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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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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공화국
Rzeczpospolita Polska
II Rzeczpospolita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폴란드 제2공화국 국장.png
국기 국장
상징
국가 폴란드 국가
지도
파일:폴란드 제2공화국.svg
1918년 11월 11일 ~ 1939년 9월 28일
성립 이전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 제국 독소 폴란드 점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폴란드 지하국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코만차 공화국 폴란드 망명정부
렘코 공화국
역사
1918년 독립
1918~1919년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1919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쟁[1]
1919~1921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9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1925~1934년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1938년 자올지에 점령
1939년 폴란드 침공 및 멸망
지리
위치 중부유럽
수도 바르샤바
면적 388,634km²
정치
정치체제 1918년~1926년: 민주주의
1926년~1939년: 권위주의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주요 대통령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주요 수상 옝제이 모라체프스키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카지미에시 바르텔
레온 코즈워프스키
발레리 스와베크
인문환경
언어 폴란드어
종교 가톨릭
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1. 개요2. 역사
2.1. 설립2.2. 영토 분쟁2.3. 인테르마리움(미엥지모제)2.4. 혼돈의 정국2.5. 경제2.6. 붕괴
3. 대외관계4. 민족5.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수립된 국가였다.

폴란드 제1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795년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하여 멸망한 뒤 무려 123년만에 다시 세워진 폴란드인의 독립 국가였다.

천신만고 끝에 독립을 이루었지만, 애초에 국가의 위치가 독일 소련 한 가운데에 끼어 있어 너무 안 좋았던 데다가[2] 그동안 쌓여왔던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여 독립 직후 주변 국가들과 치고받았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시절 국경을 맞댄 나라 중 라트비아와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번씩은 분쟁을 치렀다.[3] 이것이 독일, 소련과 같은 주변 강대국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면서 국경 분쟁으로 이어졌다. 독일과 소련은 자신들의 세력권이었던 동유럽에 폴란드를 비롯한 신생국이 무더기로 등장한 것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와 더불어 세계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및 독재로 인한 정치 혼란으로 존속 기간 내내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결국 1939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하여 멸망했다.

2. 역사

2.1. 설립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압승을 거두면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폴란드 동부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1916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괴뢰국 폴란드 섭정왕국이 수립되었지만 전쟁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괴뢰국은 와해됐고 폴란드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종전 직후에는 각 정파들이 제각기 공화국을 선언하는 개판의 상황이었지만 폴란드의 독립 영웅이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독일에서 석방되어 11월 10일에 바르샤바에 도착함에 따라 서서히 교통정리가 이루어졌다.[4] 대중의 막대한 지지를 등에 업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임시정부와 임시의회에게서 폴란드군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 최고지도자에 취임했다.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옝제이 모라체프스키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최초의 내각 및 헌법을 창설했으며 소파전쟁이 끝나자 독립운동가인 가브리엘 나루토비치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2.2. 영토 분쟁

