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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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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에우게니우시 시코르스키
Władysław Eugeniusz Sikorski
파일: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jpg
출생 1881년 5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투슈프-나르도비[1]
사망 1943년 7월 20일 (향년 62세)
영국 지브롤터
국적
학력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중장
경력 초대 자유 폴란드군 총감
1939년 11월 7일 ~ 1943년 7월 4일
폴란드 총리
1939년 9월 30일 ~ 1943년 7월 4일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서명
파일: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미디어에서의 등장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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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인.

2. 생애

1881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이던 투슈프 나르도비(Tuszów Narodowy)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시코르스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1년간 자원복무하고 오스트리아 군사학교를 졸업하여 예비역 소위의 자격을 얻었다. 대학 시절 폴란드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에 결성된 폴란드 청소년 협회에 참여하였고 이어 폴란드 사회당[2]의 준군사조직에까지 참여하였다. 군사학교를 졸업한 경력을 바탕으로 조직 내에서 작전 및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2.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폴란드의 여러 준군사조직들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산하의 폴란드 군단으로 소집되었다. 하지만 시코르스키는 예비역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였기 때문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였던 피우수트스키의 노선과는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다.

결국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괴뢰 폴란드 왕국을 수립하면서 이에 반발한 폴란드 군단은 해체,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구금되었고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왕국의 폴란드 국방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년도 가지 않아서 동맹국이 몰락하여 폴란드 왕국이 해체되고 시코르스키는 피우수트스키와 다시 협력하여 폴란드 군단으로 복귀하였다.

2.2. 전간기

2.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을 맞이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여전히 영토와 관련된 분쟁이 남아 있었다. 임시국가원수가 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영토 분쟁에 대한 노선은 비교적 넓은 범위를 수복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고,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을 겪는 와중 러시아 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기 위해 동유럽의 신생국들을 침공했다. 결국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시코르스키는 1919년 전쟁 초기에는 그루데크야기엘론스키 지방[3]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2개월 뒤 제9보병사단을 이끌고 즈브루치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1920년 4월에는 체르노빌 지역의 드네프르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키예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의 전공으로 시코르스키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시점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절반 가량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폴란드와의 전쟁을 낙관하던 러시아는 1920년 7월부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폴란드군을 격퇴하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하였다. 재정비를 마친 폴란드 사령부는 시코르스키에게 새로 편성한 5군의 지휘권을 맡겼으며 바르샤바 전투에서 5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 예하 3개 야전군이 자기 담당 구역으로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 북부의 비스와강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전을 펼치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벌였다. 이 전선 덕분에 폴란드군은 다시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서부전선군이 패퇴하게 되면서 전황은 폴란드에게 다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후 폴란드군은 라트비아, 벨라루스까지 진격하였고 시코르스키의 5군은 리투아니아 네만강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공으로 시코르스키는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결국 1921년 리가 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의 승리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끝난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 시코르스키는 의견 대립이 있었던 사이지만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의해서 폴란드군 참모총장과 전쟁부 장관으로 추천받아 제2공화국 정부 각료로써 행보를 이어나간다.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나루토비치가 암살되면서 1922년부터 192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수상직을 수행하였으며 잠시 재무부 장관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수상에서 물러난 뒤 국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군대의 기계화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대리인 격이었던 나루토비치 대통령이 암살당한 여파로 1926년 5월에 피우수트스키에 의해서 친위 쿠데타가 발발하자 시코르스키는 여기에 반발하였고 쿠데타 세력에 의해서 직위해제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가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사망하고 난 뒤에야 다시 폴란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복귀한 이후에도 폴란드군 총감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원수[4]에 의해서 지휘권이 박탈된 채로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일어나고 약 한 달만에 폴란드가 함락되자,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루마니아 왕국 쪽으로 퇴각하면서 폴란드 지하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으나 전쟁 패전의 책임 등의 이유로 결성된 자유 폴란드 군단의 지휘권은 시코르스키에게 점차 넘어가게 되었다.[5]

