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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0:11

독일 식민제국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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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식민제국
Deutsches Kolonial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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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설립 이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벨기에 식민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일본 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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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식민제국 설립
1888년 아부시리의 반란
1890년 헬골란트-잔지바르 협정
1899년 아다마와 전쟁
1904년 헤레로 전쟁
1905년 마지마지 반란
1919년 베르사유 조약
1920년 식민제국 해체
위치 <colbgcolor=#fff> 중부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수도 베를린
언어 독일어 외 토착 언어
인구 11,979,000명
면적 2,953,161km²(1912년)

1. 개요2. 역사3. 식민지 목록4. 식민지 내 탄압과 학살

[clearfix]

1. 개요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속한 독일 식민제국.

2. 역사

독일이 식민지를 늦게 개척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 독일인들이라고 아예 해외 식민지 진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한자 동맹 시절부터 활발한 해상 무역을 전개했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독일 상인들은 전세계를 누비며 교역했다. 독일 도시들의 무역 회사들은 국가와는 독립적인 식민지 개척에 나서 아프리카와 태평양 일대에서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곤 했다.[1] 그러나 정작 국가 단위의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은 1800년대까지 시도되지 않았다. 1871년 통일 직전까지도 독일 국가들은 해군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고,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에서 해외 식민지를 보호할 해군이 없으니 식민지 개척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1871년 이전까지 독일은 식민지는커녕 본국의 통일과 육군 병력에 더 집중해야할 판이었다.

국가 주도의 식민지 개척 작업은 1859년에야 첫 발을 뗐다.[2] 프로이센이 포르모사 섬, 즉 타이완섬을 식민지로 삼으려 찝적거렸던 것이다. 프로이센은 미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까지 양해를 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나폴레옹 3세는 타이완보다 베트남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허락도 받아냈다. 1859년 말에 포르모사를 점령하고 중국과의 무역조약을 체결할 임무를 부여받은 독일 식민함대가 출항했다. 그러나 이 식민함대의 전력이 너무나도 빈약했고, 이미 타이완을 다스리던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불사할 생각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타이완 식민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 미련을 못버린 프로이센은 '테티스' 함선 한 척을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보내 탐사토록 했다. 남미 해안가에 해군 거점을 건설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지치고 함선을 수리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별다른 성과 없이 1년 만에 돌아왔다.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이후, 프로이센은 덴마크가 차지하고 있던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실제로 덴마크가 전쟁에서 빼앗긴 슐레스비히 일부와 니코바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당연히 거절당하기도 했다. 1866년에는 술루 제도의 술탄 자말 울 아잠이 스스로 프로이센에 복속되어올 것을 요청했지만 인근 열강들의 눈치 때문에 실패했고, 위투란드의 술탄도 프로이센에게 보호령 설치를 건의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거절됐다. 특히 이때 수상을 맡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장 정책에 회의적인 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먼로 독트린을 피하기 위해 아메리카에 해군 기지 건설을 피했고[3] 아직 독일이 식민지 확장을 할 만큼 유럽 내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식민지에서 본국의 무역과 산업을 위한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이란 대부분 환상에 불과하다. 식민지를 개척하고 유지하는 비용, 특히 식민지에 대한 주장을 확립하는 비용은 매우 흔히 본국이 식민지로부터 얻는 효용을 초과한다. 개인의 상업 및 산업적 이득을 위해 국가 전체에 상당한 세금 부담을 부과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사실 역시 별개의 이야기다. 게다가 [독일은] 아직 멀리 떨어진 영토들을 굳게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할 만큼 충분히 개발되지 못했다.


- 1868년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전쟁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에게 보낸 서한 일부.
독일 제국의 식민지는 독일 제국이 성장함으로써 19세기 말 국외에 건설한 식민지를 통해 만들어진 독일의 대외 영토를 의미한다. 독일의 국부 비스마르크가 반제국주의적 인물[4] 한동안 독일이 제국주의 노선을 안 탔다는 이유로 독일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독일도 당시 분명히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며, 상당한 식민지를 보유했다. 독일은 사실 통일 이전에도 일부 소국들이 아프리카에 조그만 식민지들을 설립한 적이 있으나, 제국으로 통일된 이후부터 다수의 식민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독일이 패배하며 독일의 적국이던 나라들이 독일의 식민지를 점령했고 몇몇 식민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존재했다. 일례로 1919년까지 존속한 독일령 동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벨기에 영국이 분할했지만 1920년 1월 10일 공포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식민지를 모두 협상국에 넘겼다.