폴란드는 기본적으로 1차 대전 이전에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성립되었으므로, 이는 필연적으로 폴란드와 거리상 가까운 독일 소비에트 러시아[5], 체코슬로바키아, 우크 라이나,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차 대전 전후로 독립한 중유럽 및 동유럽 신생국들은 대개 한 나라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반면,[6] 폴란드는 원래 한 나라였다가 3개국에 분할되었고 1차 대전 후 그 분할된 파트들이 다시 뭉쳐서 독립한 국가였으므로, 생제르맹 조약으로 영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더라도 국경분쟁에 연루될 강대국이 독일과 러시아의 2개 국가나 존재했다. 당연히 독일과 러시아는 폴란드라는 신생 독립국에게 자국 영토를 순순히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폴란드 분할로 독일 제국령에 편입된 대폴란드 지방도 폴란드인이 봉기를 일으킨 후에야 폴란드령이 되었고, 러시아도 옛 러시아 제국령을 탈환하기 위해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를 일으켰다. 건국 초기에 겪은 영토변화는 1921년 3월을 끝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독일, 폴란드, 리투아니아, 소련 등이 폴란드의 국경선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제로 변화하는 것은 17년 후 폴란드가 자올지에(Zaolzie)를 획득한 1938년 뮌헨 협정 당시의 일이다.
1차 대전으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면서, 각 제국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은 각자의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싸웠다. 동부 갈리치아는 수적으로 우크라이나계가 과반에 폴란드계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계가 1918년 11월 건국한 것이 바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현지의 폴란드계는 서우크라이나의 지배를 거부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결국 폴란드와 서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1919년 7월까지 벌어진 전쟁은 폴란드의 승리로 끝났고, 폴란드는 동부 갈리치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우크라이나는 전쟁이 한참인 1919년 1월 22일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공식적으로 통합[7]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러시아 SFSR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1920년 4월 폴란드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폴란드의 동부 갈리치아 영유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폴란드의 어중간한 승리로 끝나버리면서 공중에 붕 뜬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그대로 붕괴되어버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가지고 있던 리우네(Rivne) 지역도 폴란드에 합병되었다.
협상국최고위원회[9]는 3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의 국경선을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10] 그러나 폴란드는 그 선 이상인 르부프(Lwów, 현 르비우)를 포함한 동부 갈리치아 일대를 원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 대립까지 맞물리면서 폴란드와 볼셰비키 간에는 잦은 무력 분쟁이 발생했다. 게다가 볼셰비키가 내부 교통정리를 어느 정도 진행하고 여기에 서유럽으로의 사회주의 혁명 수출을 기도하였기에 그 길목에 있는 신생 공화국인 폴란드 입장에서는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도 러시아 SFSR을 위시한 볼셰비키는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가,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11], 우크라이나[12]를 상대로 거의 동시에 선빵을 날리는 위엄을 보였고(...)[13] 이 중 폴란드의 중심부와 지척인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수도 민스크가 함락되고 러시아 SFSR의 괴뢰정권인 벨로루시 SSR이 설치되어 볼셰비키의 침략을 당한 나라들 중 가장 빨리 망해버렸다.[14][15] 여기에 해당 지역의 신생국과 연합했던 폴란드계 군사조직들도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연패하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1919년 2월 14일, 브제시치(Brześć, 현 브레스트) 근방의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라는 소읍에서 폴란드군이 볼셰비키 80명을 사로잡으면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였다. 폴란드는 초기 북부 전선에서 빌뉴스 일대와 민스크를 점령했다. 전쟁은 1920년 초 우크라이나의 동맹 요청을 계기로 확전되었다. 러시아 SFSR은 1919년 1월 6일에 괴뢰정권인 우크라이나 SSR을 성립시키고[16] 바로 다음날인 7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 2월 5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함락시킨 바 있었다.[17] 우크라이나는 이듬해 4월 22일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었고, 이렇게 결성된 폴란드-우크라이나 연합군은 5월에 키예프를 되찾았다.[18][19] 그러나 명장 미하일 투하쳅스키 세묜 부됸니가 이끄는 볼셰비키의 대대적 반격에 밀려 키예프, 민스크, 빌뉴스 등을 모두 내주고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밀렸다. 볼셰비키의 맹진격에 기겁한 협상국은 7월에 커즌 라인을 국경선으로 제시했지만 볼셰비키는 묵살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바르샤바 근방에서 극적인 대승을 거두어( 바르샤바 전투. 일명 비스와 강의 기적) 전세를 다시 역전시켰다. 그 직후 개시된 반격으로 폴란드군은 오늘날 폴란드 동부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벨라루스의 절반을 재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군사적으로 판이 완전히 말린데다 경제도 박살난 볼셰비키는 폴란드와 강화를 맺고자 했고, 마찬가지로 경제가 박살난 폴란드도 동의하여 1920년 10월 정전에 합의,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통하여 폴란드는 동부 갈리치아를 지켜낼 뿐만 아니라 커즌 선보다도 무려 동쪽으로 250km 가량을 이동한 국경선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지하는 등 전쟁에서 얻은 것은 있었다.[20] 이 때 폴란드가 얻은 영토는 2차대전 이후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소련에게 병합된다. 한편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남부 전선에서 다시 공세를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지만 격퇴당하고 11월 말 다시 폴란드로 쫓겨났다.[21]
러시아 SFSR 이외에 폴란드는 독일과도 영토 분쟁을 벌여야 했다. 폴란드는 폴란드계가 다수인 상부 실롱스크(슐레지엔) 지역과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이 폴란드 측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은 역사적 경계와 그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이유로 이 지역이 독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여기에다가 단치히 폴란드 회랑을 놓고도 분쟁이 벌어졌는데, 폴란드 회랑은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고 남부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계가 대다수였기에 별 탈 없이 폴란드에 넘어갔으나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북부(구 서프로이센) 지역은 상부 실롱스크와는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음에도 당시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이었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출구를 약속한다는 조항에 따라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 영토로, 단치히는 독일에서 분리되어 국제연맹 감독 하의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상부 실롱스크와 동프로이센 남부에선 주민투표가 시행되어 상부 실롱스크(슐레지엔)는 투표 결과 68%는 독일에 잔류, 32%는 폴란드에 귀속되었으며, 동프로이센 남부는 전역 독일 잔류가 확정되었다.

