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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식민제국들의 강역 |
1. 개요
植 民 帝 國 / Colonial empire식민제국은 식민지를 거느린 국가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1]
일반적으로 식민제국은 근대에 등장한 식민제국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가 식민지(Colony)의 어원이 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의 식민지를 가진 국가는 식민제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식민지는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식민지도 본토의 연장선으로 본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로 이루어진 근대의 식민제국은 식민지의 주민을 본토의 주민들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대다수의 식민제국은 유럽에 위치했던 열강이었다[2]. 이 중 세력이 가장 강한 것은 대영제국이라고 여겨지고 프랑스 식민제국이 그 뒤를 따랐다.
프랑스 제국 외에 러시아 제국도 대영제국의 주요 라이벌이었는데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다만 다른 서유럽의 식민제국이 대부분 항해술의 발달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형성되었으나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시작해 내륙을 통해 동쪽으로 확장해 나갔고 그 땅들은 식민지보다는 직할 영토에 가깝다. 제정이 폐지되고 소련이 붕괴한 후에도 이들 지역은 러시아에 속해 있다.
현대 세계에서도 이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경우가 가장 많으며, 이들 국가 중 대부분은 유럽 열강에 의해 현재의 국경이 정해졌다. 구 식민제국이었던 국가들 중에 일부 남아있는 속령과 해외영토는 이 시대의 잔재이다.
2. 제국과의 차이
일반적으로 식민제국에서 제국이라는 명칭은 황제가 국가원수인 국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서양에서의 제국(Empire)은 주로 다수의 국가, 민족, 공동체 등을 하나의 국가 체제가 총괄하여 지배적이고 상하 질서를 가진 구조를 형성하는 형태의 국가를 가리킨다. 특히 나중에는 근대적인 우생학,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등이 주요 이념으로 활용되었다.다음은 정치체제에 따른 식민제국 목록이다.
- 황제가 국가원수로 있는 제국인 식민제국[3]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오스만 제국
- 왕, 여왕이 국가원수로 있는 왕국인 식민제국[5] - 대영제국[6], 네덜란드 제국, 벨기에 제국, 이탈리아 제국, 덴마크 제국, 스웨덴 제국, 오만 제국
- 그 외 군주가 국가원수로 있는 군주국인 식민제국 - 구호기사단(기사단국), 쿠를란트-젬갈렌(기사단국 → 공국)
- 식민제국 기간 내에 정치체제가 바뀐 식민제국 - 포르투갈 제국[7], 프랑스 제국[8]
- 식민제국 기간 내에 정치체제가 바뀌었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식민제국 - 스페인 제국[9]
- 대통령이 국가원수로 있는 공화국[10]인 식민제국 - 미국
3. 식민 지배에 대한 태도
서양의 경우 식민제국의 직계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자신들이 한 착취, 학살 등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는 일이 많이 없다. 2번의 세계 대전, 68운동, 냉전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 문화적인 사상이 급격하게 개인주의, 자유주의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자국과 국민 개인의 정체성 사이에 선을 확실하게 긋는 경향이 강해서, 식민 지배에 대한 과거를 비판해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국가는 인격체가 아니며 선악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국가의 오래 전 행위를 가지고 지금의 국가의 개인에게 비난해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논조도 있다.이런 면모가 역사관에 반영되어서 근대 이전의 역사들도 근대의 식민제국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근대 서양 제국주의 시대에서 태어나거나 젊은 시절을 제국주의 시대에서 지냈던 서양 역사학자들은 식민제국주의적인 시각으로 근대이전을 관찰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기다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취향에서 거리가 중세, 고대 나라들은 성과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혹평한다. 서양학자들이 근대 이전의 나라들에세 식민지 경영잘했다고 칭찬하는 나라 또는 식민제국이라고 칭송하는 나라들은 서양 기성세대의 식민제국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제국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나라를 칭송하는 기성세대 사학자들의 기록은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몇몇 동양 사학자들은 이런 식민제국적인 시각을 경계한다. 호주 같이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억압해서 세워진 나라들은 더욱더 그렇다. 호주의 백호주의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은 원인도 원주민 억압 시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기성세대의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호주의 기성세대 역사학자가 근대 이전의 나라를 식민제국이라고 칭송한다면 매우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동북아역사재단은 서양이 제국이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한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시선은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전세계의 피지배 국가 출신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식민제국 국가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영향력이 과거 식민지를 착취한 데서 기인하는 것도 크다는 걸 생각하면 완전히 과거의 일만도 아니기도 해서 더 그렇다. 가끔씩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식민지에서 저지른 만행들에 대해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직도 부정하는 편이다. 그나마 종주국을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역전하거나 대등해지는 정도의 사례만 간혹 가다가 립서비스에 가깝게 보이는 정도이다.[11]
4. 식민제국의 목록
식민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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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프랑스 같은 '고전적인' 식민제국과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중화제국 등의 육상제국들을 식민제국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은 항존한다. 하나하나 들어가보면 저 국가들은 육상으로 이어져 있어서 상호교류가 활발했고, 지배한 기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12] 당대 지배자들조차 어디부터 경계를 어디서 설정해야할지 몰랐고, 억압책이든 유화책이든 일관적인게 없었기 때문이다.