2.3.1. 폴란드 망명정부

폴란드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꼭두각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던 상원 의장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Władysław Raczkiewicz)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프랑스에서 폴란드 망명정부가 출범했다.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초대 총리로 추대되었고 자유 폴란드군의 총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끝내고 곧바로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폴란드에서 탈출한 병력들을 규합하여 약 10만여명의 자유 폴란드군도 프랑스군에 편제되어 독일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폴란드처럼 프랑스도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폴란드 망명정부는 자유 프랑스 진영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독일이 얼마가지 않아서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시코르스키는 소련과 수교하여 옛 전쟁포로들을 돌려받아 병력을 충원하고자 하였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서 주변 국가들과 협약을 맺어가던 시점이었기도 하며 영국의 추천에 의해서 시코르스키는 영국의 소련 대사 이반 미하일로비치 마이스키(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Ма́йский)와 만나 망명정부를 폴란드 공화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식 정부로 인정받고 수교 및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시코르스키-마이스키 조약으로 소련은 기존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폴란드 분할을 파기하였고 수만명의 폴란드인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이때 석방된 병력들은 크게 "폴란드 동부군"과 "폴란드 서부군"으로 나뉘게 된다. 석방된 폴란드인 포로를 바탕으로 소련군 아래에 있었던 폴란드 군이 바로 폴란드 동부군이며, 동부군은 전후에 폴란드 임시정부의 군대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Władysław Anders) 장군이 이끌었던 폴란드 서부군은[6] 석방되었긴 하지만 소련에 대한 적개심 등의 이유로 이란과 팔레스타인을 통해 유럽 남부로 도피하였고 나중에 자유 폴란드군 제2군단으로 재편성되어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당시 자유 폴란드군에 기존의 장교들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에 포로로 붙잡혀 간 고위 장교진들이 절실한 상태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석방된 포로들 중에는 장교들이 없었거니와 소련은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애매한 상태로 일단의 조약은 끝이 났다.

특히나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제2공화국 말기의 피우수트스키파 세력을 배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이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와 사실상 유사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망명정부 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이 시코르스키-마이스키 조약으로 인해서 망명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와도 더욱 갈등이 심화되었다. 한편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유고슬라비아의 국가연합안을 주장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해서 실패했다.[7]

독소전쟁이 한참이었던 1943년,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한 독일에 의해서 소련이 폴란드 고위장교가 다수 포함된 포로들을 학살했던 카틴 학살의 현장이 공개되었다. 이에 폴란드 망명정부는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서 카틴 학살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지만, 전황이 소련에 불리하였기 때문에 영국은 소련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고 결국 묵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자세를 취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에 항의하였으나 소련은 단교로 화답해왔다.

2.3.2. 사망

카틴 학살에 대한 항의가 있고난 3개월 이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항공사고로 사망하였다. 시코르스키가 프랑스, 영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폴란드 망명 정부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으며 카틴 학살에 대한 항의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사망 당시에도 소련에 의해서 시코르스키가 탑승한 항공기가 격추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었다. 하지만 시신을 회수한 이후 조사해 본 결과 소련군 및 기총 소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시코르스키가 생존하였더라도 폴란드 망명 정부의 평가가 어떻게 변모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시코르스키 사후에 폴란드 망명정부는 영국에서 점차 계륵같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8] 2차대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전후 폴란드를 재건할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권위주의적 성향의 독재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던 피우수트스키와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망명 정부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있기도 하다.

3. 미디어에서의 등장

Hearts of Iron IV에서 폴란드의 군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시코르스키는 실제로는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는 지휘권이 없었던 상태였었음에도 멀쩡히 등장하고 있으며 최종계급은 중장이었음에도 원수로 설정되어 있다. 사나치아 루트를 탈 시 망명정부가 수립되면 지도자가 된다.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갈리치아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0.23 패치 이전까지는 폴란드가 합스부르크 왕을 선출하면 갈리치아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4. 관련 문서



[1] 현 폴란드 포드카르파츠키에주 투슈프-나르도비 [2] PPS. 초기에는 좌파적 성격이 짙었으나 나중에 폴란드 사회당은 좌우로 분열되어 사회주의 진영이 폴란드 사회당을 떠났고 민족주의 계열이 폴란드 사회당에 계속 남아 있게 되면서 이름과는 달리 우파 정당이 되었다. [3] Gródek-Jagiellonski. 지금의 우크라이나 르비우주의 호로도크 [4] 사나치아(Sanacja, 피우수트스키의 지지세력)에 속한 인물로서 쿠데타에도 가담하였다. 피우수트스키 사후에도 반 쿠데타의 포지션에 있었던 인물들은 사나치아에 의해서 정부에 복귀하는 것이 저지되었으며, 시코르스키도 그렇게 저지당한 인물 중 하나였다. [5] 결국 지휘권을 잃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1941년 바르샤바로 돌아갔으며 그 해에 심부전증으로 사망한다. [6] 안데르스 군대라고도 불렸다. 자유 폴란드군의 유명한 군견말고 군웅(軍熊)이었던 보이텍이 폴란드 서부군에 있었다. [7] 훗날 세워진 비셰그라드 그룹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8] 종전 이후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인식과 평판의 변화는 폴란드 망명 정부, 자유 폴란드군 문서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