상부 실롱스크(슐레지엔)에서는 폴란드 편입을 목적으로 한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3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봉기는 모두 독일계가 폴란드계를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탄압한 것이 발단이었으며, 특히 1차 봉기 진압 직후에는 보복조치로 2,500여 명의 폴란드계가 학살당했다. 2차 봉기 이후에는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을 결정하기로 하였고, 3차 봉기 이후에는 상부 실롱스크를 분할해 각각 독일과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이 주민투표는 베르사유 조약 88항에 의거하여 독일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주민투표 지역에 거주하지 못하던 루르 폴란드인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고 공정한 투표를 위해 상부 실롱스크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지 못하게 하였다. 허나 휴고 서비스를 포함한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조항은 외부에서 독일인들을 유입하는데 악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폴란드는 2차 주민투표 때도 폴란드계가 70%에 이르는 오데르 강 이동의 상부 실롱스크 지역에서만 주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쨌든 폴란드 회랑 문제 때문에 열 빵빵하게 받아있던 독일은 이로 인해 더더욱 폴란드에 부득부득 이를 갈게 된다.
리투아니아는 1918년 2월 16일 독립을 선언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독일 제국이 패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파기되자 순식간에 볼셰비키와의 분쟁에 휩싸였다. 그 와중인 1919년 6월 18일에는 대사 회의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분할선을 그었지만, 폴란드는 그딴 거 씹고 분할선을 넘었다. 따라서 1918년 7월 18일 페르디낭 포슈가 제안한 새로운 분할선이 그어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선으로 확정되었다.[23] 피우수트스키는 더 나아가 1919년 8월 리투아니아에서 쿠데타를 획책, 리투아니아에 친폴란드 내각을 수립하려 했지만 9월 리투아니아 정부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당연하지만 양국간 관계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고, 1920년 중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밀리자 수바우키 지역을 수복했다. 하지만 다시 폴란드가 반격하자 이 지역을 내놓지 않고 버티려고 했고,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으나 대패, 10월에는 아예 수도였던 빌뉴스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당시 빌뉴스는 주민 구성에서 폴란드계가 50%, 유대계가 44% 가량을 차지했는데 이에 대해 '폴란드인들이 대다수이니 폴란드 땅'[24]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든 후 병합했고,[25] 1938년까지 수교가 없었으며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할 때까지 자국 영토로 유지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와도 체코 국경의 테셴[26] 지방과 야보리나, 토르스테냐 등 슬로바키아 국경지대 일부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테셴은 폴란드, 독일,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테셴을 이루는 4개 구 중 서부의 프리데크(Friedek) 구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역사적으로 폴란드계가 다수인 지역이었다.[27]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멸한 1918년 11월 5일, 테셴의 폴란드계와 체코계 민족위원회는 테셴을 잠정적으로 분할했다.[28] 그러나 경계선에 따르면 탄광과 철도 일부[29]가 폴란드쪽에 넘어갔으므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지역을 무력으로 탈취하려 했다.[30]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테셴 전 영역을 병합하기 위해 1919년 1월 23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전쟁은 30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가 테셴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대소전쟁을 치루던 폴란드의 물자반입을 거부하면서 폴란드의 혈압을 더 올려버렸다. 결국 1920년 7월의 스파 협정(Spa Conference)에 따라 전쟁은 테셴을 올자(Olza) 강을 경계선으로 재분할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탄광과 철도가 위치한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31] 이때의 원한으로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전간기 당시 폴란드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이웃나라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라트비아,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반소 감정이 강했던 루마니아 왕국, 역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했으며 정권 성향이 반공 반소로 비슷했던 헝가리 왕국 정도였다. 단 헝가리는 뮌헨 협정 이전까지는 폴란드와 직접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가 아니었다.

2.3. 인테르마리움(미엥지모제)

독립 전후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부르짖으며 지역 방위체제인 인테르마리움(Intermarium)[32]을 만들어 독일과 소련 사이에 낀 동부 중부유럽 국가들이 폴란드를 맹주로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33]

하지만 중부유럽 국가들은 권위주의 반공 우파 세력이 강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서로 사이가 나빴고, 러시아와 오헝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폴란드를 새로운 상전으로 모실 생각은 없었으므로 피우수트스키의 주장은 폴란드 밖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폴란드 국내에서도 피우수트스키의 경쟁자인 로만 드모프스키(Roman Stanisław Dmowski)는 소수민족들을 동화시키자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했으며, 폴리투 시절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았던 우크라이나계도 폴란드의 지배에 반발했다. 폴란드도 중부유럽 국가들을 꾸준히 설득하거나 강제로 복속시킬 만한 국력이 없었다.

폴란드와 인테르마리움의 가입국으로 고려된 인근 국가들 간의 관계를 반시계 방향으로 살펴보면, 핀란드는 일단 너무 멀어 서로를 돕기 힘들었다. 라트비아는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원조를 받긴 했으나 폴란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하진 않았다. 리투아니아는 친폴란드 정부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한 후 오히려 폴란드와 적대하게 되었다. 벨라루스는 애초에 너무 빨리 무너져서 동맹을 맺을 수도 없었다. 인테르마리움이 그나마 실현된 것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동맹인데, 이 동맹은 애초에 소련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관할 리 없었다는 점에서 실현성이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테셴 분쟁을 계기로 아예 적대국이 되었고,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폴란드와 친했지만[34] 정작 이 두 나라는 트란실바니아 문제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는 폴란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

피우수트스키 사후에는 유제프 베크(Józef Beck)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등 일부 정객들이 그의 구상을 규모만 줄여서 추진하려고 했다. 베크는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 삼국동맹을 주장했지만 헝가리가 독일에 붙는 바람에 실패했고,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망명정부에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유고슬라비아의 국가연합을 추진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둘 다 2차대전 기간에 사망하고 폴란드도 공산화되면서 인테르마리움 계획은 흐지부지된다.

