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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대운하 | |
중국어 | 大运河 | ||
영어 | The Grand Canal | ||
프랑스어 | Le Grand Canal | ||
국가·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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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443 | ||
등재연도 | 2012년[1] | ||
등재기준 | (ⅰ)[2], (ⅲ)[3], (ⅳ)[4], (ⅵ)[5]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colcolor=black>명칭 | <colcolor=black> 한국어 | <colcolor=black> 대운하 | |
간체 | 大运河 | ||
번체 | 大運河 | ||
영어 | The Grand Canal | ||
분류 |
고건축 (古建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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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춘추시대 ~ 중화인민공화국 | ||
일련번호 |
7-1973-3-009[6] |
||
주소 | 중국 베이징시, 톈진시, 허베이성,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장쑤성, 저장성 | ||
등재 | 2013년 | ||
차수 | 제7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없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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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운하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운하다. 단기간 내에 건설된 운하가 아닌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낸 역사적 과업이다.
2. 역사
2.1. 수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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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대 약 400여년간의 중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말미암아 경제문화적으로 남북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문제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문제로 인해 계획에 그쳤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가 대운하를 완성시킨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남북조시대 등의 분열기로 인해 남북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대사업을 추진한 데는 수나라 도성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 도성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해서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7]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였던 강남에서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서 효율이 나빠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소한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게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갈아넣은 게 문제였다.
거기다가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주왕의 재림', '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다'면서 수양제의 악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나라 이후 개발이 덜 된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부려먹었냐면,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던 터라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2.2. 당나라 ~ 원나라 시기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 황하/ 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왜냐하면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2,700km라는 긴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뤄양까지 밖에 가지 않았던지라, 뤄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그래서 뤄양 함가창부터 섬주의 태원창까지 300리를 육상을 통해 물자를 옮겨야 했는데, 물자 이송에 필요한 양도 너무나 엄청나서 이동시 운송량의 반이 소모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 당시기엔 대운하 개통 이후 현종 시기까지 축량천자라 까이면서 뤄양을 장안 못지 않게 중시해 직접 황실과 조정이 뤄양으로 행행을 하던가 양제나 측천무후는 아예 수도를 뤄양으로 옮길 정도였다. 결국 현종 시기인 734년의 뤄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가 된 배효경이 삼문협 동쪽엔 집진창, 서쪽엔 삼문창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길로만 육상 운송으로 떼우게 했다. 이로 인해 육운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주전충이 당을 멸망시키고 난 이후 세운 후량부터 5대 왕조와 송나라, 금나라까지 변량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훗날 금나라가 북송을 몰아내어 송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송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해서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고, 그 역할은 원나라 때는 바닷길이, 명나라 땐 새로 개발된 대운하[8]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양제의 대운하는 끊긴 상태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던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9]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베이징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2.3. 명나라 ~ 청나라 시기
오늘날의 대운하 이른바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라고 불리는 것은 명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양제의 대운하가 낙양을 중심으로 두 개의 대각선을 교차시킨 형태였다면, 명대의 대운하는 정말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직선으로 뚫은 것이다.이 운하는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및 전당강(戰䕋江)의 주요 5대 수계를 연결하였으며, 전체 운하 길이는 약 1,794㎞에 달한다. 그리고 수양제의 대운하와는 달리 각 수계의 지류와 호수를 적절하게 연결해서 공사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량의 조절이 용이하게 했다.
이 운하는 실제로는 원대에 만든 것으로서, 원나라는 베이징에 수도를 정했기 때문에 베이징까지 식량을 운반해야 했다. 하지만 원대에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에 운하가 자주 막혔다. 그래서 운하 자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바다로 식량을 옮기는 해운을 병행해야만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명대에서였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기로 한 다음 대운하를 보수, 증설했는데 이 때 비로소 오늘날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명대부터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대운하는 대동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명대에 매년 강남에서 베이징으로 실어나르는 식량의 규모가 원대의 운송량의 40배에 가까웠다. 훗날 들어선 청나라에서도 경항대운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문제가 생겼다. 700년 간 태산 이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태산 이북으로 흐르게 된 것. 이 여파로 경항대운하의 물자수송 능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2.4. 현대
