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동원령을 내리지 말라고 압력을 계속 넣었으며 한편으로는 수 차례 중재를 시도했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독일 주민이 과반수인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체임벌린은 즉답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가 9월 18일 프랑스의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지역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신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독립 보장을 받았다. 즉, 이제부터는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서유럽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을 독박 썼던 프랑스가 물귀신 작전을 편 것인데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정책 전환이며 의미도 컸지만 막상 영토를 뺏기는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약소국 입장에서 재무장을 한 독일과 맞서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고 몇몇 영토의 할양을 고려하고는 있었으나 독일계 지역 전체의 할양은 생각도 않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이 터져도 영국은 참전하지 않는다며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장을 전하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참전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식으로 사실상 반 협박을 하다시피 했다. 결국 9월 21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해당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책임을 지고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9월 22일 체임벌린이 직접 히틀러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며 앞서 15일 히틀러가 제시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전했는데 처음부터 전쟁을 노렸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정말로 독일계 지역을 포기해 버리자 이번에는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신속한 양도와 해당 지역을 독일군이 즉시 점령할 것,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 분쟁이 있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의 문제도 조정할 것 등 일부러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이제는 정말로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 영국과 프랑스는 23일 오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원령 선포에 동의했고 이를 접수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당일 밤 10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다음날인 24일에는 프랑스도 동원령을 선포했으며 9월 26일 히틀러가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면서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앞서 배경 항목에서 이야기한 부담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 싸울 건가 아니면 발을 뺄 건가?"라는 내용으로 서로 의미 없는 논의를 주고 받으며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즈음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바다 건너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영국 등 관계 국가들에게 평화 교섭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고하면서 끝까지 해결책을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은 프랑스의 참전을 전제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 의사를 분명히 했다. 또 소련의 참석이 보장된다면 체코슬로바키아 문제 논의를 위한 국제회의 참석에 동의한다고 밝혔다.[34]

그리고 9월 28일, 또 다른 열강 국가가 끼어들었다. 이탈리아 왕국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으며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다.

회담 당일에, 히틀러는 기선 제압 차원에서 일부러 험상궂게 생긴 외모로 유명한 공군 후고 슈페를레 장군이 영프 대표단을 안내케 했다.

5. 뮌헨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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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이후의 국경선 변화. 보다시피 영토가 매우 쪼그라든 걸 볼 수 있다.[35]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는데 당시 나온 조항들 중에 영토 문제를 제외하고 제대로 지켜진 게 하나도 없었다.[36]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 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걸로 바꾼 것 뿐이다. 즉, 말이 좋아 양보지 실제로 독일한테서 받아낸 건 아무 것도 없다.

이 협상으로 명백한 독립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버려졌다. 이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국의 의사는 단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하고 영토를 주변국들에게 강탈당했다. 더군다나 군사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돕긴커녕 오히려 폴란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39]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 데 협조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장 독일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넘어가면서 300만에 달하던 인구와 함께 오헝제국 시절부터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던 유수의 산업시설들과 강력한 요새선까지 전부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6.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는가?

6.1. 여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이 시기 양국의 여론 주도층이라서 할 수 있는 장년층 남성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참호전 독가스를 경험했던 이들은 그런 악몽 같은 전쟁이 자기들의 살아 생전에 다시 벌어지고 자기 아들들이 그것을 경험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바로 옆 동네의 독일의 파시즘과 소련의 공산주의처럼 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된 독재국가였다면 모를까 영프 둘 다 각각 입헌군주제 공화정을 채택한 민주주의 국가였으므로 양국의 정치권은 그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협정을 극렬히 반대한 처칠이 수상자리에 앉아 협정을 결렬시켰다고 해도 전쟁을 극렬히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프랑스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본인부터가 1차 대전 참전 용사였다.

6.2. 군사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싸우려는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뮌헨 협정 1년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전쟁 준비가 불완전한 상태였다.[40] 그래서 선전포고만 하고 약 8개월 간 전쟁 준비 겸 눈치도 볼 겸 가짜 전쟁 사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프 양국은 대공황의 늪에서 막 빠져나오던 참으로 군사력 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프 양국은 독일 측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작품으로, 영프는 독일의 군사 열병식과 선전 영화 등에 통째로 낚여서 독일의 군사력을 실제 이상으로 보고 두려워했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극심한 인구 감소를 겪은 탓에 재무장을 시도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바로 이 시기 최일선 병역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1910년대 말 출생인구가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군사 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프랑스는 이런 문제로 영국의 참여가 없는 대독일 전쟁의 단독 개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 헝가리도 이 기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얻기 위해 독일에 동조했다. 특히 폴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랑스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 나라였으나 체코로부터 테셴을 빼앗겠다는 욕심에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전쟁 계획을 망가뜨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막강한 것으로 평가받던 폴란드군까지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41]

6.3. 경제

위에서 서술했듯 경제적으로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대공황과 이어진 보호주의 무역 기조의 강화로 인해 산업과 경제 활력을 크게 상실한 상황이었다. 당장 바로 옆 동네의 나치 독일과 소련이 대공황의 피해를 쉽게 극복한 이유가 자체 산업과 공업에만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답 나오는 문제다.

