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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17대 대공 스비트리가일라 Švitrigai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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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비트리가일라(Švitrigaila) |
출생 |
1370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 빌뉴스 |
사망 |
1452년
2월 10일 (82세) 볼히니아 루츠크 |
재위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
1430년 10월 ~ 1432년 8월 31일 | |
배우자 | 트베리의 안나 (1430년에서 1431년 사이에 결혼) |
자녀 | 아들 1명 |
아버지 | 알기르다스 |
어머니 | 트베리의 울리아나 |
형제 | 동복 형제 13명, 이복 형제 8명 |
종교 | 발트 신화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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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7대 대공.2. 생애
리투아니아 대공국 12대 대공 알기르다스와 트베리 공작 알렉산드르 1세의 딸인 울리아나의 아들이다. 학계에서는 출새년도는 1355년부터 1376년까지 다양하게 제시했는데, 대체로 1370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러시아 출신의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어렸을 때 정교회로 세례를 받고 '레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에 대한 당대 기록의 최초의 언급은 1386년 2월 동복 형제이며 리투아니아 13, 15대 대공 요가일라가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기 위해 크라쿠프로 갈 때 함께 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요가일라 등 다른 형제 및 리투아니아 귀족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교 세례명으로 '볼레스와프'를 받았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로서 폴란드 국왕에 등극한 요가일라와 사촌인 비타우타스가 리투아니아의 지배권을 놓고 1389년부터 1392년까지 전쟁을 벌였을 때 요가일라를 도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별다른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16~17세기에 기록된 <비호베츠 연대기>에 따르면, 요가일라는 표도르 베스나라는 뛰어난 매 사냥꾼을 몹시 총애했다. 그러던 중 1392년 어머니인 트베리의 울리아나가 사망하자, 요가일라는 울리아나가 다스리던 비테스크 공국을 폐지하고 표도르에게 총독의 자격으로 그 땅을 통치하게 했다. 이에 스비트리가일라는 게디미나스 왕조의 일원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닌 자가 어머니의 영지를 가로채고 자신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에 분노해 1393년 비테스크를 점령하고 표도르를 죽였다고 한다. 반면 16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드우고시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고, 요가일라에 의해 리투아니아의 총독으로 선임된 비타우타스에게 질투를 느끼고 반란을 꾀했다고 주장했다.
스비트리가일라가 일개 매 사냥꾼을 어머니가 다스리던 영지의 총독이 된 것에 반감을 품었는지, 아니면 비타우타스가 리투아니아 총독이 된 것에 질투심을 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두루츠크와 오르샤를 무단으로 점령했다가 비타우타스의 반격으로 도로 밀려난 뒤 비테스크에서 포위된 끝에 항복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비타우타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뒤 크라쿠프로 보내졌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를 용서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조용히 지내던 그는 1394년 6월 비밀리에 실레시아로 망명해 치에신 공작 프셰미슬라우스 1세 노자크의 궁정에 머물렀다가, 다시 헝가리 왕국으로 건너가 헝가리 국왕이자 독일왕인 지기스문트의 궁정에 피신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1398년 튜튼 기사단에게 자신이 유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튜튼 기사단은 그해 10월에 사모기티아의 발트해 연안 일대를 비타우타스로부터 양도받고, 자신들이 폴란드의 공격을 받을 경우 비타우타스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비타우타스가 킵차크 칸국과 전쟁을 벌이는 걸 도와주겠다는 살리나스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노브고로드 시에비에르스키, 콜로미아, 동부 포돌리아 일부를 영지로 수여했으며, 크라쿠프 제염소의 수입 일부를 연금으로 받게 했다. 이후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그는 1399년 보르스클라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과 맞붙은 비타우타스와 함께 했고, 비타우타스가 참패 후 도주할 때도 함께 했다.
1400년에 열린 브레스트 의회에서 보르스클라 전투에서 사망한 멜슈틴의 스피테크가 보유하고 있던 서부 포돌리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1401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비타우타스를 리투아티아 대공으로 인정하고, 그 대신 비타우타스 사후에는 자신의 자식들이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물려받는다는 내용의 라돔 협약을 선포하자, 스비트리가일라는 여기에 반감을 품고 1402년 1월 포돌리아를 버리고 튜튼 기사단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말보르크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언하고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프스코프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의 지원을 받아낸 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빌뉴스를 위협했지만,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은 비타우타스의 반격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1402년 7월 기사단이 재차 원정을 벌였지만 비타우타스를 물리치지 못했다. 1403년 2월, 튜튼 기사단과 스비트리가일라는 공세를 재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교황청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공격을 금지하는 교서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로 인해 휴전이 성립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1404년 스비트리가일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그는 재차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귀순해 배신을 저지른 것을 또다시 용서받고, 스타로두브, 브란스크(푸티올 시 제외), 체르니히프, 노브고로드 시에비에르스키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1404년 비타우타스의 스몰렌스크 원정에 참여했으며, 1406년부터 1408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바실리 1세와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리투아니아 대공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튜튼 기사단 및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은밀히 접촉했으며, 바실리 1세와도 내통했다.