또 특이한 케이스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도 있다. 이 국가는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들을 지배하면서 그 시대 기준으로는 굉장히 진보된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했다. 덕분에 주요 민족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타타르, 무슬림 계열 민족들까지 국가 통치에 참여했다. 문제는 결국 귀족을 포함한 소수 엘리트층에만 국한되다보니 그들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거나 최소한 폴란드 체제에 열렬히 충성했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포함한 하층민이 크게 착취당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폴란드를 제외한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에서는 폴란드를 식민제국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결국 식민제국이라는 용어는 엄격하고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 학술용어가 아니며 일부 케이스에서는 특정 정치적, 이념적 함의를 담고 있기에 지양되는 편이다. 상기의 육상제국들을 식민제국이냐 아니냐를 이분법으로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시대, 상황, 대상에 따라 관계와 위치가 유동적이었다고 결론짓는 경향이 강하다.[13] 보통 영국 본토 - 인도 식민지 관계라기보다는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같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더 밀접한 관계로 비교한다.[14]
- 오스트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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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영토를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로, 정식 명칭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통칭이다.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포함되나, 보통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건국 이전의 거대한 동군연합 시절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들을 한데 묶어 칭하는 경우가 많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 체계는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가지고 제국 내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제국과는 별개인 일종의 가문의 영지 개념으로 동남유럽 여러 국가들의 왕위들도 얻어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국가들은 공식적으로는 서로 별개인 국가들로, 단지 같은 군주를 모시는 동군연합이었을 뿐이다. 또한 합스부르크를 군주로 모신다 하더라도 그 국가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구조는 나폴레옹 전쟁 도중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상황이 되자, 정확히 말하면 독일 서부 지역의, 오스트리아와는 멀고 프랑스와는 가까운 곳에 있던 선제후들을 당근과 채찍을 통해서 장악하게 되어 선제후 선거인단을 합스부르크가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구조가 깨지면서 신성 로마 제위가 뺏길 것이 가시화되자, 극적으로 변화하게 되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영역 국가들의 군주였던 프란츠 2세가 가문의 본진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질적인 중심지 노릇을 하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신이 왕위를 가진 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설했다. 이 때부터 오스트리아를 식민제국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만 그 이전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일종의 국가 연합이지만 이전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또한 본토 이외의 지역에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식민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던 스페인과 그 산하의 식민지들은 첫번째 합스부르크 출신의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 시절만 오스트리아 본가와 같이 활동하고, 그 아들인 펠리페 2세 때부터는 스페인식 발음의 압스부르고 왕조란 이름으로 분가했으므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보지 않는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멸망 직전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들을 합쳐 세운 제국이다. 이후 헝가리와 다른 민족들의 반란을 간신히 진압한 오스트리아는 대타협으로 헝가리와 공동의 제국을 건설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탄생하지만, 두 지배 민족인 독일인과 헝가리인을 모두 합쳐도 여전히 제국 인구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으며, 나머지 민족들은 불평등 관계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증진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남슬라브계 국가들의 영역으로 확장을 계속했고, 결국 남슬라브계의 종주 세력이 되려던 세르비아와 충돌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을 시작한다. 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8국 연합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톈진의 남쪽 절반을 다른 국가들과 분할했을 때 현재 허베이구의 하이허 강과 대운하, 베이징-톈진 철도에 면한 지역을 조계지로 지배했던 적이 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으로부터 서사하라의 리오 데 오로(Rio de Oro) 항구를 구매하려고 시도했고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계약 체결 바로 전날에 헝가리 왕국 측에서 파토를 내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도 참가했음에도 한 뼘의 땅도 차지하지 못했다. -
시스라이타니아(제국 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지를 말한다. 헝가리 왕국의 관할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헝가리와 공동으로 관리했다. -
트란스라이타니아(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의 영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산하의 헝가리 왕국의 지배지를 말한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제국의 양대 지도국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관리했다. 오스트리아보다 억압적인 방식으로 통치했는데,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면서 헝가리가 배타적으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오스트리아는 민족이 중심이 아니라 오랜 전통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였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해 자유롭게 대했다. -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