2.4. 혼돈의 정국

한편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제한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헌법상에 명시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폴란드 초대 대통령 가브리엘 나루토비치가 대통령 취임 5일 만에 극우 민족주의자 엘리기우시 니에비아돔스키(Eligiusz Niewiadomski)에게 암살당했을 정도로 폴란드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참고로 나루토비치의 죽음은 그의 친구였던 피우수트스키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토지 개혁을 둘러싼 좌우파간의 대립, 우크라이나/독일계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등의 각종 문제로 인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는 출범과 동시에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큰 문제였는데, 이 시기 폴란드는 1차 대전으로 국토 대부분이 파괴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거대한 전쟁에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국가 재정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소파전쟁이 한창이던 1920년에 폴란드는 국가 예산의 60%를 군대에 쏟아 부었으며, 해외 폴란드 교포들의 재정 지원과 국채 발행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돈먹는 하마가 되어버린 소련과의 전쟁을 1921년 리가 조약을 통해 어찌저찌 끝낸 폴란드는 전시 경제로부터 탈피,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국토를 재건하는 일에 정력적으로 나섰지만 뒤이은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일시적으로 망했어요. 당시 독일과의 무역이 폴란드 국가 수입의 43%, 수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독일이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상부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주장하면서 석탄 수입을 금지시켜 버린 것.[35] 이로 인해 상부 실롱스크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일시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1926년 5월 12일 당대 폴란드의 실력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군부와 좌파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감행하여 다시금 권력을 손에 넣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대통령에 취임하는 대신 자신의 뜻을 따르던 화학자 출신의 정치인 이그나치 모시치츠키(Ignacy Mościcki)를 대통령에 앉혔지만 실권은 피우수트스키에게 있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1935년 사망할 때까지 군부 독재를 펼치면서 의회를 탄압하였다. 1929년에서 1930년 동안 그를 지지하는 출세 지향적인 군인들이 더욱 현저하게 행정기관에 침투하였다. 이들은 의회 정치를 경시하며, 폴란드 정부기관 및 대규모 국영기업체에 대거 임명되어 피우수트스키 개인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폴란드의 유사(類似) 민주주의는 피우수트스키가 죽기 직전인 1935년 4월, 소위 '4월 헌법'이 통과됨으로써 완전히 파괴되었다. 프랑스 헌법을 본따 1921년에 통과된 3월 헌법과 달리 4월 헌법은 비민주적 절차를 거쳐 통과되었으며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 강화시키는 헌법이었다.[36] 이로써 그나마 명목적으로 남아있던 민주적 정치체제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피우수트스키가 동년 5월 12일 사망한 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독재 정치를 지속하려고 노력했으나 독재의 구심점이었던 피우수트스키가 사라진 독재 정권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났다. 이런 정치적 혼란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2.5. 경제

폴란드 정부의 경제 정책은 1935년까지 기본적으로 보수적, 비개입적이었다. 비록 독일과의 무역전쟁으로 방해받긴 했지만 전후 경제호황과 각종 투자 및 개발사업을 통해 무역전쟁의 악영향을 제한할 수 있었고, 1924년에는 즈워티화를 도입하여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1920년부터 29년까지 폴란드의 1인당 GDP는 연평균 5.24% 성장을 기록했으며,[37] 1929년 1인당 GDP는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1929년 찾아온 대공황은 폴란드의 큰 시련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경제에 대한 개입을 자제하는 한편,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늦은 1935년까지 금본위제를 유지했는데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1인당 GDP의 누적 성장률은 오스트리아에 이어 2번째로 낮았다(-20.7%). 실업률은 43%에 이르렀다. 카르텔을 헹성한 기업들이 이익을 높이기 위해 일부 공장을 처분했으므로 실업률은 더 증가했다. 이미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던 폴란드의 농가들은 대공황까지 만나면서 도시와 같이 나락에 빠졌다.

폴란드의 경제는 1934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1933년 독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여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도 끝났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도 맺으며 독일과의 관계도 어느정도 개선되는 것처럼 보였다.[38] 이 시점부터 폴란드의 경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은 1935년부터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개입주의로 선회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1936년 재무장관 에우게니우시 크비아트코프스키(Eugeniusz Kwiatkowski)는 미국의 뉴딜 정책, 이웃한 나치 독일과 소련의 국가주도 경제성장에 영향을 받은 4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4개년 계획은 실업률 해결과 낙후 지역 개발, 대외충격 대비, 폴란드의 위상 제고를 목적으로 중앙공업지구(Centralny Okręg Przemysłowy, 이하 COP)를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다 쓸 수 없었기에 폴란드 정부는 국내의 자본을 축적하여 경제 개발을 진행했으며, 이는 당시 강화되던 폴란드의 국가주의적 기조와 맞물렸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이나 샤를 드골 치하의 프랑스와 유사한 정치·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정부는 은행 경영과 대외 교역, 카르텔에 대한 통제권을 가졌으며, 공공부문과 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폴란드의 공업화에 거액을 투자했다.

COP가 건설될 지역은 독일과 소련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폴란드 중남부 지역으로, 면적은 6만km², 주민은 600만 명에 달했다. 실업자는 40만에서 70만 명에 달했다. 1937-39년간 폴란드가 COP 건설에 투자한 액수는 19억 2,500만 즈워티, 당시 폴란드 총투자액의 60%에 달했다.[39]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군수업, 건설, 제철, 전기였다. 당시 개발된 가장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인 스탈로바 볼라에는 제철소와 군수공장이 건설되었고, 루블린에는 자동차 공장, 포롬프카 로즈누프, 미츠코프체에는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미엘레츠에는 PZL 비행기 공장, 제슈프에는 기계 부품 공장과 비행기 엔진 공장이 건설되었다. 모시치체에 있는 화학공장은 보다 더 큰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니에도미체에는 화약 생산을 위한 셀룰로오스 공장이 건설되었다. 독일-폴란드 남부 국경과 가까운 소폴란드(Małopolska) 지역에 위치하여 한동안 폴란드 입헌왕국의 공업을 주도하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 쇠락한 구(舊)폴란드공업지구(Staropolski Okręg Przemysłowy)에도 신설 공장이 들어서고 기존 공장들도 현대화되었다. 동시에 동서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40] 동부에 주요 철도노선 3개를 건설하는 등 인프라 확충에도 박차를 가했다.