해당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가 잠시 안정에 접어들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공황의 타격에서 간신히 벗어나 간신히 한 숨 돌리는 수준이었고, 독일과의 대규모 전쟁을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며 이에 반해 이미 대공황의 여파를 완전히 씻어내고 건실하고 막강한 경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던 독일의 경제력과 생산력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 국가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즉, 당시 영프 양국 입장에서 독일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막강한 경제를 바탕으로 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막대한 재정 지출로 말미암은 경제난으로 국내 혼란이 심화될 것이라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42]

다만 이런 독일의 경제력에 대한 평가는 지나친 과대평가였다. 물론 독일의 경제력 자체는 미국에는 크게 못 미쳤으나 소련에는 약간 못 미치는 정도였고 #[43] 영국(본토)과 프랑스 각 개별 국가보다는 컸으나 문제는 히틀러의 망상증적 재무장 집착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군비 중심의 재정확장이 실시되어 민간 경제 영역에 가해지는 압력이 과도한 상황이라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태서 온갖 기득권층과 관료집단, 나치당 내 후원자들의 아귀다툼 속에 진행된 극히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제 자원의 분배와 활용[44], 기축 통화국들이었던 미국, 영국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금융과 무역 분야에서의 제재와 불이익들로 인해 식량과 석유, 철강을 중심으로 한 기초 자원과 미국 달러/ 파운드 스털링을 중심으로 한 주요 외환 관리에 빨간불이 들어오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심지어 현재에도 이런 문제들은 정확한 통계와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성질의 문제인 데다 그나마도 나치 독일은 소위 "통계 마사지"라는 과정을 통해 조작된 통계와 정보들을 발표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런 자세한 속사정을 다른 국가들은 알 수 없었다.[45] 그리고 여기에 더해 진실을 적당히 포장해[46] 독일의 이미지를 실제 국력보다 뻥튀기한 괴벨스의 선전과 특히 눈에 잘 띄는 중화학 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난 급격한 재정 확대로 말미암은 일시적 경기 활성화의 착시 효과가 더해져 독일의 경제력과 산업 생산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공포가 영프 양국의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47]

6.4. 외교

독일은 외교적 명분론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엔 반대하면서도 주데테란트 요구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니 당연하지라고 생각한 영국-프랑스인들도 상당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서 그 영국,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분할했으므로 일반인에겐 자연스런 반응이었다.[48] 거기에 외교 협상을 주도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이해 관계가 적었고[49] 체코슬로바키아를 옹호해야 할 프랑스는 군사 문제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외교적으로 영국에 끌려다니던 상황이었다.

6.5. 작동하지 않는 안보 체제

결국 위에 나타나는 것들을 종합하면 "당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프 양국에는 여론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독일의 야욕을 꺾을, 즉 독일을 단기간 내에 확실하게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로 귀결된다. 나치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단독으로 맞서기에는 부담이 큰 상대였다. 양국이 연합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겠지만, 단독으로 맞서기에는 영, 프 양국이 가진 우위가 독일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양국이 연합하더라도 그 힘이 온전히 그대로 나온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또한 당대인들은 두번째 전쟁이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했고 그 피해는 지난 전쟁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 예상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자금과 자원, 물자를 제공해 줄 수 있었고 집단 안보 체제에 가입한 소련이 참전을 약속했지만, 영 - 프 양국에게 있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지나지 않았고, 독일과의 전쟁은 양국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영 - 프 양국은 이른 시기부터 독일의 팽창과 유럽에서 벌어질 각국의 충돌을 막기 위해 4국 집단 안보 체제, 스트레사 체제 등 다양한 안보 체제를 수립하여 독일을 견제하려 했으며 미국과도 접촉해 지원을 약속 받으려 했다.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스페인 내전, 안슐루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서 안보 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스트레사는 영국이 제 손으로 깨 버렸고 '동유럽 로카르노'는 구상으로 끝났다. 미국의 개입도 미국인들의 고립주의 여론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

소협상국 체제는 애초에 독일을 막는 것이 아니라 실지 회복을 부르짖는 헝가리를 막기 위해 구상한 것이었다. 독일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용도'를 변경해 독일에 대항할 수도 있었지만, 협상 체결 국가인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의 공조가 잘 되지 않았다. 폴란드는 아예 소협상국 합류를 거절했으며 뮌헨 협정이 체결될 시기에는 독일과의 불가침 협약 이행을 주장하면서 체코의 영토를 할양 받아 이득을 챙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독일을 제압하려면 어떻게든 집단 안보 체제에 속한 국가들이 군사력을 투사해야 하는데, 폴란드는 붉은 군대의 군사 통행을 결사 반대하고 루마니아는 부코비나 지역에 대한 통행권만을 허락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크던 영 - 프 - 소 3개국은 상대방에게 배신당해 단독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저 강대한 독일에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고 국가 내부적으로도 여론을 비롯해 심각한 문제들이 많아서 군을 동원하기가 어려웠다. 불신과 각국의 내부 사정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집단 안보 체제와 각국이 개별적으로 수립한 동맹 관계들은 나치 독일의 폭주를 막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유럽 전체를 피로 물들인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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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연도 내용
1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흡수된다.
2 1938년 10월 2일 테셴이 폴란드에 합병된다.[50]
3 1938년 11월 2일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토는 헝가리에 흡수된다.
4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 존재하는 루테니아 지역은 따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독립되었으나,
얼마 뒤 헝가리에 의해 무력으로 병합된다.
5 체코의 나머지 국토는 전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된다.( 보헤미아, 모라비아가 보호령으로 전락)
6 슬로바키아 독립국으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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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나치식 경례로 맞이하는 주데텐란트의 여성들. 눈물을 흘리는 여인과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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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우[52] 화백의 풍자화.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치식 경례로 화답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에두아르 달라디에, 네빌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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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우리 최대의 전쟁으로부터 구하다!
1938년 8월 30일,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 소개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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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 1938년