1408년 7월, 비타우타스가 바실리 1세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체포령을 내리자, 스비트리가일라는 브란스크, 스타로두브를 불태운 뒤 추종자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바실리 1세는 스비트리가일라를 유리예프 , 콜롬나 , 페레야슬라프 , 르제프 및 블라디미르-온-클라즈마의 절반을 다스릴 권한을 수여한 뒤,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 대공에 앉히기 위한 군사 원정을 단행했다. 그 해 9월, 모스크바군과 리투아니아군은 오카 강의 지류인 우그라 강 유역에서 대면했다. 하지만 양자 모두 대규모 전투를 꺼려 소규모 접전을 몇 차례 치르다가 양측의 영역을 상호 존중하기로 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이때 바실리 1세는 스비트리가일라를 자신의 영역에서 추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즉시 따르지 않았다.
1408년 12월, 스비트리가일라는 무르자 에디게이가 지휘하는 타타르군의 침략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세르푸코프를 불태운 뒤 리투아니아로 돌아가 비타우타스에게 복종을 서약하고 용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은밀히 튜튼 기사단과 접촉해 비타우타스를 타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1409년 10월, 그는 튜튼 기사단과 비밀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며칠 후에 누설되었고, 비타우타스는 곧바로 그를 체포한 뒤 처형하려 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의 반대에 직면하자 크레메네츠 성에 가두고 스비트리가일라의 측근이었던 2명의 러시아 귀족을 처형했다. 그후 9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은 여전히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고, 그를 감옥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크리메네츠 성의 수비대장 콘라트 프란켄부르크는 프로이센 출신으로, 스비트리가일라를 정중하게 대했고 다양한 손님이 그를 방문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스비트리가일라의 최측근이었던 다닐 페도로비치 오스트로즈스키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2명의 하인을 크레메네츠 성에서 복무하도록 했다. 1418년 3월, 다닐 페도로비치 오스트로즈스키는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핀스키와 함께 사병들을 이끌고 성문에 비밀리에 접근했고, 사전에 심어뒀던 두 하인이 성문을 열고 다리를 내렸다. 콘라트 프란켄부르크는 침입자에 맞서 싸우다가 살해되었고, 스비트리가일라는 함께 갇혀 있던 안드레이 스몰렌스키를 비롯한 2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온 뒤 루츠크를 점령했다가 토벌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리투아니아를 탈출해 왈라키아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지기스문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1419년 5월 말, 지기스문트는 케주마로크에서 브와디스와프 2세와 회담을 가지면서 스비트리가일라와 화해하도록 권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배신을 일삼는 그에게 신물이 난 비타우타스가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420년 여름, 스비트리가일라가 사절을 보내 용서를 청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에게 자신이 보증할 테니 그를 용서해달라고 권고했다. 결국 비타우타스는 그를 용서하고 유산을 돌려주기로 했다. 1420년 8월 10일 비타우타스와 접견한 스비트리가일라는 체르니고프, 트루브체프스크, 브랸스크,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등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1422년, 스비트리가일라는 튜튼 기사단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이제 그들의 적이며 비타우타스와 브와디스와프 2세의 충실한 하인이자 동맹자라고 밝혔다. 또한 1428년 비타우타스의 노브고로드 공국에 대한 원정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1430년 10월 27일, 비타우타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당시 비타우타스에게는 외동딸이며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의 아내가 된 조피아만 있었으며, 바실리 1세와 조피아 사이의 외동아들 바실리 2세는 정교회 신자라서 가톨릭 국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이끌 수는 없었다. 따라서 비타우타스의 형제이자 법적 상속인인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사촌인 스비트리가일라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논의 끝에 스비트리가일라를 새로운 대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대기들의 설명이 상충된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2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고위 성직자 및 귀족들과 상의하지 않고 외교관인 얀 메지크를 리투아니아로 보내, 자신의 사촌인 지기만타스 대신 동복 형제인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임한다고 전하게 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아닌 스비트리가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폴란드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반면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스비트리가일라는 비타우타스 사후 스비트리가일라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빌뉴스와 트라카이 성을 점거한 뒤 귀족들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을 대공으로 받들게 했다고 한다.
