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제2공화국 총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34234, #e34234 20%, #e34234 80%, #e34234);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이그나치 다신스키 | 옐드르제이 모라체프스키 |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 레오폴드 스컬스키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빈첸티 비토스 | 브와디스와프 그라브스키 | 안토니 포니코프스키 | 아르투르 실리빈스키 | |
<rowcolor=#fff> 제9대 | 제10대 | 제6대2 | 제5대2 | |
율리안 노바크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 빈첸티 비토스 | 브와디스와프 그라브스키 | |
<rowcolor=#fff> 제11대 | 제6대3 | 제12대 | 제13대 | |
알렉산데르 스크르진스키 | 빈첸티 비토스 | 카지미에시 바르텔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
<rowcolor=#fff> 제12대2 | 제14대 | 제12대3 | 제15대 | |
카지미에시 바르텔 | 카지미에시 시비탈스키 | 카지미에시 바르텔 | 발레리 스와베크 | |
<rowcolor=#fff> 제13대2 | 제15대2 | 제16대 | 제17대 |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발레리 스와베크 | 알렉산데르 프리스트로 | 야누시 예드르제예비치 | |
<rowcolor=#fff> 제18대 | 제15대3 | 제19대 | 제20대 | |
레온 코즈워프스키 | 발레리 스와베크 | 마리안 진드람코시치아우코프스키 | 펠리챤 스와보이 스크와드코프스키 |
}}} }}}}}} |
브와디스와프 도미니크 그랍스키
Władysław Dominik Grabski
1874.7.7. ~ 1938.3.1.
[clearfix]
1. 개요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인, 역사가, 경제학자였으며 2번의 총리를 역임했다. 당적은 민족민주주의당(Narodowa Demokracja, 통칭 엔데치아(Endecja))이었다.2. 생애
2.1. 초기 생애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는 1874년 러시아령 폴란드 워비치 근교의 마을 보로프에서 태어났다.성장한 후 프랑스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는데, 파리 정치대학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소르본 대학교에서 역사를 배웠다. 원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그랍스키는 프랑스에서 점점 우경화되었다.
1905년 폴란드로 돌아온 그랍스키는 워비치에 농업 협회를 설립하였으며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노동조합의 창설로 이어졌다. 당연히 러시아 제국 당국은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감옥에 수감했지만 그는 1년도 안돼 석방되었다. 이후 10월 테제로 두마가 설립되자 그랍스키는 민족민주당의 대표로 3번이나 선출되었다. 그랍스키는 러시아 농업부와 함께 예산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1912년까지 두마 의원으로 재직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러시아 내 폴란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앙시민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2.2. 폴란드 독립 후
1919년 폴란드가 독립하자 그랍스키는 농업부 장관으로 입각했다.이후 1920년 6월 27일 총리 겸 재무장관이 되었지만 1차 그랍스키 내각은 1920년 7월 24일 단 1달만에 종결되었다.
1923년 12월 19일 다시 총리가 된 그랍스키는 또 한번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폴란드의 암울한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 1924년 1월 11일에 국가 재무 개선 및 통화 개혁에 관한 법률을 통해 중앙은행인 폴란드 은행을 설립했으며[1] 폴란드 마르카를 대체하는 금즈워티를 발행했다. 폴란드의 중앙은행은 합자회사로 설립되어 독립성을 보장받았으며, 중앙은행을 대체하던 폴란드 국민저축연합의 폐지에 공헌했다. 1월 14일에는 폴란드 은행 조직위원회가 설립되고 같은 해 26일에는 주식 거래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첫 주주총회에서는 폴란드 은행 합자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랍스키는 또한 주립 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국민 경제 은행을 설립했다. 또한 산업 생산량과 수출에 있어서도 광범위한 변화를 주도했다. 이 개혁의 효과로 직접세가 증가하는 등 조세 정책에 변화가 있었으며, 정부가 기업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과세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국경수비대를 창설했다.
1924년 말까지 그랍스키 내각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국제적으로는 비효율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받았는데, 특히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1차 그랍스키 내각은 국제연맹의 행동력 부족을 비판하지 못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인민당의 빈첸티 비토스는 그랍스키 내각의 농업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국민들에게 국가의 재정 상황을 알리지 못하고 있으며 금융 개혁에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그랍스키의 개혁은 성공적이었지만 1925년 그랍스키는 자신이 개혁에 너무 낙관적이었으며, 폴란드 경제의 완전한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고 시인했다. 폴란드 은행은 점점 늘어나는 국가부채와 상업 적자에 허덕였으며, 폴란드 정부의 투자는 번번히 악수만 두었다. 급기야 1925년 세임은 내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높은 예산을 승인했다. 결국 1925년 7월 29일 즈워티의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1925년 1월 독일이 폴란드에게서 서프로이센, 단치히, 상부 슐레지엔을 빼앗기 위해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킨 시기도 2차 그랍스키 내각 시기였다. 또한 2차 그랍스키 내각 시기 폴란드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많은 수의 폴란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그랍스키의 알리야(Aliyah[2])라고 부르며, 그가 엔데치아의 당원이었기에 반유대주의적 과세 정책을 펼쳤다고 평가받는다.
1925년 11월 13일 그랍스키는 무역 전쟁의 여파에 더해 산업가 조직 레비아탄에게 자금을 지원하려는 계획을 폴란드 은행 측에서 거부한 일을 계기로 사퇴하였다.
2.3. 총리 사퇴 후
1926년 그랍스키는 바르샤바 농업대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1936년 농촌사회학연구소를 설립해 그 책임자가 되었다.1938년 바르샤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포봉츠코프스키 묘지(Cmentarz Powązkowski)의 가족묘에 안장되었으며 장례식은 성 요한 대성당에서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Aleksander Kakowski) 추기경이 집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