4개년 계획은 예상년도보다 빠른 1939년 초에 종료되었으며, 공업화와 낙후지역 개발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1932년 당시 공업생산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을 100으로 하여 비교했을 때 1932년에 45.5에 불과했지만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에는 125.8로 다시 성장했다. 1인당 GDP도 1936-39년간 연평균성장률 11%를 기록, 1929년에 기록한 종전 최대치를 1938년에 경신했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폴란드 경제구조도 변모했다. 1929년 폴란드 GDP에서 제조업은 32%를 차지했지만, 1939년에는 50%를 차지했다. 하지만 폴란드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높은 실업률과 농촌의 인구과밀은 해결하지 못했다.[41] 1938년 말 크비아트코프스키는 도시화, 통신, 산업화, 농업, 교육 등 경제의 각 분야로 세분된 15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새로운 경제계획은 각각 3년간 진행되는 5개 단계로 구성되었으며, 최종시한은 1953년으로 잡혔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았는데, 군수산업 확충- 통신, 자동차 및 항공 산업 투자- 농업 현대화- 도시화 산업화 가속-폴란드 A와 B 간의 격차 감소였다. 그러나 15개년 계획은 막 시작할 즈음인 1939년 9월에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COP는 전쟁으로 초토화되었지만 전후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비록 폴란드 경제가 1936년부터 급격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1913-38년간 1인당 GDP 성장률을 고려하면 경제성장률 자체는 유럽 국가들 중에선 평범한 수준이었다. 특히 비교대상을 동유럽 국가들로 한정지으면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편이었다. 이는 폴란드가 1차대전 당시 유럽 국가들 중 피해를 가장 크게 본 축에 속하면서도,[42]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치른 그리스 러시아 내전으로 정신없던 소련 다음으로 전쟁을 늦게 끝냈기 때문이다. 또한 123년간 3개국에 분할점령되어 완전히 이질적으로 변한 각 지역을 통합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으며,[43] 도그마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대공황의 악영향을 다른 국가들보다 더 오랫동안 받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유럽 국가 중 상당수는 1932-33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성장세로 반전했으나 폴란드는 1936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른 분야에서도 상당한 진보를 이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21년 조사에서 33.1%에 이르던 문맹률은 1937년에 이르러 18%로 줄어들었으며, 폴란드 침공 직전에는 아동의 초등학교 재학률이 90%를 넘겼다.

2.6. 붕괴

1933년 집권한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놀랍게도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등 폴란드를 상대로 그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보다 훨씬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이 끝난 게 나치가 집권한 다음 해인 1934년. 하지만 독일은 여전히 폴란드를 상대로 을 갈고 있었으며,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잡아먹고 나자 뒤이어 폴란드 회랑에 대해 국경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서히 폴란드를 압박하다가 결국 1939년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을 감행했다. 이 때 나치 독일이 주장한 논리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한테 빌뉴스를 빼앗을 때, 체코슬로바키아한테 테셴 일부를 빼앗을 때와 똑같았다. 게다가 빌뉴스 주민의 50% 정도였던 폴란드와 달리 단치히 주민의 95%는 독일인이었다.[44]

여기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통해 밀약을 맺은 소련까지 폴란드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폴란드는 결국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전 국토가 침략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이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 때 서방 연합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주요 정치인, 군인들이 폴란드 제2공화국의 뒤를 이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독일과의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휘하에 자유 폴란드군도 창설되었으며, 이들은 제2공화국과는 달리 민주정을 지향했다.

3. 대외관계

폴란드 분할로 인한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삼강의 지배라는 뼈저린 경험 탓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정책은 가상적국이었던 독일국 소련을 견제하는 데 거의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하여 폴란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인근의 루마니아와도 군사 협정을 맺었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어마어마한 피해 및 대공황으로 인하여 독일을 견제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인접국 가운데 어느 정도 힘 있는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20년대 테셴 지역을 놓고 벌인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폴란드와 영 불편한 관계였다. 실제로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와 폴란드를 잇는 동맹관계는 있었어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잇는 동맹관계는 없었다. 즉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서로에게 '동맹'이 아닌 단지 '동맹의 동맹'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1938년까지 가장 사이가 안 좋은 나라였다.[45] 폴란드는 뮌헨 협정 당시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뜯어먹는 틈을 타 독일에 빌붙어 테셴 지역을 체코로부터 영토 반환 명분을 앞세워 뜯어내는 등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증오를 보였다. 그리고 소련을 견제할 동반자였던 루마니아는 빈약한 농업국인데다가 폴란드 이상으로 내부 분열이 심각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친독 성향으로 기울었기에 영 믿을 수 없는 동맹이었다.