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들고 있는 종이는 "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다. 다우닝 가 10번지 앞의 기자들 앞에서 이 종이를 흔들면서 체임벌린은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임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라고 외쳤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하여 이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6년도 아니다. 6개월, 즉 반년짜리 평화였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협박해서 체코를 통째로 먹어치우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지탱하는 대규모의 공업시설[53]과 막대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주데텐란트, 300만에 달하는 인구까지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체코가 독일의 직할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슬로바키아가 괴뢰국이 된 직후 이웃에 있던 헝가리가 슬로바키아 동부를 침공하여 동부 국경 지대의 영토 일부를 추가로 빼앗기까지 했다. 참고
주데텐란트를 방문해 독일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히틀러
히틀러 프라하를 차지하기 앞서 서방 열강을 우습게 보았다. 이번에도 영국 프랑스가 말로만 떠들고 행동은 못하리라는 히틀러의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나타낼 반응을 히틀러가 오판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증거가 참 많다. 경고를 여러 번 받기는 했지만 히틀러가 막상 뮌헨 협정을 파기하니까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충격과 당혹에 휩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란 나라가 무너지면서 영국의 유화책도 깨졌다. 히틀러는 더는 영토 요구를 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뜨렸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복은 히틀러의 정책 목표가 독일 민족을 단일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긴 했지만 히틀러는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해졌다. 3월 17일 버밍엄 연설에서 체임벌린은 새로운 정책을 암시했다. "이것은 소국을 겨눈 마지막 공격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공격이 잇따를까요?" 체임벌린은 물었다. "이것은 사실상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내딛은 걸음일까요?"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두고 분열되었던 나라의 국론을 통일시켰다. 영국 국민은 한 목소리로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군대 지원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었다. 정부도 국민도 이제는 히틀러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36)
" 이 참극을 일으킨 책임은 한 사람의 어깨에 있다." 체임벌린은 9월 1일 영국 하원에서 말하면서 " 무분별한 개인적 야심을 채우려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린 독일 총리"를 규탄했다. 이 표현은 지나친 단순화지만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렇게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야 히틀러가 자신의 행동으로 유럽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특이한 권력의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방조한,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저지른 태만과 불찰의 죄를 슬쩍 빼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히틀러의 협박과 공갈이 먹혀든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판도가 그만큼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공갈꾼의 노다지'였다. 그것은 자꾸만 요구 조건을 키우는 빌미를 히틀러에게 주었고 1938년과 1939년에는 극에 달했다. 민족 관계가 불안해진 것도 결국 전승국들이 일방적으로 영토를 갈랐기 때문이었고 히틀러는 중유럽과 동유럽이라는 인종의 가마솥에서 그것을 이용했다. 또 서방, 특히 영국은 전쟁 배상금을 너무 과하게 물린 데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히틀러가 악다구니를 쓰고 과장을 하는 것도 사실이고 히틀러의 방식이 역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히틀러가 하는 주장이 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그런 편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전쟁에 지친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새로운 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들었고 기존의 점잖은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짓말과 위협을 밥 먹듯이 하는 히틀러에게 끌려다니면서 히틀러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럴수록 공갈꾼의 요구 조건은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서방 국가들이 히틀러의 실체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들은 이제 더는 '미친개'를 꿇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95)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 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은 당시 체코와 공동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고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4자 집단 안보 체제를 수립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 - 프 양국의 방관 속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중 분해되고 [54] 모스크바 3국 회의에서 영 - 프 양국이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에 분노해 집단 안보 체제를 포기하고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이 결과가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에는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적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달래 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무력으로 침공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 조약으로 독일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체임벌린부터 앞에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으나 뒤에선 맹렬히 재무장을 준비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즉 영프를 위시한 연합국의 의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해서 평화를 얻기보다는 독일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던져주고 그를 소화시키는 동안 군비를 비축하고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는 등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다만 애초에 벌 수 있으리라 보았던 2년은커녕 단 6개월도 못 벌었으니 완전한 외교적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 정치 기반을 아주 튼튼하게 해준 외교 성과였다. 원래 독일 군부는 나치 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그나마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이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서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파기하자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로 바뀌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사건은 외견상 무관해 보였던 스페인 제2공화국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전 초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모여 비동맹,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대놓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 파시스트 진영에게 돈과 무기, 병사를 다스로 퍼주고 있었고 소련도 반대쪽에서 공화파 진영에 지원을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좌파 인민 전선 출신의 레옹 블룸의 프랑스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화국에게 지원을 해주려고 했으나 동맹국인 영국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좌초되었다. 결국 내전 내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바로 아래에서 대대적인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공화국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며 영국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지경이었다.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이미 프랑코 진영의 승세가 유력해지는 걸 본 영국 측에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손을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내내 공화국이 추구하던 외교적 승리는 무산되고 말았다.

8. 후일담

뮌헨 협정이 성립된 독일 남부 뮌헨 총통관(Führerbau)은 오늘날 뮌헨 음악-공연예술 대학의 본관 건물로 사용 중이다. 나치 시대에 쓰인 관공용 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상당히 드문 사례다.

8.1. 뮌헨 협정 관련국들의 말로

뮌헨 협정에 관련된 국가들의 말로는 모두 좋지 않았다.
이외에도 뮌헨 협정에서 교훈을 얻은 국가도 있었다.

덤으로 회원국이 비회원국이 무섭다고 회원국을 팔아먹는데도 침묵한 국제연맹도 망했다. 물론 국제연맹은 이전부터 지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국가들 때문에 식물연맹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어느 정도의 기능이나마 회복한 건 국제연합(UN)으로 재창설된 이후다. 이전과 달리 안보리 상임이사국 제도 등을 도입해 더욱 강력해졌고 상임이사국들도 어느 정도 UN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실효적 효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후 냉전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국제연합의 위세는 크게 압도적이지 못하나 국제연맹만큼 무력하지는 않다.

체코 슬로바키아에서는 한국인들이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르듯 이 조약을 뮌헨의 배신(Mnichovská zrada) 혹은 뮌헨의 강요(Mnichovský diktát)라고 한다.[69] 한편 처칠이 뮌헨 협정을 반대하고 결국 전쟁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켜 준 은인이기 때문에 체코 및 슬로바키아에서는 처칠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한다.

8.2.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에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현실화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았으며 이 임팩트가 워낙 세다 보니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적의 폭주를 방치하는 외교적 실패를 일컫는 일종의 관용어구로까지 자리잡아 국제사회에서 자국에 적대적인 국가가 깡패짓을 할 때마다 거론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협정 조인 때만 보면 나름 성공적인 협정이었다. 독일은 히틀러가 원하던 독일 민족의 영역을 신성 로마 제국 수준으로 확보했고 중부 유럽을 사실상 통일하다시피 해서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일단 전쟁을 피했다.

