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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01:03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1. 개요2. 상세
2.1. 독일계 주민의 추방과 도주2.2. 비독일계 주민의 추방
3. 참고4.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 추방.jpg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권에서 일어난 독일인의 해외 추방 및 도주에 관해 설명하는 문서. 조심스러운 주제이긴 하지만 엄연히 독일계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해외 추방이며, 그 숫자는 1,200만명이 넘는다.

독일인이 아니더라도 나치 독일과 협력했거나 전후 들어선 동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일인이 아니더라도 독일인들과 함께 독일로 추방된 사람도 많다.

2. 상세

2.1. 독일계 주민의 추방과 도주

[navertv(43996295)]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0부 - 난민 · 희망을 향한 여로中[1][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동유럽에 이주한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군의 패주와 함께 도망쳤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주민들이 도주하거나 각국의 강제 추방을 당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독일인들을 쫓아낸 이유는 전간기 및 2차대전 당시 동유럽 내 독일인들이 나치 독일의 확장 행보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현지 독일인들이 나치 독일 주데텐란트 확장 야욕에 자극받아 반체코슬로바키아 운동을 벌인 바 있고 이것이 뮌헨 협정으로 이어져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 치하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단치히에서도 1939년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95%의 독일계 주민들이 나치 독일 측에 가담하여 전쟁을 벌였다. 따라서 독일과 국경을 맞댄 동유럽 국가들은 독일인들을 잠재적 매국노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것이 전후 독일계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소련 스탈린 입장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동유럽에서 독일계를 추방하면 훗날 다시 독일이 보복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기기 때문에 동유럽 국가들이 더욱 소련에 의존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또한 보복을 당할까봐 후퇴하는 독일군과 함께하거나, 아니면 이미 독일군으로 징집되었고, 빈자리는 현지인들이 채웠다.

이렇게 하여 총합 최소 1,200만 명 이상의 독일계 주민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도주하거나 강제 추방당했다. 독일 정부에 따르면 대략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구 바이마르 공화국 영토에서 950만, 단치히 자유시에서 38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350만, 구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에서 120만, 기타 국가( 발트 3국,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소련)에서 200만 등 종합 1,200만~1,6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 중 대략 20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다만 사망자 수와 관련해 독일 정부가 주장한 수치는 독일의 역사학자와 학술기관들에게 독일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목적으로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는 50~60만 정도로 추정된다.[3] 독일인이 사회 깊숙히 침투한 동유럽인 만큼 독일인들도 슬라브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2차 대전 후 현지인에 동화되거나 신생 공산정권에 충성하거나 현지인 행세를 하면서 잔류한 독일인, 그리고 서독행만큼은 아니지만 동독행을 택한 독일인도 꽤 있었는데[4] 독일 정부의 연구는 이들을 무시하고 전부 사망자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루마니아는 추방 조치를 취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자국에 독일계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루마니아에서 독일인들은 그냥 옛날부터 살던 땅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증오가 딱히 없었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국경분쟁의 소지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추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가 전환되고 해외로 이주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독일계 주민들도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잘사는 독일 본토로 이주하여[5] 1930년 745,421명, 1977년 359,109명, 2011년 36,042명으로 독일계 인구가 크게 줄었다.[6]

추방의 주된 원인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불법 침략 및 전쟁범죄이므로 현재의 독일은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방이 정당했다고 인정하진 않는다. 현대 독일도 독일인을 추방한 당사국이 이를 정당화하면 반발한다. 사례 실향민들의 현지 정부에 대한 소송도 굳이 막으려 들지 않는다. Bund der Vertriebenen 같은 추방된 독일인이 세운 단체 등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어간다.

독일인들을 쫓아낸 당사국에서도 전쟁이 끝나고 반독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에는 모두 일치단결해 추방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추방 및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 침해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례로 2015년에 체코 브르노 시의회는 전후 독일인 추방을 반성한다는 결의를 낸 바 있다. 기사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800년 동안 이어진 독일계의 동방식민운동의 결과물을 한 방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엘베 강 동쪽 동유럽에서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독일계가 사라졌다. 물론 해당 지역이 전통적으로 독일계와 현지 토착민의 혼혈이 잦았던 만큼 혈통적으로 독일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7] 그나마 남아 있던 독일계 주민들도 현지 토착 문화에 거의 동화되었기 때문에 동유럽 각지에 걸쳐 잔존하던 독일어 화자 및 독일인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독일인 추방 정책은 서독의 재건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8]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손실을 겪었음에도 해외 독일인들의 독일 본토 재이주로 오히려 서독의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략폭격 자체가 정확하지 않아 독일의 민간 공업 시설이 상당부분 살아남기도 했지만 전쟁통에 죽거나 실종된 독일군이 굉장히 많았는데[9]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하여 부족한 청년 인적자원을 빠르게 복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동서독으로 분단된 뒤 미국과 소련이 모두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된 동서독을 재건하기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동서독은 금방 국토 재건에 성공하였고 특히 현재의 통일 독일로 이어지는 서독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시 강대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2.2. 비독일계 주민의 추방