물론 이때 당시 폴란드도 바보가 아니라서 루마니아 외에 불가리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헝가리 왕국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도 군사적 동맹을 체결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이 국가들 또한 루마니아 못지 않게 친독일, 친 추축국 성향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 독일에 의해 억지에 끌려가다시피 한데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일군을 공격하면서 나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추축국에 붙었다가 페타르 2세의 친연합 친위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독일 국방군에게 침공, 점령당했으며[46] 이후로는 빨치산 투쟁 등으로 저항하면서 줄곧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군과 싸웠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특유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가는 곳마다 독일군 못지 않은 학살을 벌였고 헝가리는 아예 추축국 준메이저였던지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 이들 나라가 폴란드와 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불가리아는 전간기 초, 중기 군사 편제와 정치, 사회의 모든 법적 기준 및 분야에서 폴란드의 원조, 자문을 받을 정도로 폴란드의 영향을 받은 시절이 있었고 헝가리의 경우는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인 우방이었던데다가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테셴, 토르스테냐, 야보리나, 루테니아,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 등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들을 사이좋게 뜯어먹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 같은 반공 극우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국가였기에 상당히 친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지역에서는 각종 전쟁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던 헝가리도 훗날 바르샤바 봉기 때만큼은 독일이 지원을 요청하자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하여 패전국 지위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폴란드 국경의 변경을 요구할 권리까지 암묵적으로 인정받았다. 거기다 라팔로 조약을 통하여 독일과 소련이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폴란드의 악몽은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가 되어 나치가 집권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독일은 노골적으로 폴란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이 전적으로 체결되면서 폴란드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와 영국이 있기는 했지만 폴란드 침공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말로만 도와주는 동맹국이었다. 결과를 놓고 보면 폴란드 침공 이전에 이미 폴란드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담이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한 국가였다. 물론 일부 국가들만 만주국을 승인했을 뿐, 국제적으로는 일본 제국 괴뢰국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본 제국과 폴란드 제2공화국은 매우 우호적인 사이였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병합하자 일본은 이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폴란드 멸망 후에도 폴란드 대사관을 유지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망명 정부가 형식상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묵인하는 등 폴란드 망명 정부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4. 민족

2차 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의 인구는 3510만 명이었다. 인구의 70%가 농촌에 거주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다민족 국가로, 최대 소수민족은 13.9%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이었고, 이들은 대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 외에 10%가 폴란드 유대인,[47] 3.1%가 벨라루스인, 2.3%가 독일인, 그 외에 체코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등이 거주했다. 당시에는 전세계 유대인의 1/5이 폴란드에 살았으며, 폴란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대인이 많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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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별 언어사용자 비중. 짙은 분홍색이 폴란드어 사용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인 동방영토(Kresy)에도 폴란드인 비중이 상당했고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빌노(현 리투아니아 빌뉴스)같은 지역에선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대부분이 추방당하고 만다. 이들은 주로 독일인들이 추방당한 구 독일령으로 이주했다.