만일 여기서 히틀러가 만족하고 내치에 힘쓰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면 합스부르크 이후로 최대 영역 확보와 30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에 의해서 파괴된 과거 독일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유능한 정치인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공산주의와 맞서려는 유럽 내의 맹주로 부상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다만 이미 미래에 전쟁으로 얻어낸 것을 통해 갚는다는 전제로 빚을 내 군수산업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냥 잠깐 잘 나가다 파산한 놈 A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전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휩싸였는데 금광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혼자 경제회복이 될 리가 없다.

그러니 히틀러가 거기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히틀러는 전쟁도 없이 땅을 먹었다고 좋아하기는커녕 "멍청한 무솔리니와 약아빠진 체임벌린 때문에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킬 구실을 잃었다."며 짜증을 냈고 반 년도 되지 않아 슬로바키아 분리주의자들을 부추겨 독립을 선포하게 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구실을 만들어 협정 당시의 약속과 달리 체코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에까지 그단스크(단치히)와 프로이센 북동부 해안선에 대한 영토 반환 요구를 하면서 협정은 완전히 무산되고 만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 대해 해상 봉쇄 등의 온건책을 펴기로 하자 선제 핵공격 등 강경책을 주장하던 커티스 르메이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온건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 르메이의 이 비판은 단순한 비판 수준이 아니었다. 존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는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체임벌린 내각의 대독 유화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커티스 르메이는 케네디에게 "뮌헨 협정 당시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저들에게 유화책을 쓸 참인가?"라고 깐 것이다. 또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이었는데 대독일 유화책을 지지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졸업 논문을 통해 유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었다. 실제로 그의 논문은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때문에 케네디 입장에서 자신이 유화주의자라는 비난은 더더욱 모욕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을 들은 케네디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21세기에도 분쟁 중인 국가와 세력들 간의 평화 협정(일방적 항복 협정 제외) 결정을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 원흉으로 작용하는 협약이다. 실제로 국제 분쟁 간의 평화 협정 떡밥이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론 사례가 바로 이 뮌헨 협정이며 이 사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전쟁 발발의 과정이 된 뮌헨 협정이 재조명되어 국제관계에서 적대적인 상대국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거절하고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 진영이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결성하여 대응한 것으로, 이후 소련은 약소국을 한 나라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하다 제2의 체임벌린이란 비난을 받고 싶은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사방이 적국인 이스라엘도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자국 안보가 무너진다며 항상 긴장을 놓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점령했던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되었으며 헝가리가 점령했던 남슬로바키아도 반환되었다. 단 우크라이나인들이 살던 루테니아는 헝가리의 점령에서 벗어나 잠시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갔다가 곧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행정구역인 자카르파탸주(Zakarpattia Oblast)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 등을 통해 범독일권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언제든 독일의 침공 명분에 걸려들 수 있음을 인식한 주변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전후해 독일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작업에 착수했다. 전쟁기 거주 독일인들은 극렬한 친나치 행보를 보인 건 물론이거니와[70] 매국행위를 매우 적극적으로 행했고 이를 체험한 시민들의 적대감은 이런 작업에 더더욱 불을 붙였다. 이 시기에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유고슬라비아 등 중부 유럽과 동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독일인들이 무일푼 맨손으로 거의 다 서독이나 동독으로 추방되었고 주데텐란트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곳곳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도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다른 민족들을 탄압한 것에 당하며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의 공격을 피해 황급히 서독이나 오스트리아로 탈출하여야 했다.[71]

영토 문제나 일부 재산권 문제, 그리고 침공 피해 국가들에 대한 피해 보상 문제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완전한 포기 선언과 대대적 사죄 정책 추진으로 본격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하기 전까지 서독과 각국 사이에 잔존했다. 현재에도 추방 당시 독일인들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도망치면서 남기고 간 재산권의 문제, 그리고 독일인들의 귀환 및 재정착 가능성 문제가 독일과 각국 사이에서 때때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겹쳐져 오늘날에도 체코와 폴란드 지역에서 반독일/반오스트리아 감정은 상당한 편이다.

8.3. 뮌헨 협정 대신 전쟁이 곧바로 벌어졌다면?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화를 위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예시로 만약 이 조약 없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도, 심지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수많은 죽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1년 먼저 시작된 비극이었을 뿐이지만.[72]

간혹 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이란 가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정이었는지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뮌헨 조약 이후 소련의 독촉으로 소영프 3국간 회담을 열었는데 이 자리는 소련이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동맹의 확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시점에서도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이 고작 4개 사단에 이마저도 완편사단은 고작 2개밖에 없다는 어이없는 대답으로 자폭하면서 영국의 전쟁 동원 능력의 현실을 드러내 보였으며 그리고 이런 서방의 대응에 열받은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화답했고 실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가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병력과 장비 모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근 8개월 간 전투가 전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프랑스보다도 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이 가용한 병력은 불완전하게 준비된 36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는 프랑스가 당장 운용 가능한 40개 사단과 영국의 4개 사단,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20개 사단에 한참 못 미치는 전력이었다.

이렇게 된 건 히틀러가 1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군비를 증강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군비지출이 많지 않아서였다. 독일이 전쟁을 수행해 볼 만하게 된 것은 6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해진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시점이었고 그나마도 체코의 산업시설을 돌려서 생산한 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후일 15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하게 된 바르바로사 작전은 유럽 거의 전역을 수탈하여 얻은 막대한 자원과 산업기반,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례로 폴란드 침공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체코제 35(t) 전차와 38(t) 전차[73]는 독일 기갑사단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 당시 군사력 균형은 아무리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훨씬 유리했으며 독일군은 1940년 프랑스 전역 직전이 되어서야 수적으로나마 프랑스군-영국군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도 독일 전차는 프랑스 전차보다 성능상 확고히 열등했다.

