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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류 러시아인(残留ロシア人)[1]은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일본에 할양된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에 그대로 잔류하고 있던 당시 러시아 국민 중 원주민[2]을 제외한 주민을 가리킨다. '잔류노인'(残留露人)[3]이라고도 불렀다.2. 역사
일본군은 1905년 7월에 러일전쟁에서의 사할린 전투에서 사할린 전역을 점령했다. 1905년 11월에 발효된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남사할린이 일본에 할양되었다. 이전까지 남사할린에 살던 러시아 국민은 그대로 잔류할지, 북사할린이나 러시아 본토로 이주할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대부분의 주민은 이주를 택했지만 200명 남짓한 소수는 잔류를 택했다. 이것이 잔류 러시아인의 기원이다.잔류 러시아인들은 재산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일본령이 된 가라후토에서도 예전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직접 만든 빵을 구워 러시아 빵이라는 이름으로 역 앞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이 러시아 빵은 당시 가라후토의 기념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 빵의 판매 소리는 가라후토의 풍물시였다.
잔류 러시아인들은 대개 일본인 사회에 동화되었다. 자제를 일본인 학교에 보냈기 때문에,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잔류 러시아인은 일본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업이나 상점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 수립되자, 적백내전 때 백군을 지지했던 백계 러시아인 중에서 일부가 일제 치하의 남사할린로 망명해 정착하기도 했다.[4] 1905년부터 남사할린에 정착하는 잔류 러시아인과 1917년 이후 망명해 남사할린에 정착하게 된 백계 러시아인은 대부분 일본인들로부터 같은 러시아인으로 인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이르러 전황이 악화되자 미나미가라후토에 정착해 있던 러시아인의 상당수는 일본 정부로부터 적성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감시 구류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의 소련의 만주 작전과 함께 소련군이 남사할린을 차지하고 소련이 남사할린을 실효 지배했을 때 잔류 러시아인의 상당수는 공산화에 의해 지금까지의 재산을 잃었고, 그 중에는 정치범으로 처벌되는 사람도 있었다. 소련의 치세에 들어간 이후에도 잔류 러시아인은 무국적으로 취급돼 1950년대까지 소련 국적 취득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초는 남사할린에 4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있었다. 러시아어와 일본어가 가능한 잔류 러시아인 중에서는 통역으로 수입을 얻는 사람도 있었다. 1948년까지 일본인이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고 러시아화가 진행되어 러시아인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남사할린에 살고 있던 러시아인은 소련 영내(러시아 본토나 우크라이나, 북사할린 등)로부터 대량으로 이주해 온 이주민과 거의 동화되었다. 일제 치하 사할린에서 일본 사회 속에서 지내면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러시아인이 러시아에 있었지만, 21세기에는 자연사로 소멸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