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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헝가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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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헝가리 왕국
Keleti Magyar Királyság
오스만 제국의 속국
파일:Coa_Hungary_Country_History_John_I_of_Hungary_(Szapolyai)_(1526-1540).svg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Eastern_Hungary_1550.jpg
1526~1570년
위치 동유럽
수도 부더 (1526~1541)
리퍼 (1541~1542)[1]
줄러페헤르바르 (1542~1570)[2]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언어 헝가리어, 라틴어
성립 이전 1526년까지의 헝가리 왕국
멸망 이후 에르데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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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헝가리 왕국 1526년 헝가리 왕국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여 삼분할된 때부터 1570년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하기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2. 역사

2.1. 서포여이 야노시

1490년,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야겔론스키는 자기가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로 등극하는 걸 독일왕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용인받는 대가로, 자기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으면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유럽 최강의 가문으로 손꼽히는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튀르크 부대가 헝가리를 연이어 침략해 약탈하는 와중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1505년 10월, 왕실 판관이자 궁정백 베르보치 이슈트반(Werbőczy István 1458~1541)은 라코시 평원에서 기사단 의회를 소집한 뒤 '헝가리 왕국이 최근에 재난을 겪은 이유는 튀르크인보다 헝가리인을 더욱 잔인하게 억압하고 영토 상실을 막지 못한 외국 출신의 왕 때문이며, 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가 합법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남성 상속인 없이 사망할 경우 외국 통치자를 더 이상 선출하지 않고 "헝가리 태생"만 선출한다고 규정하는 라코시 법령(Rákosi végzés)을 발표했다. 그러나 라코시 법령은 울라슬로 2세 및 헝가리 의회의 인가를 받지 못했기에 정식 칙령이 되지 못했다.

1506년 7월 1일, 울라슬로 2세는 아들 러요시 2세를 낳았다. 이리하여 모든 분쟁이 종식되는 듯 했지만, 1526년 8월 29일에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 모하치 전투를 벌였다가 귀족 28명, 헝가리 추기경 및 주교 7명 등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총독이었으며, 헝가리 국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서포여이 야노시는 군대를 소집한 뒤 모하치를 향해 출발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헝가리 각지를 파괴하는 오스만 제국군에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일각에서는 러요시 2세가 전사하기를 바라고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형제였던 서포여이 죄르지도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걸 볼 때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 후 서포여이 야노시는 토커이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추종자들을 이끌고 11월 1일 부다에 입성했다. 11월 10일 세케슈페헤르바르 의회는 그를 왕으로 선출했고, 11월 11일 헝가리 국왕 대관식 니트러의 주교 포드머니츠키 이슈트반에 의해 거행되었다. 헝가리 법에 따르면, 왕이 부재한 경우 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는 이는 궁정백이었다. 그러나 당시 궁정백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을 배제한 채 의회를 소집하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 달 후, 바토리 이슈트반은 헝가리 대귀족 13명과 헝가리 대주교 및 추기경들을 포조니로 소집하여 의회를 개최했다. 그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궁정백 없이 왕을 선출하는 의회를 소집한 뒤 즉위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니 적법한 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전임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체결한 협약[3]에 따라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의회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1526년 12월 16일 포조니에서 열린 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에 맞서 1505년 10월 외국 출신 인물은 헝가리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라코시 법령이 반포되었기에 자신이 유일한 헝가리 국왕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하급 귀족 대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했고, 헝가리 대귀족들은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방대한 사적 재산, 하급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토대로 헝가리 전역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한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유럽 각지로 파견해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오직 합스부르크 가문에 악감정을 품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랑수아 1세만 호응했다. 1527년 초, 세르비아인 용병대장 요반 네다드(Јован Ненад 1492~1527)가 이끄는 용병대 600명이 남부 판노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세르비아인, 블라흐인 등을 끌어모으면서 병력 규모를 15,000명으로 급속도로 증강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요반 네다드의 군세를 과소평가하여 차키 라슬로에게 기사 300명을 보내 토벌하게 했지만, 차키 라슬로는 그해 4월 초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생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이후 요반 네다드의 위세는 절정에 이르렀고, 본인을 황제라고 칭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다시 에르데이 보이보드인 페레니 페테르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지만, 4월 말 티서강 유역의 치게르쇨뢰시(Csigérszőllős) 인근에서 패배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에르데이와 상 헝가리의 병력을 대거 파견했고, 1527년 7월 25일 세게드 인근 소드펄버(Szódfalva) 전투에서 반란군 8,0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요반 네다드는 페르디난트 1세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토르뇨시 마을에서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수급은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전달되었다.