다만 전술적/작전적 영역에서 혁신적 기계화부대 운용을 성공시켰고 여기에 보태서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너무나 무능한 모습을 보인 덕택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영프가 괜히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겁을 내서 양보하기보다 단단히 각오하고서 1938년에 전쟁을 벌였으면 나중에 질 때 지더라도 최소한 1940년처럼 어이없는 패배는 없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뮌헨 협정 시기 나치 독일의 탄약 재고는 불과 2주치였다. 그러나 1940년의 프랑스는 불타는 동유럽을 보며 진심으로 전쟁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박살나며 처칠이 할 말을 잃게 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전투력이 숫자에 비해 실속이 없었을 것이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독일 군부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심지어 비밀리에 영국측에 접근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시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킬지, 또 일으키더라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수는 없지만 설령 실패하더라도 작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공산이 높다.

상당히 의외의 이야기지만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서 완벽한 외교적 승리가 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영-불 측이 안일한 이상주의에 빠져 있을 동안 그들을 이용해서 국력을 팽창시킬 수 있었고 뮌헨 협정은 그것의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헨리 키신저는 만약 히틀러가 뮌헨 협정 단계에서 팽창을 멈추고 영국과의 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면 독일의 국력은 유럽의 그 누구도 막지 못할만큼 강대해졌을 것이라고 평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나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던 것 자체는 사실이고 주변 독일계 주민들을 이용해서 소국들을 하나 둘 병합은 아니라도 친독성향으로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유럽의 제1대국이 됐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래봤자 독일은 몰라도 히틀러는 절대 그런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히틀러 본인이 국내 혼란에서 독일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저런 뻥카를 걸었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장은 영토를 확장시킨 일로 권좌를 지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이어올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을 외치는 다른 세력에게 권좌를 빼앗겼을 것이다. 설령 수습해내고 무난한 성장으로 방향을 돌렸다 해도 완전히 포위된 독일의 신세는 변치 않는데 프랑스는 6주컷을 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전선을 형성하기만 해도 독일과 1년 단위로 싸울 체급을 가졌고 지역 강국 급인 폴란드도 독일과 대립 중이었다. 무엇보다 동쪽의 소련은 이미 이 시점에서 총체적인 국력에서 독일을 압도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런 성장세를 60년대까지 이어나가 한 때나마 미국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나마 독일이 이런 소련에 맞선 반공 전선의 수장으로서 유럽을 외교적으로 규합할 수도 있었겠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독일이 1941년에 모스크바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영국을 제외하곤 전유럽을 석권하여 전력을 다해 소련과 싸울 수 있었고 기습이 제대로 먹혀서 소련군이 일거에 붕괴 했기 때문이었다. 재무장한 프랑스를 후방에 두고 그러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오히려 독소전쟁의 대참사를 겪지 않아 현실보다 더 강력해지는 소련을 상대로 군비경쟁에 휘말리다 극도로 비효율적인 나치 체제가 견디지 못 하고 먼저 제풀에 무너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데 정작 협상을 체결한 히틀러는 패전 직전에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뮌헨 협정을 자신의 최대의 실수로 평가했다고 한다. 뮌헨 협정이 나치 독일 최대의 외교 성과로 평가받는 것과 상반된다. 만약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하면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면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도 영프가 전쟁을 망설였다면 독일은 분명 더 유리했을 것이지만, 히틀러의 생각과는 달리 나치 독일이 주데텐란트에 그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면 당시의 영프라 해도 전쟁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뮌헨 협정만 해도 아슬아슬한 도박이었는데 그걸 훨씬 더 넘어서도 도박이 통하리라고 생각했단 것 자체가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영프도 오류를 저질렀는데 1956년 수에즈 전쟁은 뮌헨 협정의 교훈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한 탓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일방적으로 선포하자 영프는 이스라엘과 함께[74] 저들 딴에는 '히틀러 같은 짓을 저지른'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소련의 핵 협박과 미국의 엄포에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면서 식민제국의 몰락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9. 녹색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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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후 사학계의 주류 학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하고자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뮌헨 회담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정치행정 분야)뮌헨회담
(동유럽사)외교 정책과 뮌헨 위기
(네이버 조약사)뮌헨 협정
(한국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영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10. 명칭

<colbgcolor=#cccccc,#212121> 독일어 Das Münchner Abkommen[75]
영어 Munich Conference, Munich Agreement
프랑스어 Les accords de Munich
체코어 Mnichovská doho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dohoda
이탈리아어 La conferenza di Monaco
폴란드어 Układ monachijski
헝가리어 Müncheni egyezmény
러시아어 Мюнхенское соглашение[76]