3. 식민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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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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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아프리카 위투 소말리아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카메룬
토고
오세아니아 독일령 뉴기니 독일령 사모아
아시아 키아우초우 톈진 *
키아우초우는 독일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임차한 조차지 · *독일령 톈진은 톈진 내 독일의 조계지 }}}}}}}}}
독일 제국의 식민지 목록 (1912년 기준)
<rowcolor=#fff> 식민지 수도 설립 폐지 면적 인구 독일인 인구 현재 국가
독일령 서아프리카 독일령 카메룬 야운데 1884년 1920년 495,000km2 2,540,000 1,359
[[카메룬|]][[틀:국기|]][[틀:국기|]]

[[나이지리아|]][[틀:국기|]][[틀:국기|]]

[[차드|]][[틀:국기|]][[틀:국기|]]

[[가봉|]][[틀:국기|]][[틀:국기|]]

[[중앙아프리카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콩고 공화국|]][[틀:국기|]][[틀:국기|]]
독일령 토고 바기다
→제베아브
로메
1884년 1920년 87,200km2 1,003,000 316
[[가나|]][[틀:국기|]][[틀:국기|]]

[[토고|]][[틀:국기|]][[틀:국기|]]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빈트후크 1884년 1920년 835,100km2 86,000 12,135
[[나미비아|]][[틀:국기|]][[틀:국기|]]
독일령 동아프리카 바가모요
다르에스살람
→타보라
1891년 1920년 995,000km2 7,511,000 3,579
[[부룬디|]][[틀:국기|]][[틀:국기|]]

[[케냐|]][[틀:국기|]][[틀:국기|]]

[[모잠비크|]][[틀:국기|]][[틀:국기|]]

[[르완다|]][[틀:국기|]][[틀:국기|]]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독일령 뉴기니[5] 핀샤펜
→마당
→헤르베르츠회헤
심프손하펜
1884년 1920년 242,776km2 601,100 665
[[파푸아뉴기니|]][[틀:국기|]][[틀:국기|]]

[[솔로몬 제도|]][[틀:국기|]][[틀:국기|]]

[[팔라우|]][[틀:국기|]][[틀:국기|]]

[[미크로네시아 연방|]][[틀:국기|]][[틀:국기|]]

[[나우루|]][[틀:국기|]][[틀:국기|]]
파일:북마리아나 제도 기.svg 북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틀:국기|]][[틀:국기|]]
독일령 사모아 아피아 1899년 1920년 2,570km2 38,000 294
[[사모아|]][[틀:국기|]][[틀:국기|]]
키아우초우 칭타우 1897년 1920년 515km2 200,000 400
[[중국|]][[틀:국기|]][[틀:국기|]]

4. 식민지 내 탄압과 학살

1897년, 멀리 떨어진 소말릴란드에서 1889년에 발생했던 우역이 남서아프리카에 도달하여, 독일 제국 식민지이던 탄자니아 나미비아에 살던 헤레로족의 가축사육을 황폐화시켰다. 독일 정착민들은 싼 값에 목초지와 생존가축을 구입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1904년 독일 제국에 대한 헤레로족의 봉기로 이어졌다. 1904년 1월 며칠 동안 헤레로족 전사들은 아이, 여성, 선교사, 다른 국적의 유럽인들을 제쳐두고 무장 가능한 독일인들만을 선별하여 100여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이에 대응하여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로타어 폰 트로타 장군이 지휘하는 진압부대를 보냈고, 같이 저항에 나섰던 나마족 인구 50%와 헤레로족 인구 80%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에서 죽었다. 1904년 바터베르크 전투에서 트로타의 군대는 3,000~5,000여 명의 헤레로족을 공격한 후, 생존자들을 사막지역으로 몰아 놓고 사막에서 나오는 자들은 사살했다. 또한 수시로 여성에 대한 강간을 자행하고 피해자를 살해하거나 사막으로 버렸다. 당시 독일군의 가이드였던 얀 클로태는 저항할 능력이 없던 헤레로족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고 그 참혹상을 증언한 바 있다. 학살 이후, 생존자들은 독일군 또는 정착민의 노예로서 수용소에 수감되어 각종 고문에 시달렸고,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결국 고문, 생체 실험, 중노동, 영양부족 등으로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독일 제국에 의해 4년여에 걸쳐 자행된 나마쿠아 헤레로족 대학살은 20세기 최초의 대학살로 알려져 있다. 1985년 UN의 휘태커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학살의 결과 1904년 80,000여 명이던 헤레로족의 인구는 1907년 15,000여 명으로 급감했다. 독일 해군은 1904년에 나미비아에서 헤레로족에게 습격을 가했다.