스비트리가일라는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 왕국 의 승인 없이는 새로운 대공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1413년 호로드워 합의를 위반했다며 불만을 제기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1430년 11월 7일에 스비트리가일라의 선출을 승인했다. 그러나 1430년 가을, 폴란드 귀족 그리츠코 케르디비치(Grytsko Kerdeevich), 테오도리크 부차츠키(Theodoric Buchatsky), 미하일 부차츠키(Michal Buchatsky) 등이 카메네츠 성을 무단으로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수비대를 사로잡은 뒤 포돌리아 일대의 모든 요새를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총독을 추방한 사건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여세를 이어가 볼히니아를 첨령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스비트리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측근들을 가택 연금했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이제는 브와디스와프 2세 본인이 그리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포돌리아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계속 감옥에 갇혀 있게 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31년 8월 15일에 의회를 설립해 폴란드 귀족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영토를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돌려주기로 결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카메네츠 성에 머물던 폴란드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 당장 포돌리아의 모든 도시와 성을 리투아니아 총독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고, 스비트리가일라는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당장 형제를 석방하라는 압력을 받고 석방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1431년 2월 즈비그뉴 홀샨스키의 지도하에 산도미에시에 집결한 뒤 왕이 협박을 받고 그런 약속을 했으니 원천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브와디스와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라고 요구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이를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비타우타스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던 리투아니아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튜튼 기사단, 몰다비아, 킵차크 칸국 등 주변국들에게도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를 협공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431년 6월, 그는 튜튼 기사단 사절단과 접견한 뒤 크라이스트메멜 협약에 서명해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몰도바 공작 알렉산데르를 선동해 폴란드 남동쪽 국경지대를 습격하게 했다.
1431년 6월 25일, 폴란드군이 볼히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볼히니아, 호로드워, 볼로디미르-볼린스키 및 즈브라 일부를 점령하고 루츠크 인근에서 스비트리가일라의 군대를 격파한 뒤 스비트리가일라를 루츠크 성에 가두고 포위 공격했다. 한편, 튜튼 기사단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침공을 개시해 드브진을 황폐화하고 니에자와를 점령한 뒤 쿠야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431년 9월 13일 당브키 전투에서 패배한 뒤 본국으로 퇴각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한동안 버티다가 8월 20일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8월 26일에 양자간의 합의가 이뤄지면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스비트리가일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포섭해 그에게 대항하게 만들려 했다.
1432년 4월, 스비트리가일라는 폴란드 측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해줄 테니,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어달라.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그를 회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음모를 밀어붙였다. 1432년 8월 31일 밤,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추종자들이 아시미아니에 머물고 있던 스비트리가일라 가족을 습격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그의 임신한 아내인 트베리의 안나가 구금되는 동안 폴로츠크로 탈출했다. 이후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이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지기만타스는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폴란드에 양도하겠다고 밝혔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 귀족 모두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그후 리투아니아는 지기만타스를 지지하는 리투아니아 본토,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등 서부와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지하는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등 동부로 양분되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지기만타스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칸국의 셰이드 마흐메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세이드는 자국의 영역을 갉아먹던 리투아니아를 우방국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1432년 12월 8일, 지기만타스의 군대와 스비트리가일라-세이드의 연합군이 야시미아니에서 격돌했다. 양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얀 드우고시에 다르면, 스비트리가일라의 병력 중 10,000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기만타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1433년 7월과 8월, 스비트리가일라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리다, 크레바, 에이시슈케스를 습격하고 빌뉴스, 트라카이, 카우나스 교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433년 6월, 폴란드는 튜튼 기사단이 스비트리가일라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통해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스파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후스파는 4개월 동안 튜튼 기사단의 영역인 노이마르크, 포메라니아, 서부 프로이센을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그단스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후 발트해에 도달한 뒤 병에 바닷물을 채워서 자신들의 여정이 성공했음을 자축했다. 이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433년 12월 15일 웽치차에서 폴란드와 기사단간의 1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스비트리가일라에 대한 지원을 일체 중단했다.
1434년 6월 1일, 리투아니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루테니아에 가던 중 걸린 감기가 악화되던 브와디스와프 2세가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에서 사망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일전에 맺은 합의를 파기하고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원해 리투아니아에 대한 6번의 습격전을 벌였다. 1435년, 스비트리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출신의 루테니아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용병대, 킵차크 칸국 출신의 최소 500명의 타타르인, 그리고 몇명의 튜튼 기사를 포함해 총 11,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중심부의 빌뉴스와 트라카이를 향해 진격했다. 지기만타스는 이에 맞서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일대에서 동원한 리투아니아군 5,000명을 지휘했고, 야쿠브 코빌란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4,000명이 지기만타스에 가세했다.
양군은 1435년 9월 1일 빌코미에시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지점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스비트리가일라는 전군이 궤멸되는 참패를 입고 3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폴로츠크로 달아났다. 이때 심각한 피해를 입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튜튼 기사단과 함께 1435년 12월 31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더 이상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계속 항전했지만 지기만타스의 공세에 꾸준히 밀리다가 1437년 9월 폴란드 측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이 죽을 때까지 키예프와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폴란드 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지만, 지기만타스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38년, 스비트리가일라는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왈라키아로 망명했다. 그 후 2년간 그곳에 머물던 그는 1440년 지기만타스가 암살되자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돌아왔다. 당시 70세가 넘었던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에 브와디스와프 2세의 둘째 아들이며 폴란드 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인 카지미에시 4세가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1452년 8월 31일 루츠크에서 사망하면서 포돌리아와 볼히니아의 모든 유산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돌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전에 트베리 공작 이반의 딸인 안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그 아들이 어렸을 때 사망하는 바람에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