영국 동인도 회사 출신인 윌리엄 볼트의 제안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용하여 세워진 회사이다. 볼트는 연지벌레를 이용해 코치닐을 만들기 위해 인도 서남 해안과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15], 보르네오 섬 북부, 중간 기착지인 모잠비크 마푸토 만을 식민 지배하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포르투갈의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 인도 해안에서도 영국의 방해가 있었지만 마이소르 왕국의 지지로 잘 넘길 수 있었다. 곧이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싸우는 동안 안다만 니코바르에 상관을 열고 상당한 이득을 거둔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였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찰스 프롤리는 미국 독립 전쟁으로 차 가격이 폭등한 상황이므로 광저우에서의 공행 무역에 집중할 것을 원했으나, 볼트는 중국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인도 식민지 경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서 내부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프롤리의 주장에 따라서, 미국 독립 전쟁으로 비어 있던 광저우에 신성 로마 제국의 깃발을 내건 다섯 척의 무역선이 보내진다. 그러나 곧이어 휴전이 성립되어 각국의 무역선 수십척이 광저우로 향한다. 게다가 영국이 차 가격에 붙는 관세를 119.0%에서 12.5%로 떨어트려 버려서 오스트리아는 비싼 값을 치르고 구매한 차들을 본전도 안 되는 가격에 팔아치워야 했고 중국에 지불할 은을 실은 배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침몰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회사에는 새로운 배들이 납품되고 있었고, 결국 파산으로 이어진다. 프롤리 가문은 완전히 망했고, 찰스 프롤리는 자살한다. 이후 청나라는 막대한 채무를 진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와 무역을 중단했다. -
벨기에 제국
대표적인 식민지는 콩고 자유국. 콩고는 다른 식민지에 비해서도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발상으로 세워진 식민지였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어 무자비한 학살과 착취를 벌인 결과 수많은 콩고인들이 살해당했다. 레오폴드의 통치는 당시 유럽인들도 경악시킬 정도였다. 여기서 설명하기엔 너무 긴 내용이니 레오폴드 2세 문서 참조.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 조지프 콘래드, 마크 트웨인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벨기에를 비난했다. 콘래드의 경우 아예 직접 콩고 강에서 배를 몰며 벨기에의 잔혹 행위를 목격한 인물이었고, 어둠의 심연에서 이것을 묘사했다. 결국 보다 못한 벨기에 정부가 왕으로부터 콩고를 뺏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벨기에의 직접 지배도 레오폴드보다는 아니지만 악랄하긴 마찬가지로, 현지 아프리카 흑인 부족들을 이간질시키며 식민 통치를 하여 이후의 르완다 내전, 부룬디 내전, 콩고 내전의 발단을 만든다. 벨기에의 식민정책은 식민당국의 식민지 지역 토후 지배계급을 통한 간접지배를 선호한 영국, 프랑스와 달리 정부, 교계, 사기업이 밀접하게 결합한 직접 지배(trinité coloniale)를 선호했다.[16] 의화단 운동 이후 톈진의 일부를 지배하기도 했다. 이 톈진 조계는 1931년 중국에 반환된다. -
프랑스 식민제국
전통적인 식민제국이자 아직까지도 많은 곳에 식민지를 보유 중인 몇 안 되는 국가. 왕정 시절에는 북아메리카를 개척했으나 영국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기껏 얻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얻은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은 남아 있었으며, 나폴레옹 3세 시절에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여 중동,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지를 지배했다. 영국 같은 다른 국가들과 함께 종교, 민족 분포를 무시하고 아프리카에서 정한 국경선들은 현재까지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분쟁들을 일으키는 중이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는 악명이 높아서 현재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캐나다의 퀘벡 주와 뉴브런즈윅 주, 미국의 루이지애나 주, 아프리카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가봉, 지부티[17] 같은 곳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불안정하고 가난한 국가들이나 영토들이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식민지들의 독립 시도를 억압했지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래도 현재도 수많은 영토를 유지 중이며,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큰 상황이다. -
독일 식민제국
독일에는 해외 영토 확보에 관심을 보이고 시도한 독일계 소국들이 많이 있으며, 통일 후의 독일 제국도 비스마르크가 사퇴한 이후에는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에 따라 상당히 넓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의 팽창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거대한 계획이었다. -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해군력 증가에 많은 투자를 하며 식민지 획득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아프리카 골드코스트의 일부와 현재의 버진아일랜드 등을 얻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된 뒤에 즉위한 그의 후계자들이 식민지들을 전부 네덜란드에 매각하고 해군도 대거 축소했다. -
독일 제국
아프리카의 나미비아,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 중국의 칭다오, 오세아니아의 미크로네시아, 뉴기니섬 북부, 비스마르크 제도 등을 식민지로 합병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보유했다. 독일 제국군은 나미비아의 헤레로족, 탄자니아의 응긴도족, 무분가 족 등에게 학살을 저질렀고, 현재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치렀던 유럽의 전쟁 피해 국가들에게 사과와 피해 배상을 하는 것과 달리 이 시절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대해 제대로 사과와 피해 배상을 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이들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적 협력을 고려해 사과를 하고 있지만 피해 배상만큼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
나치 독일
일찍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는 동유럽 전역을 독일의 식민지인 레벤스라움으로 만들고, 그 공간에 살아가는 슬라브인은 노예 민족으로 낙인찍어 노예 노동력으로 부리며, 유대인은 모두 절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해 계획한 영토를 모두 얻지 못했지만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일종의 총독부인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해 식민지로서 장기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1941년 히틀러가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한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던 추축국이 주도하는 신질서(Neuordnung) 계획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 독일 제국 시절의 아프리카 식민지와 포르투갈 식민지들을 합쳐 중앙아프리카(Mittelafrika) 식민지를 세우려고 NSDAP 식민정책부(Kolonialpolitisches Amt der NSDAP)를 조직했고, 국가식민동맹(Reichskolonialbund)도 조직되었다. -
벨서 가문
16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금융 가문이었던 벨서 가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것을 갚기 위해 이들에게 자금 대신 베네수엘라를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벨서 가문의 베네수엘라 지배는 20년간 이어졌지만,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거금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소득은 없었다. 그들의 짧은 지배는 카를 5세가 퇴위함과 동시에 끝났다. 당시 베네수엘라의 명칭은 클라인 베네디히(Klein-Venedig)로, 작은 베네치아라는 뜻이다. 짧은 지배였으나, 이 명칭에서 현재의 베네수엘라라는 국가 명칭이 생겨났다. 이 영토는 19세기에 독일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신화적인 것이 되었다. -