서포여이 야노시가 요반 네다드의 반란 수습에 힘을 쏟던 1527년 7월,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 용병대를 헝가리로 파견해 부다를 순조롭게 접수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반란을 진압한 후 즉시 합스부르크군을 격퇴하려 했지만, 9월 27일 타르칼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 후 페르디난트 1세는 1527년 11월 3일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서 헝가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528년, 서포여이 야노시는 합스부르크군의 공세를 피해 폴란드 왕국으로 피신한 뒤 폴란드 대원수 얀 아모르 타르노프스키(Jan Tarnowski 1488~1561)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군주들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기댈 곳은 오스만 제국 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1529년 제로모시 라스키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오스만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봉신이 되어서 공물을 매년 바치라고 권고했다. 서포여이 야노시가 이에 동의하자, 쉴레이만 1세는 1529년 5월 10일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출진했고, 8월 18일 모하치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즉각 오스만 제국군 숙영지로 가서 쉴레이만 1세에게 복종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은 9월 3일 부더를 포위해 며칠 만에 공략했고, 여세를 이어가 헝가리 전역을 수복하고 합스부르크군을 축출했다. 쉴레이만 1세는 내친 김에 제1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간의 전쟁이 쭉 이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는 봉신으로서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 참여했다.

1538년 2월 24일, 바러드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왕국의 2/3에 달하는 동쪽 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통치를 받기로 했고,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서쪽 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또한 당시 아들이 없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했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포여이 야노시가 차후에 적법한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헝가리 왕관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 대신 금전적 보상, 왕자의 칭호 및 스피슈(Spiš)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기로 했다. 이 협약은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기에, 양자는 비밀을 엄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포여이 야노시는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를 원했고, 1539년 3월 2일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딸인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결혼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디난트 1세는 쉴레이만 1세에게 바러드 조약 내용을 알리기 위해 개인 고문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를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쉴레이만 1세가 바러드 조약의 내용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원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1540년 7월 7일,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자벨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낳았다. 그러나 열흘 후인 7월 17일에 심장마비에 걸려 급사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재무관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바러드 조약을 따르지 말고 아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운 뒤 섭정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2.2.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1차)

프라테르 죄르지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한 직후 부더로 서둘러 가서 국정을 장악했다. 이후 1540년 9월 13일 의회를 소집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의 유언장을 낭독했고, 헝가리 의회는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였던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또한 의회는 어머니 이자벨라, 프라테르 죄르지, 그리고 2명의 헝가리 대귀족 페트로비치 페테르, 퇴레 발린트를 유아 군주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사절이 부더에 도착한 뒤 바러드 조약을 준수하여 서포여이 야노시의 영토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고, 이자벨라의 어린 자식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군주로 앉혀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이자벨라 등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한편,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 헝가리에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레니 페테르와 크로아티아인 컬로처 대주교 프라뇨 프랑코판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고, 에르데이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 역시 페르디난트 1세 지지를 천명하면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지자들을 대거 축출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사절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는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바러드 조약 내용을 알리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전역을 차지하는 걸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라스키를 체포했다.