참고로 헤레로족은 베를린에 소재한 독일 기업들을 과거 나미비아에 수천만 달러의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미국 국제재판소에 소송 중이다. 독일의 피셔 외무부 장관은 10월, 나미비아 방문 중, 독일에 배상금을 물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거절했다. 독일은 배상금 대신 경제적 원조라는 명목 하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6]

2010년대 와서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사죄와 배상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고, 열터진 해당 나라들은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하여 다른 유럽 국가와 같이 비난하고 반대한다. 그나마 2016년에는 독일에선 공식적으로 집단 학살이라는 말을 쓰며 인정한 바 있으나 여전히 독일 기업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준 유대인 피해자들과 달리 독일 제국이 벌인 학살 배상금은 못 준다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하여 독일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사죄하라고 튀르키예에게 따지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늬들은 헤레로족이나 나마족에게 사죄했냐?" 라고 비웃던 것도 유명하다. 튀르키예가 "독일 제국 시절이라 모른다고? 우리도 오스만 제국 시절이라 모른다고 하면 똑같은데? 왜 그리도 우리보고 사죄와 배상 운운거리니?" 라고 비웃자 독일 노르베르트 람메르트 연방의회 의장도 "나미비아 사태에 대한 명백한 설명이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2016년에는 공동성명을 통해 사죄의사를 밝히기로 했다. 독일, 112년 전 나미비아 학살 ‘공식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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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독일 연방 시절 개인 차원에서 해외 식민지 개발에 대한 주장이 있긴 했다. 1839년에는 뉴질랜드 동쪽 채텀 제도를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영국이 이미 차지해버린 탓에 실패했고, 1842년에는 텍사스에 7,400명의 독일인들을 이주시켜 식민화하려 했지만 절반이 사망, 공급품 부족으로 처참히 실패하고 미국에 땅을 내주었다. 다만 독일 기업들의 교역 범위는 꾸준히 넓어져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사모아 제도, 뉴기니, 카메룬, 잔지바르 일대까지 계속 확장됐다. [2] 독일계 국가로서 처음은 아니다. 그보다 2년 앞서 185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리깃 '노바라'를 보내 인도양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조사해봤기 때문. [3] 아달베르트 왕자가 몰래 코스타리카에 제 허락도 없이 해군기지 건설을 논의하자 뒤늦게 전해들은 뒤 계획을 폐기시켰고 네덜란드가 네덜란드 영토였던 퀴라소에 독일 해군 기지를 지을 것을 제안하자 이 역시 거절했다. [4] 실제로 그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베를린 회담에서 그 레오폴드 2세를 포함한 타 열강 대표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분할하는 제국주의적 계획을 주도한 이 또한 비스마르크였다. 즉, 비스마르크의 반제국주의 정책은 '독일 제국의 존속과 독일 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안정'이 보장될 때에만 유효했다. 비스마르크는 레오폴드 2세에게 콩고를 넘겨주는 것을 열강들이 인정함으로써 유럽 열강 간의 평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비스마르크의 '반제국주의'는 어디까지나 유럽 밖에만 해당되었다. 독일 제국은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 즉 서프로이센 포젠에서는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독일인 이주 장려, 폴란드인의 독일화를 시도하는 등 매우 정직한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고, 이것은 비스마르크도 빈틈없이 실행했다. 1860년대 초 비스마르크는 '나도 폴란드를 동정하긴 하는데, 걔네들이 죽어야 독일인이 산다'는 식으로 말했다. 출처는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p.36~38.( 미어샤이머 著, 이춘근 譯) [5] 독일의 태평양 보호령 포함. 북솔로몬 제도, 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 북마리아나 제도 등이 포함됐다. [6] 단, 독일이 혼자서 버틴 건 아니고, 배상금을 물면 한국이나 이스라엘, 아일랜드, 체코처럼 제국주의 시대가 종식된 뒤 독립한 국가들 혹은 스위스 북유럽 제3세계 식민지 지배 자체를 할 기회가 없던 국가들을 제외한 서방 선진국들이 한꺼번에 배상금을 무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문제 때문에 제1세계의 구 제국주의 국가들 대부분이 배상금 지불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