하나우 백국
하나우는 재정 확보를 위해서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로부터 오리노코 강과 아마존 강 사이의 기아나를 잠시 빌린 적이 있다. 하나우와 서인도 회사 간의 협약에 따르면 하나우는 식민 지배를 하고, 서인도 회사는 식민지와 하나우 본국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가로 운송비를 받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우의 기대와는 달리 지배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이 지역의 자원은 매우 부족했기에 식민 지배는 엄청난 손실만을 안겨 줬다. 곧이어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일어나며 하나우의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다.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기니만 해안의 그로스프리드리히스부르크(Groß-Friedrichsburg, 현재 가나의 프린시스타운), 모리타니의 아르긴(Arguin)등을 잠시 지배했으며 덴마크로부터 카리브해 덴마크령 서인도의 상트토마스(Sankt-Thomas)섬을 빌려서 통치한 적이 있다. - 이탈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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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통일 이후 늦게 식민지를 확장하여 소말리아,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를 지배했다. 에티오피아로도 쳐들어갔으나 패배했다. 파시스트당의 득세 이후 1935년 독가스까지 써가며 에티오피아를 재차 침공하여 식민 지배하는데 성공했고, 알바니아도 점령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요 추축국이었고, 전쟁 당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북아프리카[18]의 일부를 점령하다가 무리한 전쟁 수행으로 얼마 안 있어 패배했다. 1947년 조약의 결과로 모든 식민지와 해외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
베네치아 공화국
일찍이 지중해 곳곳을 정복하여 식민지들을 건설했고 우수한 해군력과 무역력을 이용해 제노바 공화국, 오스만 제국 등과 지중해 무역을 놓고 경쟁했으며 전성기에는 아드리아의 여왕이라 불렸다. 16세기 이후 공화국은 자츰 몰락했지만 그리스 인근의 일부 식민지들은 18세기까지 유지했다. -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처럼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경쟁했으나 15세기 이후 몰락했다. -
토스카나 대공국
오늘날 프랑스령 기아나에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다. -
구호기사단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서 결성된 기사단. 이슬람 세력과 수백년 동안 싸워왔으며 예루살렘 왕국 멸망 이후에는 키프로스, 로도스, 몰타 섬 순으로 근거지를 옮겨 다녔다. 몰타에 주둔했을 당시인 17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묻어가는 형식으로 카리브 해의 생 크리스토프( 세인트키츠 네비스) 섬, 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 섬, 생 크루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섬 등을 14년간 점령했던 적이 있다. 당시의 기사단장이었던 필리프 드 롱발리에 트루시가 프랑스령 카리브 제도의 총독으로 파견되면서 기사단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아메리카 제도 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섬들을 기사단이 매입, 통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이 소유했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기사단이 맡게 되었고 총독궁을 비롯해, 도로, 병원, 교회 등 인프라를 갖춰나갔다. 그러나 1660년대 들어 식민지 경영이 생각보다 돈이 되지 않았고 기사단 내부에서도 재매각해야 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부터 압력을 받으면서 결국 1665년 신설된 프랑스 서인도회사에 식민지를 매각함으로 식민경영은 종지부를 찍는다. 세인트 키츠 섬에 건설한 구호기사단의 총독궁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생바르텔레미의 문장에는 몰타 십자가 있는 등 현재도 그 흔적이 잔존해 있다. 현재 구호기사단은 적십자처럼 순수한 구호단체로 활동 중이다. 구호기사단군이 존속 중이지만 그 기능은 어디까지나 의장과 경호에 한한다.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다. -
네덜란드 제국
대표적인 식민지로 인도네시아와 수리남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향신료 무역으로 시작해서 강제 재배로 대표되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실시했고,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기아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네덜란드는 독립 직후 이전 지배자였던 스페인을 누르고 전 세계의 패권을 휘어잡았지만, 영란전쟁 이후 영국에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를 재차 침공하여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 했으나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결국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1975년에 남미의 수리남까지 독립을 인정하면서 식민제국으로서의 역사를 끝맺는다. 현재는 네덜란드령 카리브로 총칭하는 카리브해의 섬들을 보유하고 있다.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독립적인 군함과 군대를 가지고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다. 1799년 경영 악화로 파산했고, 그 영토는 네덜란드 정부가 직접 통치하게 된다. -
덴마크 제국
가장 유명한 사례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가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 포르투갈과 함께 인도를 점령한 적이 있다. 그리고 카리브에 여러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의 가나 해안에서 장사를 해먹기도 했다. 당시 덴마크인들은 스웨덴, 독일인과 함께 노예 사냥꾼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융성기인 19세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편들었다가 패배한 영향으로 노르웨이를 잃게 되어버린데다가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에는 그린란드나 일부 도서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19] 기니만의 남은 몇몇 거점은 1850년 영국에 넘겼다. -
덴마크 동인도 회사
1616년 처음으로 인도에 진출한 이래 한동안은 스웨덴 동인도 회사와 함께 차 수입량의 90%를 차지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인도에서 자바 섬까지 곳곳에 덴마크의 상관이 존재했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잠시 위축되기도 했으나 곧 회사를 재편하여 재기했다. 새 전성기에는 중국과의 무역에 집중했고, 덴마크 내에서 희망봉을 지나는 모든 무역 경로를 40년간 독점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도중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코펜하겐을 침공할 때 대부분의 함선들을 잃었고, 이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채 1850년대까지 인도 내의 식민지들을 영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
쿠를란트-젬갈렌