[1] 영국 총리 [2] 프랑스 공화국 총리 [3] 독일국 퓌러 [4] 이탈리아 왕국 두체 [5] 이탈리아 왕국의 외무장관 및 외교관이자, 무솔리니의 사위. [6] 데이비드 로우의 작품. 폴란드 침공 문서 첫 번째에 있는 만평을 그린 인물이다. [7] 출처 본래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를 위한 '(for our time) 평화라고 말했지만, 성공회 기도서에 등장하는 '우리 시대의'(in our time) 평화라는 문구가 널리 알려진 바 있어 해당 문구로 잘못 인용되고는 한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8] 민족 정체성 확립 이전에는 서슬라브족 중심의 대 모라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9] 예컨대 16세기 이전까지 보헤미아 왕국이 영향력을 미치던 보헤미아 외 모라바(모라비아), 실레시아(슐레지엔)를 포함한 영토가 곧 체코가 된다. 아예 제대로 된 본체도 없었던 슬로바키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보헤미아 지방(라틴어 명칭)을 부르던 원어명인 체히, 체코를 사용하는 건 체코의 다른 지방에겐 약간 불만이 되는데 어느 순간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체스코'란 단어가 미디어에 의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 체코인이 보헤미아 왕국으로 1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던 반면 슬로바키아인은 11세기 경부터 900년 넘게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 왔다. 대 모라비아 왕국 이래 이들이 한 나라의 주 민족이 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이었다. [11] 독일어 명칭. 체코어로는 테신, 폴란드어로는 치에신이라고 불린다. [12] 본래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의 일부로, 역사적으로 폴란드인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1차대전의 종전으로 이중제국이 붕괴되자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모두 해당 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했다. 1919년 1월 폴란드가 테신/치에신 지역에서 세임(의회) 선거를 치르겠다 발표하고 분쟁 해결 이전까지는 해당 지역에 선거를 진행하지 말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제의를 거부하자 체코슬로바키아가 지역을 침공, 당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에 발이 묶여 있던 폴란드에 우위를 점했다. 따라서 전후 1920년 스파 회의에서 지역이 분할되어 약 1/3이 폴란드에 귀속되었고 나머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에 14만명의 폴란드인이 소수민족으로 남게 되었다. [13] 하지만 도시 주민의 대다수를 독일인/유대인이 차지하던 동유럽 특성상 체코슬로바키아 도시 주민의 상당수가 유대인이라는 점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헤미아의 높은 도시화율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 도시는 다른 동유럽 국가에 비해 유대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대신 독일인이 많았기 때문에 독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14] 이는 슬로바키아인들보다도 많은 수였다. 193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내 슬로바키아인 수는 약 220만명이었다. 이 독일계 인구 중 많은 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나 20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다. [15] 다만 그렇다고 독일인의 존재를 이유로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의 영토로 할양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첫째로 체코인과 독일인이 워낙 섞여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국경선을 긋던 간에 해당 국가 안에는 소수민족의 월경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독일인 다수지역을 죄다 독일계 국가에 통합시킨다면 오히려 독일계 국가 내에 대규모의 체코계 주민 거주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수데티와 나머지 보헤미아 지방은 민족적으로는 구분될지는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긴밀히 통합되어 있었으므로, 경제적 면을 고려하자면 수데티를 분리시키는게 아니라 보헤미아와 통합시키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당장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제국 해체 이후로 각 지역이 경제난으로 골골대는 판에 체코도 수데티를 분리시켰다가 체코도 수데티도 훨씬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인 다수지역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계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독일계 국가에 넘겼다간 체코슬로바키아 면적의 폭이 훨씬 좁아져서 국토 방위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현실화되었다. [16] 엄밀히 말해 영국과 프랑스도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식민지는 유지했지만 정작 전쟁 때문에 돈을 너무 써서 재정적으로 식민지 유지가 부담스러웠고 식민지는 죄다 본국보다 경제력이 후달려 경제적인 도움도 못 되는 계륵이었다. 착취를 한다 해도 정작 착취해서 만든 상품은 식민지의 경제력이 그 모양이니 제대로 사줄 수 있을 리 없었다. [17] 사실 이런 주장은 1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등장했으나 그간은 그래도 별 문제가 없으니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라가 어려워지자 책임을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 한 마디로 IF 가정이라 할 수 있다. [18] 서쪽으로는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남쪽으로는 스위스와 발칸 일부 지역,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 일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게르만인 거주권. 발칸 북부와 벨라루스/우크라이나 그리고 일부 러시아 지역은 동방식민운동 등으로 독일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한 지역이어서 제법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며 주요 소수민족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19] 이런 류의 국가는 엉뚱하게도 아메리카의 미국이었다. 서부개척과 산업화를 거치며 경제력을 뻥튀기한 미국은 이미 1차대전 시기부터 패권을 차지할만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단지 아직까지는 고립주의에 의해 패권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20] 이미 두 나라는 1차대전의 상흔도 다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결국 2차대전까지 맞자 각자의 식민제국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즉 또 세계대전을 맞았다간 식민제국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21] 1913년에 총리를 역임했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 알렉산다르 1세와 함께 살해당한 사람이다. [22] 소협상국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가 결성했으며, 그 목적은 헝가리의 레방시즘에 대한 공동 대응이었다. [23] 1936년에 루마니아는 소련군의 영토 통과를 허용하긴 했지만 부코비나 지역만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24]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우선 고립주의 여론이 절대 다수인 상황에 더해 독일계 미국인들이나 극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독일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파벌들이 있었다. 미국의 대다수 국민들과 의회의 고립주의자들이 갖는 힘에 비해 이들의 영향력은 극히 하찮았으나 숫자가 상당하고 활동력이 엄청 좋아서 연방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여론이 참전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에 연방 정보 기관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이 친독/친나치 조직들을 제압하여 해산하는 것이었다. [2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랑스가 함락된 후인 1941년 1월 6일 네 가지 자유로 널리 알려진 연두교서 발표 연설에서 유럽 등 전세계에서 커져가는 공포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압제 정치와 독재자들, 독재 제국을 언급하면서 이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대항해야 함을 암시했으나, 미국의 고립주의 여론은 여전히 강성했다. 