5. 여담



[1] 체코슬로바키아가 톄센 지역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2] 독립 직후에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등의 완충국들이 존재했지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둘 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제압당하면서 몇년만에 멸망했다. [3] 독일과는 상 실레시아 분쟁, 체코슬로바키아와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쟁, 리투아니아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빌뉴스 위기, 그리고 소련과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과는 함께 존재했던 시간이 2개월 남짓밖에 안 되었다. [4] 피우수트스키는 처음에는 오헝 제국군 휘하의 폴란드 군단을 이끌고 러시아와 맞서 싸웠지만 동맹국이 폴란드를 독립시킬 의향이 없음을 알고 협력을 거부해서 마그데부르크 감옥에 투옥당했다. [5] 당시에 소련이라는 나라는 없었고,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6]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였고, 핀란드,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라트비아 제1공화국,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7] 하지만 이때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러시아 SFSR의 전면적인 침공을 당해서 서우크라이나에 뭘 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8] 여기서는 러시아 SFSR 및 그 괴뢰정권(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SSR 등)을 모두 합쳐서 부르는 명칭. [9] Allied Supreme Council. 최고전쟁위원회(Supreme War Council)라고도 한다. [10] 흔히 커즌 선이 이때 제시되었고 알려졌으나, 커즌 선은 1920년 7월에 제시된 것이다. [11] 당시 국명은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12] 당시 국명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13] 에스토니아는 1918년 11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12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에 침공을 당했다. [14] 벨로루시 SSR은 얼마 후 또다른 괴뢰정권인 리투아니아 SSR과 합병하여 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을 성립하지만 폴란드에게 패배하고 볼셰비키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다시 벨로루시 SSR로 환원되었다. [15]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각각 동년 1월 3일과 5일에 수도 리가 빌뉴스가 함락당하고 괴뢰정권들이 들어서며 국토 거의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등 멸망 직전까지 갔지만 라트비아는 독일, 폴란드, 에스토니아, 영국, 프랑스의 지원으로, 리투아니아는 독일과 폴란드의 지원으로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독일과 라트비아가 잠깐 싸우다가 협상국의 중재로 군대를 철수시키는가 하면 후술하듯 폴란드가 빌뉴스를 먹어치워버리는 일도 있었다. [16] 사실 괴뢰정권이라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이때 우크라이나 SSR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통제하는 쿠르스크에 위치했다(...). [17] 이 침공으로 인해 1919년 1월 1일만 해도 해안지대를 제외한 드네프르 강 서안 전역과 동안의 일부를 통치하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중서부-남서부 일대만 간신히 점유하는 빈사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3월에 반격작전을 펼쳐 우크라이나 우안(Right-Bank Ukraine) 일부 지역을 되찾는 저력을 보이고 8월 말에는 키예프까지 탈환했지만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데니킨 백군에게 키예프를 다시 빼앗기고, 그해 말에 찾아온 티푸스에 병력의 70-90%가 감염되면서 망했어요. 한편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은 10월 모스크바 남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오룔 툴라까지 다다르지만, 데니킨은 우크라이나도 공격한 양반이라서 결코 협력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곧바로 반격한 볼셰비키에게 우크라이나도 데니킨도 뼛속까지 탈탈 털리고 또다시 망했어요. 1920년 3월에 이르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카미아네츠포딜스키(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 인근만 간신히 통제할 정도로 세력권이 쪼그라들게 된다. [18]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대체적으로 폴란드와 볼셰비키 둘 다 부정적으로 보았다. 볼셰비키는 말할 것도 없는 침략자들이었고, 과거의 지배자들 주제에 같은 동맹자랍시고 손을 내미는 폴란드도 마뜩잖아 했다. 거기에다 동포 국가라고 볼 수 있는 서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 망해버렸으니 좋은 감정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19]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이후로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굵직한 전투마다 참여했지만, 종전시까지 병력이 2개 사단을 넘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20] 폴란드의 전쟁 목표는 동부 갈리치아를 지키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대(對)러시아 방벽이 되어줄 우크라이나의 독립이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커녕 우크라이나 서단부만 점령한 상태에서 둘 다 지친 나머지 전쟁이 끝나버렸다. [21]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1992년까지 활동하다가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에게 권한을 넘겨주고 해산했다. [22] 상부 실롱스크는 폴란드계가 절대다수였지만 동프로이센 남부는 독일계와 폴란드계가 박빙이었다. [23] 새로 그어진 분할선은 오늘날 아우구스투프 북쪽의 수바우키(Suwałki, 리투아니아어로 수발카이·Suvalkai), 세이니(Sejny), 푼스크(Puńsk) 일대를 폴란드령으로 했다.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인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오늘날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간 국경선으로 남아있으며, 일명 수바우키 틈새(Suwałki Gap)라고 불린다. [24] 하지만 이 인구조사는 꼼수가 활용됐다. 폴란드는 통계를 낼 때 폴란드인의 비중을 늘리기 위해서 폴란드어 사용자를 기준으로 했지만 이 중에는 언어는 폴란드어를 쓰지만 민족 정체성은 리투아니아인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피우수트스키와 같이 소수나마 폴란드-리투아니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양국에 존재했다. [25] 사실 이때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게 지나치게 밥맛으로 굴기도 했다. 리투아니아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중립을 선포했는데, 정작 볼셰비키가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데 리투아니아 도로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았고, 폴란드군 수천여 명을 무장해제하거나 리투아니아 국내에 억류하기도 했다. 여기에 수바우키를 둘러싸고 전투까지 벌어지자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정부를 아예 볼셰비키의 도구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26] 체코어로 테신, 폴란드어로 치에신. [27] 17세기 각 교구별 언어사용, 1804년 및 1855년 언어지도와 1880년대 이래 인구조사 참고. [28] 당시 분할선에 따르면 프리데크 구와 북부의 일부 월경지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폴란드측 영역이 되었다. [29]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동서로 잇던 철도 2개 중 하나인 코시체(Košice)-보후민(Bohumín) 철도가 여기를 지나갔다. [30] 거기에다가 폴란드측 요구에 따라 민족분포를 경계선 삼으면 서쪽의 주데텐란트가 떨어져나갈 판이니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를 악물고 차지하려 했다. [31] 정확히 말하면 프라이슈타트(Freistadt) 구와 테셴(Teschen) 구 대부분이 새로 체코슬로바키아령이 되었다. [32] 폴란드어로 미엥지모제(Międzymorze). [33] 아이디어 자체는 19세기 폴란드 망명 정객인 아담 차르토리스키(Adam Jerzy Czartoryski)가 냈다. [34] 특히 루마니아는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했다. [35] 이 요구는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도 같았다. 