지금의 라트비아에 있었던 독일계 공국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었다. 리예파야와 벤츠필스를 중심으로 강한 해군을 건설하여 아프리카 감비아 일부 지역과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점령하고 노예 무역과 설탕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식민제국 건설에 열을 올리던 야콥 공작은 러시아로 축출되었고, 스웨덴은 서 쿠를란트의 항구 시설들과 식민지들을 귀속했다. 이후 쿠를란트는 주종국인 폴란드가 약화되자 러시아 제국의 괴뢰국이 되고, 폴란드 분할 이후 그대로 러시아에게 병합된다. -
미국 식민제국
독립 이후 서부로 거침없이 영토를 넓히며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집단들을 학살했고, 더 나아가서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유타, 네바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을 병탄했다.[20]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의 국가 정책적 규모는 중앙, 남아메리카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브라질, 콜롬비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21]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같은 나라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었다. 이후에도 미국 백인 이민자들이 토지를 빼앗아 하와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합병하여 민족말살정책과 비슷하게 하와이 원주민을 탄압하고,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필리핀과 쿠바, 괌, 푸에르토 리코 등을 식민지 내지는 속국으로 삼았다. 게다가 미국은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19~20세기 내내 강력한 내정간섭을 일삼은 바 있다.[22] 자세한 내용은 미국 식민제국 문서 참조. -
스웨덴 제국
핀란드, 노르웨이와 같은 주변국을 억압한 북방의 강대국이었다. 유럽 밖으로도 뉴 스웨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델라웨어 주를 점령한 적이 있었고, 카리브해에 식민지를 가졌으며 초기 노예무역에도 관여했다. 다만 제국주의의 융성기였던 19세기 말경에 식민지를 죄다 포기했기 때문에 식민제국의 이미지는 약하다. 다만 이 시기에도 북부의 사미족에 대한 탄압은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과 더불어 최초의 식민제국이자,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3대 식민제국.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23]과 중앙아메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현재의 미국 중서부, 아프리카의 서사하라와 모로코 일부 지역, 적도기니,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등을 식민지배했다.[24] 그러나 스페인 제국은 근대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800년대 초반에 붕괴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들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거의 잃었다. 대표적으로 중앙, 남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정복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대량 학살함과 동시에 공사 및 광산 노동에 강제동원하고 천연두, 폐렴, 감기 등의 질병들을 옮기는 바람에(단 이건 의도한 바는 아니다.) 천만이 넘는 중남미의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건국할 때부터 레콘키스타로 유대인과 무슬림들을 추방하며 자체적인 경제, 금융 기반을 날려버리고 그 자리를 외국인인 제노바 공화국 상인들로 채워버린 데다 영국, 프랑스, 저지대와의 전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 결과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그 막대한 부는 이탈리아를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다 빨아먹고 정작 스페인은 재정난에 허덕이다 30년 전쟁 이후 하락세를 타게 된다.
다만 흔히 생각하듯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몰락한 것은 아니다. 30년 전쟁 당시에도 좀 구식이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테르시오 전법을 내세워 가톨릭 세력의 주축으로 활동했고, 이후에도 영국, 프랑스 왕국에 견줄 만한 강대한 해군 함대[25][26]를 바탕으로 남아메리카의 패권을 유지했다. 이것이 완전히 박살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였다. 1805년의 오스트리아 전쟁 중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의 등뼈가 부러지고, 1808년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본토마저 초토화되며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에 투사할 여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전후 그 틈을 타 남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대대적으로 독립해버렸고 남은 것은 쿠바와 필리핀, 미크로네시아 제도뿐이었다. 1800년대 말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추가적으로 얻어내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져 핵심 지역인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빼앗겼다.[27] 그리고 마지막 잔재인 아프리카 식민지 또한 50~70년대를 거쳐 독립하며 스페인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구 식민지 지역에 언어, 문화적 연고를 무기로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상당수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공용외래어도 적지 않다. 현재는 해외영토로 세우타, 멜리야, 스페인령 카나리아와 일부 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사하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대영제국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국가. 수많은 식민지와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본국의 강력한 산업 기반에 힘입어 오랜 세월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패권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부터 불안해지더니,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난이 찾아오고 미국과 소련이 양대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상황 속에서 주요 식민지들의 독립과 더 이상 대영제국이 전세계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흐름을 인정해야 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구 곳곳에 영국령 섬들이 남아 있으며, 사실상 영연방의 수장국인데다가, 유엔 상임이사국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한 수준이다. -
영국 동인도 회사
독자적 군대와 함선을 보유하고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러나 재정 악화, 세포이 항쟁 이후 해체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다. -
잉글랜드 왕국
1707년 연합왕국 구성 이전의 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인도 해안, 아프리카 해안, 북아메리카 동해안 등이었다. 본격적인 면 단위의 식민화와 침략은 연합왕국 구성 이후였다. -
스코틀랜드 왕국
1707년 연합왕국 구성 이전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와 별도로 식민지를 보유했다. 노바스코샤, 뉴저지 등이 스코틀랜드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다리엔 갭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했던 적도 있다. -
13개 식민지