1540년 10월,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제국군이 헝가리 전역을 휩쓸자 프라테르 죄르지와 이자벨라는 쉴레이만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그해 6월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진군했다. 에르데이 의회는 오스만 제국군의 압력에 굴복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1년 8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 퇴레 발린트를 포함한 헝가리 대귀족 6명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함께 파디샤의 진영으로 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구금되었고, 예니체리가 부더에 입성했다. 쉴레이만 1세는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위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하고,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오스만 헝가리라는 이름의 직할지로 삼고 티서강 동쪽의 영토만 매년 10,000 플로린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1541년 9월 5일,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어린 왕과 함께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 중심지인 리퍼(Lippa 현 루마니아 리포바)로 이동했다. 그해 10월 18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추종자들은 쉴레이만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서약했다.

1541년 12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현 루마니아 길라우)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사절인 카스파르 세레디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페르디난트 1세가 부더를 탈환할 경우 헝가리의 주권이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후 프라테르 죄르지는 동헝가리 왕국에 속한 귀족들에게 페르디난트 1세와 협력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에르데이 의회는 1542년 12월 20일 줄러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 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1543년 2월, 에르데이 의회는 이자벨라가 프라테르 죄르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후에도 국가 행정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이자벨라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1543년 6월, 루터교회를 받아들인 크론슈타트의 작센인 성직자들이 줄러페헤르바르로 찾아와 가톨릭 사제들과 토론을 벌였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종교재판에 세우고 싶어했지만,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1544년 4월, 투르다 의회는 여행자들이 방문한 정착지의 종교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1545년 데브레첸 의회를 주재해 누구도 자신의 소유지에 루터교인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도록 했고, 같은 해 투르다 의회를 재소집해 "아무도 어떤 종교적 혁신도 도입해서는 안 되며, 사제와 수도자의 직업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하게 했다. 헝가리 종교개혁가 헬터이 가슈파르가 성경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하자, 프라테르 죄르지는 성경은 오직 라틴어만 쓰여야 한다고 못박고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교황청은 그런 그의 노고를 인정해 1551년 10월 12일 그를 헝가리 추기경으로 승격했고, 동시에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선임했다.

1544년 8월 에르데이 의회에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대법원장이 되었고, 이전에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던 5개 백작령(베레그, 샤볼치, 서트마르, 웅그바르, 젬플렌)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6년 초, 오스만 제국이 베체와 베치스케레그 요새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여기에 154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체결한 에디르데 평화 협정에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 일부를 빼앗을 의도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1548년 페르디난트 1세와 헝가리 통합에 대해 협상을 재개했다. 1549년 9월 8일, 니르바토르에서 양자간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르디난트 1세가 보유한 보헤미아 왕국 산하의 오폴리와 라치보르시(현 폴란드 라치부시) 공국을 받고 10만 플로린을 별도로 받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들의 퇴위를 거부하고 줄러페헤르바르에 남았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자신과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로 하고,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지배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550년 9월,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이자벨라를 포위한 뒤 강한 압력을 가한 끝에 1550년 10월 13일에 항복하고 평화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뒤이어 1550년 12월 몰다비아 공국과 튀르크 분견대의 헝가리 침공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자마자 서둘러 의회를 소집한 뒤, 프라테르 죄르지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아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돌아와 군대를 소집하였다. 의회는 곧 해산되었고, 이자벨라는 강한 압력에 시달렸다. 1551년 5월, 이자벨라는 추종자인 파토치 페렌츠 등에게 군대를 일으켜서 자신을 구출하게 했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를 추종하는 군대가 이들을 물리쳤다. 결국 1551년 7월 19일, 이자벨라는 강요에 못 이겨 아들의 왕위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고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 및 140,000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이틀 후, 이자벨라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페르디난트 1세가 선임한 헝가리 총독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에게 넘겼다. 에르데이 의회는 7월 26일 그들의 퇴위를 인정하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는 에르데이를 떠나 커셔에 정착했고, 1552년 3월 오폴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좋지 못한 사정 탓에 수년간 외가인 크라쿠프, 바르샤바, 사노크 등 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2.3.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가 떠난 뒤, 페르디난트 1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가 예르데이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통치권을 맡기기로 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가 에르데이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 그는 루멜리아의 베글러 베그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군대를 소집해 페르디난트 1세를 에르데이에서 축출하라고 명령했다. 소콜루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크림 칸국, 비딘과 니코폴리스 방면 오스만군을 규합해 50,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켰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연간 공물을 오스만 제국에 보냈고, 여러 편지를 보내 예르데이는 여전히 쉴레이만 1세를 주권자로 받들 것이며, 독일군은 반란을 일으킨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소콜루는 일단 쉴레이만 1세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국경지대의 몇 개 성채를 공략한 뒤 후방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리파는 별도로 움직이던 오스만 분견대에게 손쉽게 항복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후, 카스텔도는 황제군 및 예르데이군과 함께 오스만 분견대 수천 명이 지키고 있던 리파를 포위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러다가 오스만 분견대가 몰살당하면 쉴레이만 1세의 분노를 사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오스만 분견대에게 항복하는 대가로 신변의 자유를 보장한 채 오스만 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스텔도는 페르디난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리파를 무력으로 공략하고 오스만군을 학살하고 싶었지만, 다수의 인사들이 죄르지의 주장을 찬성했기에 결국 그의 뜻대로 이뤄졌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여기에 더해 물러나는 오스만군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했다.