독일은 최소한 단치히 및 독일계 우세했던 구 프로이센 지역을 폴란드에게 요구했는데, 특히 단치히는 독일계가 90%가 넘어서 폴란드가 즐겨 주장했던 민족자결주의에 의하면 독일에 편입되는게 타당했지만 과거 폴란드령이었던데다가 폴란드의 주요항구였기 때문에 폴란드의 간섭을 받는 자유시로 남았고 자유선거가 치뤄진 이후로 단치히는 계속 독일계 정당이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36] 이 헌법을 피우수트스키의 이름을 본따 피우수트스키 헌법이라고 부른다. 헌법학자 카를 뢰벤슈타인은 이를 학술적으로 신대통령제 헌법으로 분류하였다. [37] Stephen Broadberry, Kevin H. O'Rourke.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Volume 2, 1870 to the Pres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p. 188, 190. [38] 뒤돌아보면 엄청난 아이러니지만 집권 초기엔 단치히보다 라인란트, 주데텐란트, 오스트리아 등에 더 집중했던 히틀러는 대폴란드 관계에 있어선 원래부터 불편한 관계였고 직접적인 이권이 걸려있던 융커 프로이센 군부에 비해 확실히 유화적이었다. 물론 히틀러는 이러한 정책들을 펼치면서도 내부에서는 공공연하게 인종주의 운운하며 폴란드를 비난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히틀러 특유의 비일관성은 여전한지라 폴란드인들은 열등민족 주제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우리나라 우리땅 강도질했다 거품 열면서도 피우스트스키 상대로는 강력한 구국의 지도자라며 나름 개인적으로 호감과 존경심을 표했다. [39] 당초 예상 투자액은 30억 즈워티였으나 조만간 크게 터질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민간 투자를 기대했던 해외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재원을 정부 재정에서 충당했다. [40] 전간기 폴란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동서간 격차였다. 비스와 강을 경계로 하여 바르샤바, 우치, 카토비체, 포즈난 등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개발된 서부는 폴란드 A로, 루블린, 빌노, 르부프, 브제시치 등 가난하고 덜 개발된 동부는 폴란드 B로 불렸다. 이들 지역들간 격차의 예시로, 1921년 구 독일령은 문맹률이 4-5%였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인 크레시(Kresy)는 문맹률이 64.7%에 달했다. 민족구성을 따져도 서부는 폴란드계가 절대다수인 반면에 동부는 우크라이나계, 유대계, 벨라루스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두 지역 간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폴란드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41] 제2공화국 초기 노동력에서 농업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말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63.9%→59.0%. [42] 1차대전 동부전선은 1914년 7월 개전시부터 종전 직전인 1918년 초까지 훗날 폴란드 제2공화국령이 될 지역에 항상 걸쳐 형성되었다. 당연히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전선이 이동하면 해당 지역은 초토화 직행+전투에 동원된 폴란드인 장병들의 떼죽음으로 이어졌고, 폴란드인 사망자만 200만으로 추산된다. 그 중 군인 사망자는 무려 40만 명이다. [43] 철도 궤간만 해도 폴란드를 분할한 3개국이 서로 달랐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간 직행 철도노선은 1934년에 깔렸다. 또한 즈워티화가 도입되기 전까지 폴란드에서는 무려 6개 통화가 유통되었다. [44] 하지만 빌뉴스 점령은 신생 독립국간의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고 전후 혼란으로 국경선이 유동적으로 변하던 와중에 발생한 일이었던데 반해, 나치의 단치히 요구는 이미 국경선이 확정된 지 20년이 다되어가던 시점의 일이었다. 단치히 자유시는 폴란드의 영토가 아닌, 이미 독일과 폴란드 간의 타협을 거쳐 폴란드령도 독일령도 아닌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도시국가였으므로 폴란드가 통짜 자국령으로 취급한 빌뉴스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전간기 내내 단치히는 폴란드가 통치는 커녕 제대로 손도 못 대는 지역이었다. 폴란드에게 자기네 영토를 반환하라는데, 폴란드의 영토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고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탄압하고 린치하는 일이 일어날리가 없다(...). 물론 폴란드가 빌뉴스를 빼앗은게 잘한 짓은 결코 아니다 어쨌거나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단치히 자유시 시민들 절대다수는 독일군이 침공해오자 적극적으로 독일 측에 협조했다. [45] 폴란드는 32년에 소련과, 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관계를 개선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끝까지 적대했다. [46] 다만 페타르 2세도 추축국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47] 당시 폴란드 영내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총 300만명으로 이 수치는 당시 유럽 대륙에 거주하던 유대인 950만명 중에서 무려 32%나 차지했다. [48] 정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영토를 독일에 반환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옛 동프로이센 남부와 포메른, 슐레지엔은 '정당한 전후 처리에 따라 받은' 땅이지만, 소련이 뺏어간 동부 크레시 일대는 '제국주의자들의 야합에 의한 강탈'이라는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49] 다만 독일과도 무조건 협력하는 것은 아니어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폴란드가 반대하고 폴란드 언론들이 종종 독일 정치권을 비판하는 등 갈등이 약간 남아 있다. [50] 제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하더라도 르부프나 빌노나 폴란드인이 다수였지만, 시외는 리투아니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 같은 비폴란드계 인구도 많았고 또한 시가지 중심부 인구로만 따져도 현대 인근 민족 국가 아무에도 속하지 않은 유대인의 숫자가 폴란드인과 맞먹을 만큼 굉장히 많았다.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따져도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빌뉴스는 명백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형성 이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 수도였고, 르비우 또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지이자 중세 폴란드 왕국 편입 이전에는 루스인들의 도시였다. 반면 크라쿠프, 바르샤바는 명실상부한 역사적 폴란드 전근대 국가들의 수도였으니 흔하디 흔한 전근대사를 근대 민족주의적 의미로 해석하기 작전으로 이웃 민족들이 클레임 걸 건덕지가 전혀 없었고, 포즈난 또한 동서프로이센과 오버슐레지엔에 대해선 정파불문하고 모두 징징거렸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딱히 이 일대에 대한 주장은 안 했을 만큼 독일 제국 시절에도 구성 인구나 문화적 영향력이나 비폴란드계 민족의 영향력이 적었다. 더군다나 구 독일령도 독일인들이 소개되고 폴란드인들이 이주하며 폴란드계가 압도적 주류인 지역으로 변모했고 역사적으로도 중세 피아스트 왕조의 영토였다는 클레임이 있다. [51] 현재 우크라이나 르비우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테르노필주. [52]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 네덜란드는 1919년, 튀르키예는 1928년, 러시아(이후 소련으로 바뀜)는 1917년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53] 소련에서 원래 낙태는 전적으로 여성의 자유였지만, 1936년 여성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에만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54] 출처: 영어 위키백과, 폴란드에서의 낙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