미국의 전신. 영국계 이주민들이 주류가 되어 건설한 식민지들이다. 왕성한 팽창 활동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며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던 중 본국인 영국 정부와 여러 차례 마찰을 빚게 된다. 이에 불만이 쌓이던 도중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본국인 영국이 재정 위기에 빠져 세금을 인상할 기미가 보이자 이에 반발하며 독립하여 현재의 미국이 되었다. -
오스트레일리아
그 자체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지만 상당한 내정의 자치를 누리며 노퍽 섬, 크리스마스 섬 등을 영국 본국이 아닌 자신의 관할에 두고 통치했고(현재도 이들은 호주령이다),[28] 백호주의 사상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학살, 강제 동화정책을 실시했었다. 또한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뉴기니, 나우루를 본국인 영국과는 별도로 위임통치했다. 이 때문에 부분적 식민제국으로 보기도 한다. -
뉴질랜드
역시 호주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동시에 토켈라우, 쿡 제도을 관할했고(역시 현재도 뉴질랜드령),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나우루, 사모아를 본국과는 별도로 위임통치했다. 단 원주민 탄압의 흑역사가 있던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와 달리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대대적 탄압은 없었는데, 마오리족이 끈질긴 투쟁을 벌인 끝에 영국인과 동등한 지위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현재도 많은 섬들을 속령으로 두고 있고, 그 중 토켈리우는 주민투표 실패로 여전히 다른 섬들보다 낮은 수준의 자치를 누리고 있다. -
캐나다
영국의 식민지이면서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게다가 다른 영연방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나 옆나라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강제 동화정책들을 자행하는 등의 악행도 있었다. 2008년도에 캐나다 정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와 강제로 격리하여 백인 기숙학교에 강제 입학시킨 일에 대해서는 사과했지만 여전히 표면적인 사과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남아프리카 연방 /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래는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식민지였으나, 나중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계 백인도 영국의 식민지배의 피지배 주민이었던 경우로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식민지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반영감정 때문에 1961년 영연방에서 탈퇴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로 대표되는 흑인 탄압 정책으로 유명하며, 로디지아의 백인 정권을 지원하기도 했다. 구 독일 제국령이었던 나미비아를 본국 영국과 별도로 위임통치했지만, 기한을 넘겨도 한참 넘긴 1990년대까지 불법적으로 강점하며 나미비아의 분리독립운동을 억압했다. -
오만 제국
아라비아 반도 남부, 동부 아프리카 해역, 이란 남부와 파키스탄 남부 섬들을 지배했다. 또한 포르투갈과 함께 노예무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중흥기의 수도가 탄자니아 앞바다의 잔지바르 섬이었을 정도로 노예무역은 오만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잔지바르의 흑인-아랍인 갈등이 상당히 심각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에 내전이 벌어져 잔지바르 섬에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학살당하거나 추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오만은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급속히 쇠락하여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일대와 아랍권을 제외하면 인지도는 약하다. 기존 식민 제국인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인도양을 장악했기에 의미가 크며, 근대의 유일한 아랍계 식민 제국이었다. -
포르투갈 제국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식민제국. 브라질, 모로코 해안,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페르시아만, 인도네시아, 인도의 고아, 중국의 마카오 등을 지배했다. 인도양 패권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수없이 정면 충돌과 에티오피아, 구자라트, 아체 등지에서 대리전을 벌였다. 한때는 마카오와 말라카를 거점으로 대중국 무역의 주도권을 가지고 아시아에 다른 식민제국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네덜란드에게 동티모르를 제외한 인도네시아 전부를 잃어버렸다. 특히 17세기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가 모로코 원정 도중 전사하고 후계자가 끊겨 스페인에게 병합된 이후 식민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18세기까지 알라위 왕조,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 등에게 모로코와 페르시아만 등 중동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동아프리카 식민지 역시 모잠비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오만 제국에게 빼앗겼다. 인도에서는 프랑스, 덴마크, 영국과 경쟁했지만 결국 고아를 차지하는데 그쳤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정부가 식민지 브라질로 이주하며 브라질의 발언권이 세져 결국 독립하는 상황을 맞았다. 20세기에는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남아있는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유지하려고 식민지 독립운동을 억눌렀으나 결국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로 죄다 독립시켰다. 마지막으로 1999년 마카오까지 중국에 반환했으며, 마카오는 아시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다. -
러시아 제국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으나 러시아의 잠재력을 예측한[29]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이 끝없이 이걸 견제했다. 이를 위해 북방전쟁, 러시아-투르크 전쟁 등이 차례로 벌어졌지만, 발트 해나 흑해나 지중해인지라 안정적인 통상로를 확보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19세기에 어찌저찌하여 지금의 소말리아 북부의 사갈로를 잠시 식민지배하긴 했으나, 하필 본국에서 너무나도 먼 아프리카에 있던데다, 근처에 이탈리아와 영국이 소말리아의 상당부분을 식민지로 확보해놓은 상황인지라서 프랑스에게 자국령 지역을 할양해버리고 소말리아에서 손뗐다.[30] 그 이외에 당시 자국령이던 알래스카를 통해 지금의 미국 오리건 주와 캘리포니아 주,[31]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이르는 러시아령 아메리카를 차지했지만, 역시 본국에서 너무 멀어서 유지하는데 쌩돈만 나가자 인접한 캐나다와 멕시코, 미국에게 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들을 몽땅 팔아치워버렸다. 게다가 유럽의 강국들을 상대로 확장하기에는 러시아는 너무 경쟁력이 부족했다. 반면 무주공산이었던 시베리아 방면으로는 무한정 확장이 가능했기에 러시아는 동방 개척에 열을 올렸고, 태평양을 넘어 북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본격적인 국제적 강대국으로 떠오른 러시아는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개시, 영국과 충돌을 빚는데 이것이 그레이트 게임이다. 크림 전쟁, 페르시아 분할, 거문도 사건, 영일동맹, 러일전쟁 등이 이 거대한 대립의 산물이다.[32] -
오스만 제국