이에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예르데이를 온전히 점령하도록 한 뒤 자기가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예르데이를 통치하려는 야심을 품은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 의심은 프라테르 죄르지가 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하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의 지역이 아닌 티살툴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라고 권고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는 죄르지가 티살툴 마을에 머무는 자신과 황제군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겼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관해 보고했지만, 평소처럼 자긴의 계획과 행동을 카스텔도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카스텔도가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는 걸 막지 못했다.

1551년 12월 16일, 카스텔도는 알빈크 성에 있던 프라테르 죄르지와 대면했다. 그는 프라테르 죄르지에게 오스만 분견대에게 음식과 말을 공급한 연유를 캐물었지만, 죄르지는 이번에도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두 사람은 이로 인해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카스텔도는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자리를 박차고 떠난 뒤, 카스텔도는 무장병들을 성으로 인도했다. 12월 17일 새벽 1시 또는 2시경, 카스텔도의 비서인 마르칸토니오 페라리, 스포르자 팔라비치니 대위, 그리고 몇몇 무장병들이 프라테르 죄르지의 방에 들이닥쳐서 그를 칼로 찌르고 소총으로 쏴 죽였다. 그의 귀 한쪽은 스페인 용병 한 명에게 잘려진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내졌다. 그의 유해는 70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1552년 2월이 되어서야 줄러페헤르바르 성직자들에게 수습된 뒤 2월 25일 성 미카엘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다.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를 처단한 뒤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카스텔도를 옹호하고 프라테르 죄르지의 배신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 율리오 3세에게 87개 항목으로 구성된 프라테르 죄르지 기소장을 발송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생전에 추기경을 맡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격분했다. 율리오 3세는 페르디난트 1세가 보낸 기소장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고, 카스텔도와 페르디난트 1세가 에르데이를 손아귀에 쥐기 위해 추기경을 살해했다고 여겼다. 이후 추기경 4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553년 3월부터 1554년 3월까지 조사하면서 총 139명의 증인을 심문했다.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예르데이를 오스만 제국에 넘기려 했고, 자신과 제국군을 모살하려 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1세의 강한 합력을 받은 조사위원회는 555년 2월 14일에 600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내통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살인에 연루된 자들과 공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552년, 합스부르크 제국 왈라키아 공국에 자신들의 대의에 헌신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했다. 카스텔도는 라두 5세의 아들이며 망명중인 보야르들의 지지를 받는 라두 8세를 옹립하기로 했다. 1552년 11월, 카스텔도는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왈라키아 공국 현직 보이보드인 미르체아 5세는 8,000 ~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에 배신이 두려워 보야르 47명을 식사하던 중에 체포해 처형했다고 하다. 1552년 11월 16일 매네슈티 전투에서 카스텔도가 승리했고, 미르체아 5세는 지우르지우로 피신했다. 이후 라두 8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내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공물을 계속 바치는 조건으로 집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카스텔도는 1552년 7월 오스만 제국의 예르데이 원정에 참여해 부르젤란트와 세케이란트를 황폐화하는 데 일조한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슈테판 6세 라레슈를 예르데이 귀족 바토리 이슈트반과 함께 기습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 암살 사건에 반발한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귀순했고, 오스만 제국은 1552년 여름 바나트 저지대를 점령했다. 카스텔도는 에르데이 총독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했고, 병사들의 급료를 마련하지도 못했으며, 헝가리 귀족들의 전쟁 참여 거부에 직면했다. 결국 티미쇼아라, 세게드, 에게르 등 여러 요충지를 무기력하게 상실한 그는 에 "상황을 타개할 방도는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보고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1553년 봄 그를 에르데이에서 소환했다. 1553년 9월 세케이푈드 주민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강경 진압되었다.