이런 여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 바로 진주만 공습 [26] 특히 단치히 자유시가 문제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27] 메멜 지방. 1939년 3월에 결국 삥 뜯었다. [28] 쥐트티롤. 1943년 이탈리아 항복 후 성립된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압박해 독일로 편입시켰다. [29]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자 취리히, 루체른 등 북부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스위스가 독일 편에 붙든지, 아니면 독일어권 지역만이라도 독일에 합병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이는 스위스 정부에 의해 금방 탄압되었지만. [30]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 속한 티롤 3지방 가운데 중부인 보첸 현.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대가로 얻어냈다. [31] 쥐트티롤은 훗날 히틀러가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면서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와 함께 강탈했다. [32]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인들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서 독일인의 공무원 채용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독일인들의 불만사항 중 하나였다. [33] 독일의 전쟁 준비는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당시까지도 제대로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반대하다가 사임하기까지 했다. [34]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766면. [35] 참고로 이때 체코 쪽에 몰려 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중공업 단지와 막강한 방어력을 가진 요새들까지 죄다 넘어갔다. 이 요새들은 상술했듯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고 지었는데 독일의 자원으로 바뀐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36] 그나마 지켜진 영토 문제도 1개월도 안 돼서 헝가리 왕국 루테니아를 합병하고 6개월 후에 나치 독일 체코를 완전히 점령 및 자국 영토로 재편하고 슬로바키아를 분리독립+괴뢰국화시키면서 백지화되었다. [37]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는 뮌헨 협정 1달 후인 제1차 빈 중재로 수도가 될 예정이었던 우주호로트와 남부 지역이 헝가리에 병합되었으며 6개월 후 히틀러가 체코를 완전히 병합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나 독립을 선언한 지 하루만에 헝가리군이 침공해 헝가리에 합병당한다. [38] 이것도 6개월 후에 히틀러의 독일군이 체코를 완전히 점령하고 괴뢰국인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세우면서 없던 것이 되었다. [39] 참고로 당시 폴란드는 나름 군사강국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21세기 NATO의 동유럽 전진 기지와 같은 위치가 아니라 독립 직후 연이은 전쟁과 독재로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독립 전부터 딱히 경제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체코슬로바키아만큼 발달된 국가는 아니었다. [40] 근데 황당한건 뮌헨 협정 시점에서 영-프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독일이 영-프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41] 강력한 폴란드군 이미지는 18년 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후 경제력 등의 문제로 인해 시대의 급격한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의 동맹국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이 건에 관해서는 폴란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에게 동부 국경을 변경할 권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은 프랑스였다. 폴란드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유화적으로 나오자 서유럽으로부터 어떤 효과적인 보조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나름의 자구책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폴란드는 2년 전 소련과도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즉, 폴란드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고 싶어도 그 놈의 불가침조약 때문에 독일을 견제할 수 없었다. 물론 그걸로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동참한 걸 정당화할 순 없지만. [42] 이런 판단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타격으로 말미암은 사회 혼란은 결국 러시아와 스페인에서처럼 사회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영국과 프랑스 내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공포에까지 나아가곤 했다. [43] 다만 1930년대 중후반의 소련은 스탈린의 대대적인 공업화 정책 아래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었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된다. [44] 당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경제 문제를 적절히 제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을, 중장기적으로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재생산할 수 있는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민간 영역의 기초 인프라와 소비재 경공업 등 민간 소비 품목들을 생산하는 기초 산업 시설에 대한 투자에 집중함과 동시에,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야기하던 실업 및 저소득 문제 해결을 위한 복지 재원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했다. 실제로 미국의 뉴딜 정책도 이러한 기조를 골자로 진행돼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위에서 언급한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경제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는 커녕 잠재 성장률까지 까먹고 있었고 더해서 히틀러가 재무장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경제적 자원인 자본과 자원을 재생산 능력이 사실상 전무한 군수 분야에 쏟아붓고 있어 지속 불가능했다. 나치 정권은 이미 따갚되를 전제로 한 카드깡 돌려막기 경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아우토반 건설, 전차공장 건설 등을 빚내서 하는건데, 그 돈 빌려줄 나라도 적고 빌려줘도 이자 갚다가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45] 다만 후일 거의 혼자서 2차대전을 치른 걸 보면 위의 통계 마사지를 배제하더라도 독일의 경제 규모와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은 맞다. 더불어 식민지가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듯 독일도 여기저기 정복해서 얻은 점령지는 도움이 되긴 커녕 오히려 장애물만 되었다. 그나마 루마니아의 유전 등 추축동맹국들의 지원이 다소 도움이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동맹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이지 식민지라서 수탈한 것이 아니다. [46]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이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는 있었으나 어쨌건 세계 3위의 규모는 맞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나 쌓아놓은 자산의 규모 면에서 뒤쳐진 것도 아니었다. 아예 가진 게 없으면 선전해도 먹힐 턱이 없지만 뭔가가 있으면 통계 마사지로 뻥튀기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고, 괴벨스는 이런 일에 매우 능통한 최적의 인재였다. [47]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만 해도 1980년대까지도 북한의 국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공포가 만연했고, 이는 고난의 행군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다가 2010년대 들어서야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48] 기실, 이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오헝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던 와중 명분없이 독일 제국까지 해체한 영불의 실수이기도 하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르면 독일 제국은 기껏해야 폴란드와 맞대고 있는 지역 일부 정도를 떼 줄 정도로 일단 독일은 그런 지역에 살고 있는 폴란드인을 제외하면 단일민족국가에 많이 가까워 애초에 영불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 버린 면이 크다. 당장에 이 회담에서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땅 뜯어먹기에 동참한 것을 보면 이 시기 나치 독일이 얼마나 큰 명분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명분을 준 이는 다름아닌 영불 자신들이었다. [49] 당시 영국 정치권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없어도 프랑스가 있으니 상관없다고 여겼다. 