전통적인 의미의 식민제국은 아니지만 제국주의 시대인 20세기 초까지 존속했기에 오스만 후기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와 비교된다. 오스만 제국은 새로 편입한 정복지 및 기존 영토를 자치라는 미명 하에 방만하게 통치했다.[33] 애초에 제국 내 구성 민족들에 대해서 이들의 종교에 기반해 공동체( 밀레트 제도)를 구성시키고 전혀 다른 법(샤리아, 교회법, 유대율법)을 적용시켜 통치했으며, 세금제도도 밀레트에 따라 서로 다르게 운용했다. 동유럽 발칸반도, 중동, 이집트 등 정복지에 대해서는 총독을 파견시키고, 총독에게 해당 속주에서 왕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대놓고 기어오르거나 중앙에서 요구하는 세금을 바치지 않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원칙적으로 노터치였다. 다만 기어오르면 확실하게 조지긴 했다. 제국 내 피정복민들에 대해서도 일본이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인재를 발탁하여 재상에까지 앉히기도 하고 향촌 단위에서는 각 지방의 자치를 인정했으며, 북아프리카 지방도 직접 지배하지 않고 간접지배의 방식을 취했다. 이로 인해 제국 후기에 가면 이집트나 알제리 등 지방 자치 정권이 중앙정부를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오스만은 확실히 식민제국적 특성을 보인다. 제국 말기에는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되어 그리스를 시작으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피지배 민족들이 계속해서 독립하면서 발칸반도 등 동부유럽 일대에서 지배력을 상실했다. 또한 튀르크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에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써 수많은 종교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오스만은 점차 배타적으로 변하여 이슬람 튀르크인의 제국이 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착취와 차별, 학살이 있었음은 당연지사. 결국 제국이 망하기 직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터지며 민족 갈등이 최악의 형태로 폭발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피지배국들에 대한 지배도 절대 온건하지 않았고, 피지배국 속주 내부에 민족, 종교간 분열을 조장하며 통치하기도 해서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은 불가리아, 그리스, 요르단, 튀니지, 쿠웨이트 같은 일부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들 몆몆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민족, 종교 분쟁 및 내전이 끊이지 않는 불안정한 상황이거나[34] 최근에 와서야 안정되기 시작한 국가들[35]이 많다. -
일본 제국
동양의 식민제국으로 에도 막부 시절부터 사쓰마 번을 통해 류큐 왕국을 간접 통치하면서 아마미 제도[36] 및 에조치를 병합하여 원주민들을 착취했다. 그리고 1879년 류큐 왕국을 합병하고 식민제국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대만을, 러일전쟁으로 사할린을, 한일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여기까지는 나름 성공적이었지만[37] 경제 대공황 이후 군국주의가 폭주하며 만주, 중원, 남아시아, 태평양, 알래스카를 연달아 침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팽창 정책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는 수준이라는 것을 간과했고, 첫 단추인 중일전쟁부터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제대로 막히고 말았다. 일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에 큰 굴욕을 안겨 주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 결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 열도 본토 섬 4개( 큐슈, 시코쿠, 혼슈, 홋카이도 등)와 쓰시마 등 인근 소규모 섬들을 제외한 한반도[38]와 쿠릴 열도,[39] 남사할린, 중국, 동남아시아, 대만 등 갖고 있던 아시아의 일본령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을 대거 상실하게 된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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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다만 전통적 의미의 식민제국이라 보기는 힘들고 후반기 열강들에게 지속적으로 털리며 식민제국의 이미지가 많이 상실된 국가라서 식민제국이라 보기 애매한 부분이 많다. 다만 오스만 제국처럼 20세기까지 존속했기에 전통적 의미의 식민제국과 어느 정도는 비교된다. 건국 초반기에는 몽골의 북원과 중국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전성기에는 티베트, 준가르 칸국까지 멸망시켜 지배했고 조선, 대남국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등의 강력한 국력을 가졌으나 건륭제의 치세 이후 시간이 지나며 점점 쇠퇴했고 아편 전쟁 이후 계속된 서양 열강들의 침탈로 약해진 국력이 드러나 여러 영토들을 뜯기는 등 식민제국이라 보기 힘든 수준으로 위상이 내려갔다. 그나마 19세기 후반에 양무운동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고 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며 잠시나마 조선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에게 만주 일부도 상실했고 1912년에 멸망함으로 청나라 식민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5. 관련 문서
[1]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일 필요는 없다.
[2]
일본 제국,
미국 식민제국은 열강이긴 했으나 각각 동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위치했고,
중화민국과
에티오피아 제국은 열강은 아니었지만 중화민국은 위구르, 티베트, 몽골을, 에티오피아 제국은 티그라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으며 식민제국의 모습을 보였다.
[3]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현재는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제정이 폐지되어
공화국이다.
[4]
단 헝가리는 왕국이다.
[5]
이들 국가의 특징은 원래는
전제군주제였다가 근대 이후 거의 다
입헌군주제가 되었으며,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현재도 군주국이다.
[6]
영국 국왕이
영국령 인도 제국 황제 겸임.
[7]
왕국(1415년 ~ 1910년) → 공화국(1910년 ~ 1999년, 포르투갈 제국 해체.)
[8]
왕국(1534년 ~ 1792년) → 공화국(1792년 ~ 1804년) → 제국(1804년 ~ 1814년, 1815년) → 왕국(1814년 ~ 1848년) → 공화국(1848년 ~ 1852년) → 제국(1852년 ~ 1870년) → 공화국(1870년 ~ 1980년, 프랑스 제국 해체.)
[9]
왕국(1492년 ~ 1873년) → 공화국(1873년 ~ 1874년) → 왕국(1874년 ~ 1931년) → 공화국(1931년 ~ 1975년) → 왕국(1975년 ~ 1976년, 스페인 제국 해체.)
[10]
중간에 정치체제가 바뀐 경우 말고 처음부터 공화국으로 시작한 나라.
[11]
영국 국회의사당에
간디 동상이 개막을 건립하거나, 아일랜드 식민지 지배와 암리차르 학살에 대해 총리가 사과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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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자국이 침공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에 대해서 기업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보상하거나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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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식민제국은 19~20세기 열강을 칭하는데 상기 국가들은 해당 시기에 있었어도 그 이전부터 지배해왔던게 대부분이다. 고로 어떤 경우에서는 식민제국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다민족 제국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13]
이는 영국, 프랑스 같은 고전적 식민제국들도 저들에 비해 덜하긴 하지만 마찬가지이긴 하다.