1554년 4월,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서포여이를 지지하는 페테르 페트로비치가 바나트의 2개 요새를 장악하는 걸 허용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이자벨라에게 헝가리로 돌아가라고 촉구했고, 자기 딸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556년 3월 12일, 사스셰베시(Szászsebes)에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기로 결의하고, 이자벨라의 추종자였던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왕의 부총리로 선출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지지자들과 서포여이 지지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의 지원을 받은 서포여이 지지자들은 신속하게 에르데이 전역을 장악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귀환을 지지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에르데이를 포기했다. 그 후 에르데이 의회 사절단이 6월 1일 폴란드로 파견되었고, 10월 22일 콜로즈바르에서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알현했다. 의회는 이자벨라가 아직 미성년이던 아들을 대신해 5년간 섭정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몇달 동안 에르데이 외부의 여러 카운티(이바우치, 비하르, 괴뫼르 등)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인정했다.

2.4.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2차)

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함께 동헝가리 왕국으로 귀환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는 관대한 종교 정책을 채택하여 파르티움(Partium)[4]과 콜로즈바르에서 칼뱅교회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토커이(1556년 말), 후스트(1557년 1월), 바러드(1557년 5월)을 탈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선호하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 1558년 늦여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녀는 반대파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직접적으로 내리지는 않았지만, 살육을 사주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558년 가을, 오스만-에르데이 연합군은 셔요 강에서 합스부르크군에게 패배했다. 그 후 이자벨라는 상 헝가리를 탈환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1559년, 페르디난트 1세는 자기 딸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고 티서강 동쪽의 땅을 다스리는 걸 인정할 테니,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권고했다. 이자벨라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1559년 9월 15일에 40세의 나이로 줄러페헤르바르에서 급사했다.

155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친정을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딸과 결혼하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역시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를 거부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1561년 12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가장 부유한 영주 중 한 사람인 멜치오르 벌러셔(Melchior Balaša)가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켰지만, 1562년 3월 4일 허더드(현 루마니아 호도드)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세케이푈드 주민들은 발러셔의 선동에 힘입어 세금 면제 등 특권을 회복하고자 봉기했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파견한 토벌대는 5월에 세케이푈드 봉기를 진압했고, 주동자들은 꼬챙이에 꿰뚫리거나 사지가 절단되었다. 이후 에르데이 의회는 평민을 배심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세케이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률을 채택했다. 그러나 벌러셔를 토벌하는 데 실패한 뒤, 에르데이 외부의 도시 대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섰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2년 7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국왕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을 테니 도시들의 주권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1562년 말, 에르데이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선 도시들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에르데이군은 서트마르, 허더드, 너지바녀(현 루마니아 바이아마레)를 점령했지만, 호엔란츠베르크 남작 라자루스 폰 슈벤디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1564년 7월 25일 페르디난트 1세가 붕어했고, 맏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막시밀리안 2세의 사절은 1565년 3월 13일 서트마르에서 조약을 체결하였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에르데이에서 세습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헝가리 국왕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막시밀리안 2세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요하나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강한 압력에 직면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5년 4월 21일 서트마르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테메슈바르의 통치자인 하산 파샤가 에르데이군과 연합하여 에르되드(현 루마니아 아르두드), 너지바녀, 서트마르를 탈환했다.