이 운하는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그 기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현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육상 수송능력이 뛰어난 철도와 자동차, 비행기 등의 다른 운송수단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명, 청대에 비해선 그 비중이 떨어진다. 그러나 수도 베이징에서 역시 해안 대도시인 항저우 뿐만 아니라 중간에 빠지면 사실상의 경제수도인 상하이로까지 갈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대규모 화물 운송은 여전히 성황리에 이용되고 있다.대운하 복원은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인 1922년부터 있었으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문제로 중단되었다가 2022년 1750km에 달하는 전 구간이 복원되었다. # 다만 황허 이북 일부 구간의 폭이 좁아 고대와 같은 베이징∼항저우 수상 운송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3. 건설효과
수나라의 멸망 이후 종종 유학자들이 대운하 건설과 같이 무리한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망국으로 이르게 한다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대체로 '자급자족의 향촌자치 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서 통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치통감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유학자에게만 통용되었는지에는 의문점이 존재한다. 수나라의 대운하 공사에 대한 비판은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비판이지 대운하 자체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서술하지 않는다.이는 만리장성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다. 당시 수나라는 대운하만 공사한 것이 아니라, 궁전 건설까지 다양한 토목공사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여러 대공사의 진행 때문에 국가적으로 무리가 왔던 것은 사실이다. 토목공사는 기계와 기술의 발달이 미비했던 당시 오로지 인력으로만 하는데, 그만큼 인력을 동원한다면 농사짓는 인력이 부족하게 되어 식량산출입이 줄고 이는 국가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등장하는데 있어서 잉여농산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에 이러한 무리한 토목공사를 비판했던 것은 단순히 유학자의 입장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즉, 뉴딜정책 같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기엔 당시 잉여생산물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는 인부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준 시대도 아니었다. 또한 대운하의 건설이 실질적인 효과를 낸 것은 당나라 때에 들어서였다. 심지어 당나라에서도 그렇게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당시 선박기술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데 있다. 운하만 뚫어 놓는다면 물류통상면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박기술 또한 발전해야 한다. 특히 대운하의 경우 중국의 내륙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바람 변화가 심하다. 그러다보니 선박이 예정일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역풍에 의해 운하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가 있었기에 단순히 운하만 판다고 물류수송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도 운하는 단순히 세수로 및 식량 운반선의 역할을 했을 뿐 이를 통해 경제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는 정치적 이유에서라도 대규모 무역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으며, 그만큼 잉여생산물이 넘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운하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운하의 건설은 분명 물류통상의 혁명 기반을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기차를 발명하기 전에 운하는 그야말로 대량수송의 핵심적인 기반이었다. 대운하가 없었다면 강북과 강남의 경제권이 통합되거나 중국의 산물이 이동하는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단순히 대운하만으로 물류통상의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대운하라는 인프라가 설치되어 이후 강남의 발전이 중국 전반에 퍼질 수 있는 물류순환의 기반 역할을 하였고, 이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을 견인하였다는 점은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교류의 발전으로 인해 황하와 장강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북중국과 남중국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래서 대운하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던 송나라 이후에는 하나의 중국문화인 한족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수호전이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10]
대운하의 건설로 인해 중국이 해양 진출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주장도 있다. 강남의 조세와 식량을 정치 중심지인 북경으로 옮기는 데 바다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바다는 왜구나 양놈, 반란군 잔당들이 말썽이나 부리는 무쓸모한, 마치 만리장성 너머의 사막과 같은 공간으로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실제로 대운하의 완성 이후 명나라는 해금령, 청나라는 천계령 등 해양을 통한 경제 행위를 일절 금지하는 칙령들을 내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운영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편 전쟁에서도 청나라가 최종적으로 항복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는 해안 봉쇄와 항구 점령이 아니라 대운하의 기점인 난징이 함락된 것이었다.
[1]
2016년 수정
[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
[6]
6차로 경항대운하만 지정되었다가 7차에서 대운하 전체를 통합하여 재지정, 6차의 일련번호는 영구결번으로 처리하였다.
[7]
낙양 등 근처의 강북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충당은 할 수 있었으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식량공급에는 한계가 명확했다고 한다.
[8]
갑문을 이용해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산둥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새로운 운하가 생겼다. 명대의 새로운 대운하는 그러나 청나라 때인 19세기 초반에 황하의 유로 변경, 즉 700년 넘게 산둥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가 다시 산둥 북쪽으로 유로를 변경한 여파에 의해 몰락했다.
[9]
한가지 약점은 있었는데 바로 식량문제다. 당나라의 화북지역은 땅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을 능가할 정도로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강남으로부터 이어지는 물길이 끊기면 도성의 식량값이 폭등해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건 중국의 사극이나 드라마에도 반영되어 물길에 문제가 생겨서 강남의 세곡선이 안오면 당나라 도성 백성들이 배고파서 괴로워하는 묘사가 종종 나온다. 북송 시대까지도 곡식을 운반하는 배가 강남에서 물길을 따라 도성까지 운행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고 이때문에 북송시대까지 이런 운반선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고 부정을 저지르는 관료들도 있었다. 북송시대에는 일부 관리가 좀 심하게 헤쳐먹어서 강남의 일부지역에서 농민반란까지 일어난 적도 있다. 당연히 진상을 조사하러온 중앙의 고관은 그 관료를 도끼눈으로 쏘아보며 아주 대단히 수고가 많았다며 각오는 해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10]
물론 한족문화는 오래되었으나, 하나의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송나라 시대에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한족이라는 정체성에는 대운하뿐 아니라 외세의 침공이라는 변수도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