[14]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식민지로서의 성격과 다른 식민지들과 비교해 봐도 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면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을 인도와 같은 맥락의 완전한 식민지로 분류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다.
[15]
여기는 세 번이나 지배를 시도했으나 모조리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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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콩고 식민지에서 원주민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주변 역할에 머물렀으며 1, 2차 대전 참가 후 40년대 말에야 개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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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이 국가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도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다.
[18]
이집트 서부 일부와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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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의 경우는 자기들과 같은 노르드계 민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였던지라 식민지라기보다는 동군연합 영토 취급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고, 그린란드는 현지의
이누이트와 별다른 유혈 충돌이 없었고 너무 추워서 농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역선언만 하고 거점만 식민지화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식민지 착취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제국으로서의 이미지가 거의 없다. 물론, 이건
아프리카나
카리브 제도에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식민지들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다.
[20]
미국에서는 흔히 개척 정신으로
미화되지만, 어디까지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21]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칠레는 차루아, 테우엘체,
마푸체, 셀크남, 알라카루페, 과라니, 토바, 아이마라, 케추아 등 자국 영토 내의 남미 원주민 민족 집단들을 일방적으로 대량 학살하여 현재의 자국 영토와 국경선을 정벌, 획정했던 국가들이다. 덕분에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인 메스티소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중이 높은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등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남미에서 혼혈인과 원주민들의 비중이 낮고 백인들의 비중이 가장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2]
과거 동구권이
소련의 영향력이 짙었다면 냉전시기 중남미는 알게모르게 미국의 영향력이 짙었다.
[23]
다만 칠레의 마푸체 족과 아르헨티나의 테우엘체 족, 파라과이의 과라니 족은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 이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거나 유화책으로 겨우 달래며 식민지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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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제국주의는 굉장히 악랄하기로 이름이 높으나 주로 전근대인 1500년대 초기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19세기, 20세기에 횡행했던 식민제국보다는
몽골제국과 같은 정복제국의 행위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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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에는 당대 영국 기준 1급함으로 분류되는 함선만 자그마치 열 척에 달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40년 가까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열함 지위를 유지했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함이었다. 이들은 당시 5척에 불과했던 영국 1급함들보다 배로 많았고 각 함의 포문 수도 영국 1급보다 열 문가량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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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영국은 염가 1급인 90문 2급함을 열한 척 가량 추가로 보유했고, 해군의 주축이 된 74문함은 비교 불가할 수준으로 많았으므로 종합적으로는 영국이 명백히 우위였다. 상기 서술된 내용은 스페인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3위 정도의 강대한 해군력은 견실히 운영해왔다는 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2차 대전 직전의
일본 해군 수준은 되었다는 의미.
[27]
이에 미크로네시아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져 독일 제국에 팔았다.
[28]
다만, 이들 식민지에는 아무런 탄압도 가하지 않았기에, 예나 지금이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9]
실제로 20세기가 되면 러시아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강한 나라가 되므로 틀린 예상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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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뒷날
지부티라는 이름으로 독립한다. 참고로 소말리아의 영국령 지역이 오늘날의
소말릴란드고 이탈리아령 지역은 오늘날의
소말리아다.
[31]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의 행정 중심지가 바로 포트 로스다. 포트 로스가 건설될 당시에 이 지역을 탐험하던 러시아 해군 소속의 탐험가인 니콜라이 레자노프와 이 시기에는 스페인령이었던 멕시코의 캘리포니아의 행정관의 딸인 콘셉시온 아구엘로와의 로맨스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에 러시아가 레자노프의 활약으로 당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는 수준으로 식민지를 크게 확장했는데, 이때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에 포트 로스라는 러시아령 도시 겸 요새를 짓기 위해 스페인과 협상하려는 와중에 만나서 친분을 쌓은 사람이 콘셉시온 아구엘로의 아버지이고 이때 그녀와도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약혼까지 했으나, 믿는 종교가
러시아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서로 달라서 결혼을 미루고 있던 중에 레자노프가 잠시 러시아 본국의
크라스노야르스크로 갔다가 그곳에서 열병으로 쓰러져서 포트 로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한 바람에 둘의 로맨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크게 상심한 콘셉시온 아구엘로는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857년에 사망했다.
[32]
여담으로 19세기 후반부터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
소러시아"란 이름의 정체성은 "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교체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니콜라이 고골이 민족적으로 우크라이나인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가 이것이다.
[33]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던 다른 식민 제국들과 다르게 오스만 제국은 가까운 유럽과 중동 영토 내에 도로 설치조차 게을리 해서 유럽 피지배국 속주의 잉여 식량 상당수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썩기 일쑤였다.
[34]
키프로스,
리비아,
시리아, 구
유고슬라비아권 국가들.
[35]
이라크,
레바논 등
[36]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건설하여 주민들을 착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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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일제는 조선 경영에서 만년 적자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내의 국가이자 일본 육군의 사유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본국 정부와 독립되어 운영되던
조선총독부가 본국에 척을 질 수 없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이런 저런 증산 사업을 시도하고도 돈이 없어 본국 의회의 예산을 계속 타서 써야 했기 때문.
[38]
한반도의 경우 일본 정부에서 다른 식민지 및 해외영토와 달리 일본 제국의 지배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9]
현재까지 러시아와 영토 분쟁이 있다.
쿠릴 열도 분쟁 참조.
[40]
현재도
오세아니아에 속해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영토로 가지고 있지만 워낙 작고 기존 원주민들이 부재하기에 일반적으로 일본 본토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