새로운 국경선이 그어진 후 강제로 추방당한 사람들 중에는 독일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동프로이센 남부의 마주리아 지역에 거주하던 마주리아인들은 종족적으로 폴란드인에 훨씬 가까웠지만[10] 다른 폴란드인들과 다르게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믿는다는 등의 이유로 독일인들과 함께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으로 일부가 추방되거나 소련군을 피해 피난을 떠났고[11][12] 포메른 서부의 슬라브계 민족인 스워빈인들도[13] 상당수가 함께 추방되었다.[14][15] 이외에도 현 폴란드 남서부 지역의 소수의 슬라브계 민족인 소르브인이나[16] 그 외에도 크워즈코 지역에 거주하던 체코계 주민들과 소련에 편입된 동프로이센 지역( 칼리닌그라드)에 살고있던 리투아니아계 개신교 신도들 쿠로니아 모래톱 지역의 쿠로니아인[17]들도 독일인들과 함께 추방되었다.[18] 또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 여성과 독일인 남성이 결혼했을 경우 체코인 여성까지 둘 다 추방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는 나치에 협력했거나 협조했다고 의심된 폴란드인들은 반역자로 간주돼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뒤 추방되었다.[19]

이처럼 전후 독일인의 추방 과정에서 많은 슬라브인, 폴란드인, 발트인들이 독일화되었다는 이유로 도매금으로 묶여 함께 쫓겨나는 경우가 존재했으며 심지어 슐레지엔 지역에서는 원래 슐레지엔에 살다가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해 돌아온 독일계 유대인들이 폴란드 공산 정부에 의해 독일로 추방당했다.[20] 이외에도 옛 독일령 지역에 거주하던 수많은 폴란드, 슬라브계 주민들이 전후에 스탈린 체제가 종식되고 냉전 체제가 완화됨에 따라 서독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상부 슐레지엔 지역에 거주하는 실레시아인 중 상당수, 동프로이센 남부 바르미아 지역의 바르미아인들 중 상당수, 동프로이센 남부 마주리아 지역의 마주리아인의 대부분, 포메른 지역의 스워빈인의 전부 등의 사람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전후에 공산국가인 폴란드에 남아 있기보다는 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서독으로 이주하기를 택한 케이스였다. 서독 정부가 기본법에 따라 1937년 이전 독일 영토에 살았던 주민들은 서독으로 돌아와 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허용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주가 가능했다. # #

3. 참고

4. 관련 문서


[1] 2018년 8월 11일 방영. 50:11쯤에 연합국 사람들에 의해 독일인 난민들이 패전 후 독일로 귀국하다가 피해를 받거나 사망한 사례들이 일부 나온다. [2] 영상 매체의 탄생 이후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기록된 "난민"을 주제로 세계 각국의 영상 기록 보관소에서 수집한 영상으로 편집한 다큐다. [3] 뤼디거 오베르만스, 잉고 하르, 한스 헤닝 한, 독일 역사 박물관(DHM) 등의 주장. [4] 전체 인구 대비 난민 비율은 서독보다 오히려 동독 쪽이 더 높았는데, 분단 직후 서독의 인구 약 5000만 명 중 1/6이 실향민이었던 반면 동독은 인구 약 1800만 명 중 1/4이 실향민이었다. [5] 물론 비단 독일계 주민만 특별히 루마니아로 빠져나간 것은 아니고 루마니아인이나 집시, 헝가리인들도 서유럽, 북유럽, 남유럽 국가로 많이 빠져나갔다. 이렇게 빠져나간 인구를 다 합치면 수백만에 이르는 데다 출산율이 높은 것도 아닌지라 루마니아는 인구감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6] 2차 대전 말 철수하던 독일군을 따라 이주한 사람이 많아서 전후 독일인 인구가 반토막났지만 소련(새로 할양받은 동프로이센 북부 영토 한정),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추방령은 내려지지 않아서 나머지 절반은 1980년대까지도 계속 남아 있었다. [7] 폴란드에서는 독일계이기는 하되 폴란드인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잔류가 허용되었다. 그리고 현지 토착민들의 언어를 잘 구사하던 독일인들은 현지 토착민으로 위장하여 살아가기도 했다. [8] 추방된 사람들 대부분이 동독보단 서독으로 떠났다. [9]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군 사망자는 400~500만 명에 달하며 여기에 민간인까지 더하면 최대 7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사망자 대다수가 군인이니 청년층 사망자 비율이 매우 높았다. [10] 이들이 사용하는 마주리아어는 중세 폴란드어와 매우 유사했다. [11] 이들 중 고향에 남은 이들도 1950년대부터 냉전 체제가 완화되자 거의 대부분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12] https://en.wikipedia.org/wiki/Masurians [13] 카슈브인 중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 [14] 이들 중 남은 이들도 1950년대에 서독으로 이주했다. [15] https://en.wikipedia.org/wiki/Slovincian_language [16] https://en.wikipedia.org/wiki/Lusatia [17] 중세 라트비아를 구성하던 부족의 일파로, 임마누엘 칸트가 쿠로니아 혈통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 https://en.wikipedia.org/wiki/Flight_and_expulsion_of_Germans_from_Poland_during_and_after_World_War_II [19] https://en.wikipedia.org/wiki/Flight_and_expulsion_of_Germans_(1944–1950) [20] https://en.wikipedia.org/wiki/Sile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