영국은 백만 대군을 보유한 유럽에서 손꼽히는 육군 강국인 프랑스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내부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군을 시찰한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백만 대군은 허상이었다며 크게 개탄했고 훗날 프랑스 침공에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50] 이후 1938년 12월 1일에는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의 일부 지역이 추가로 폴란드에 흡수되었다. 참고 1 참고 2 참고 3 [51] 사진속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을 두고 기쁨에 감격하는 모습이라는 것과 혹은 병합에 반대하지만 나치의 탄압이 두려워 경례는 하면서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대부분 친나치 성향이었고 독일군의 존재가 싫어서 울고 있었다면 애초에 행렬 맨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대체로 기뻐서 우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52] 폴란드 침공 문서의 풍자화를 그린 사람이다. [53] 주데텐란트를 잃으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강철 생산량의 70%와 전력 생산량의 70%를 상실했다. [54] 소련군을 체코에 진주시키려 했으나 폴란드-루마니아가 거부했다. 그 대가로 폴란드는 분할당했고 루마니아는 독일의 종속적 동맹국으로 추축 멤버가 되었다가 종국에는 패전국이 된다. [55] 독일은 베를린 선언(Berlin Declaration)에서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not exist)으로 간주되었다. 일본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추축국 진영 전체를 통들어 멸망 처분을 받은 건 독일이 유일하다. [56] 은근히 간과되는 부분인데 포츠담 회담으로 확정된 독일의 배상금은 230억 달러에 달했다. 물론 독일이 알거지가 되었으니 현금으로 뜯어내긴 힘들고 산업시설같은 현물로 대부분 뜯었다. [57]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한 '유인원 작전' 직후 나치 독일은 그 보복으로 그가 암살당한 체코의 '리디체'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 버린 것은 물론 성인 남자는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전원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주데텐란트는 돌려받아도 독일계 주민은 놔두려고 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계 주민들을 전부 독일로 추방하는 강경책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58]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브란덴부르크 동부 지역 등 다른 구 독일령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도 사정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이들 지역들을 전후에 소련, 폴란드에 합병한 소련, 폴란드 당국의 방침으로 이들도 대부분 예로부터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독일 본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다만 이들은 원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였었던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과 달리 이들은 전쟁 전 나치를 지지한 것과 별개로 과거 원래 독일령이던 곳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기에 당시 소련군과 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 원수, 적 취급은 받았어도 매국노 자체로 간주되지 않았다. [59] 참고로 이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독일과 체코의 입장이 많이 다른데 독일 정부는 체코 영토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인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가거나 이전 재산 소유권에 관한 소송을 거는 것 자체는 막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체코 측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2015년 주데텐란트 지방에 속해있던 체코의 한 시의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강제 추방에 대해 사과하였다. [60] 아이러니한 건 네빌 체임벌린 역시 소련을 극도로 혐오한 자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이 대독일 대책을 세우려고 했을 때도 시큰둥하게 여겼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한판 붙어서 서로 공멸하기를 바랐다. 물론 스탈린은 바보는 아니었기에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이에 화답했다. [61] 폴란드 회랑의 실제 민족분포 여부와는 별개로 이번에도 독일의 명분은 민족자결이었다. [62] 실제 이탈리아 구 왕가의 귀국은 2002년에야 이뤄졌다. [63] 이 불꽃 모양은 1944년 나치 괴뢰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64] 물론 종교적 상징물을 부정하는 공산 정권 눈에 십자가가 아니꼽게 보인 탓도 있었다. [65] 사실 이마저도 프랑스의 참전이 전제된 거라서 그렇게 적극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중간중간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기로 결심한 뒤에는, 문서 상단의 데이비드 로우 화백이 그린 풍자화의 내용과 같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물론 처음부터 독일한테 설설 긴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직접 군사 지원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소련-체코슬로바키아 간 직접 국경이 없는 데다가 대숙청으로 소련군의 상황도 나빴으니 현실성은 떨어졌다. [66] 협정 후 반 년이 살짝 못 지난 1939년 3월쯤 되면 영국과 프랑스도 나치와의 일전이 불가피함을 명확하게 인식한 뒤이기도 했다. [67] 프랑스의 경우 그나마 영국과 함께 파견한 대소 협상단에 전권을 위임하고,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도 유럽 제일의 육군 강국이라 일컬어지던 나라다운 면모가 드러났으나 마지노선을 기준으로 우주방어를 하겠다고 나간 게 문제였다. 영국은 더 심해서 협상단에 협상 권한이 없음은 물론, 완편된 지상군 사단이 1개 남짓임을 밝혀 소련 대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당혹시켰다. 그리고 폴란드는 독일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68] 다만 동시에 미국은 소련(냉전 종식 이후에는 러시아)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보장 범위를 적당히 조정했다. 냉전 시절에는 서독, 노르웨이, 그리스, 이탈리아 등 NATO 가입국들과 자유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중요도가 높은 국가들만 보호했으며 탈냉전 이후에는 폴란드, 체코와 슬로바키아, 핀란드, 발트 3국 등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난 국가들을 추가하여 보호 범위에 집어넣었고 그 외의 국가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러시아가 일으킨 돈바스 전쟁과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도 미국이 당시 우크라이나와 남한( 애치슨 라인 밖)을 보호 대상에서 공식적으로는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이가 많다. [69] 한국으로 치면 뮌헨 협박쯤 되는 표현이다. [70] 현지 독일인들이 나치에게 자신들을 "해방"해 달라고 청원하면서 독일의 침공을 부추긴 것은 예사로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계 민병대를 구성해 자국 군과 경찰, 공공기관들에 테러를 가하고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경우도 있었다. 독일계가 이렇게 총질을 해대는데 정부는 당연히 군경을 투입해 진압해야 하고, 그걸 본 히틀러는 독일계가 학살당한다고 선전했다. [71] 앞서 보았듯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나치가 만행을 안 저지른건 아닌지라, 특히나 '유인원 작전'으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죽은 후 애꿏은 해당 지역 사람들을 학살한 게 결정타였다. [72] 덕분에 일찍 일어난 전쟁처럼 만약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하는 소재로 나온 대체역사물도 나온 적이 있다. [73] 톤 단위의 무게라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자체에 괄호가 포함된다. 실제로는 7톤짜리 경전차였고 보병전은 몰라도 기갑전 수행은 불가능한 물량 채우기용이었다. [74] 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침공을 당한 기억과 나세르의 호전적인 성향 때문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받아들였다. [75] 정식 명칭은 "1938년 9월 29일 뮌헨에서 행하는 독일 간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의 협정" (Abkommen zwischen Deutschland, dem Vereinigten Königreich, Frankreich und Italien, getroffen in München, am 29. September 1938).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협정에 정작 체코슬로바키아는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76] 혹은 Мюнхенский сговор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