1566년 여름, 쉴레이만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강에 인접한 지모니(Zimony 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문 구)에 이르렀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에르데이 영주 400명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 진영으로 서둘러 달려가서 쉴레이만 1세 앞에 엎드렸고, 쉴레이만 1세는 그를 세습 통치자로 인정했다. 오스만 연대기 작가 무스타파 셀라니키는 쉴레이만 1세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기술했다. 이후 그는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상 헝가리를 침공했지만, 그해 9월 6일 시게트바르 요새 공방전 도중에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자 오스만 제국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지시에 따라 에르데이로 돌아갔다. 1568년 2월, 에디르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때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지난 몇년간 막시밀리안 2세로부터 빼앗았던 모든 영토를 유지했다.

한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560년 1월 메드제시(Medgyes 현 루마니아 메디아슈)에서 루터교회와 칼뱅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도록 했다. 이후 종교 개혁가들의 교리를 유심히 살핀 끝에, 1562년 말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1564년 4월 궁정 의사이며 삼위일체론 반대자로서 루터교회나 칼뱅교회의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던 조르조 비안드라타에게 루터교회와 칼뱅교회 성직자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공의회를 이끌도록 했지만, 공의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1564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다시 칼뱅교회로 개종하고 페렌츠 다비드를 에르데이 통일교회의 주교이자 궁정 설교자로 삼았다.

페렌츠 다비드는 에르데이 통일교회 주교로서 반삼위일체 사상을 설교에 포함했다. 이에 데브레첸의 칼뱅교회 주교 페테르 멜리우스 유하시 페테르가 강하게 반발했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6년 4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공개 토론을 개최하도록 했고, 토론이 끝난 뒤 데브레첸의 칼뱅교회 출판사에 기금을 지원했다. 또한 콜로즈바르, 머로슈바샤르헤이, 바러드에 개신교 대학을 세우는 걸 후원했다. 1566년 1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정교회를 믿는 루마니아인 종교 지도자로 칼뱅교회 주교를 임명했다. 또한 에르데이 의회는 칼뱅주의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루마니아인 사제를 추방하라는 법령을 제정했지만 실제로 집행되지 않았다.

1567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렌츠 다비드에게 감화되어 반삼위일체 사상을 수용했다. 페렌츠 다비드는 그의 지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홍보하는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우상 숭배자라고 비난했다. 1568년 초 투르다에서 다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는 설교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해에 따라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승인했고, 아무도 종교적 이유로 다른 사람의 손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루터교회, 칼뱅교회 성직자들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았고, 유니테리언, 정교회, 콥트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자들은 비록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믿는 교리에 관해 어떤 간섭도 받지 않았다.

1568년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공식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뒤이어 1569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바러드에서 칼뱅파와 유니테리언 신학자들 사이의 토론회가 열렸다. 두 토론회 모두 승자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마침내 삼위일체를 거부하기로 마음먹고, 1569년 말 대다수 신하들과 함께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했다. 그는 유일한 유니테리언 군주로서 유럽사에 기록되었다.

1570년 8월 16일, 슈파이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막시밀리안 2세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더 이상 왕을 칭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트란실바니아의 공이자 헝가리 왕국 일부의 주권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채택했으며, 자신이 통치하는 공국은 헝가리 왕국의 일부이며, 자기가 죽은 후에는 막시밀리안 2세 또는 막시밀리안 2세의 후계자에게 돌아갈 것임을 확인했다. 12월 1일 슈파이어 조약이 에르데이 의회에서 비준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진 합스부르크 가문과 서포여이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되었고, 동헝가리 왕국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개편되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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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복위
서포여이 야노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프라테르 죄르지
페르디난트 1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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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문서


[1] 현 루마니아 리포바 [2] 현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3]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4] 오늘날 헝가리 동부 미슈콜츠, 데브레첸과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 일대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지역. 파르티움은 라틴어인데 중세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