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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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1년 | ||
사망 | 1553년 (향년 22세) | ||
오스만 제국 알레포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546년 9월 3일 ~ 1551년 6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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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페트루 5세 라레슈 어머니: 엘레나 브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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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슈테판 6세 라레슈, 이오안 5세 사술, 콘스탄틴, 룩산드라, 아나, 마리아, 치아나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이슬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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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25대 보이보드.2. 생애
몰다비아 공국 제22대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와 명목상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인 요반 브란코비치의 딸 엘레나 브란코비치의 장남이다. 1546년 9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승인을 받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젊은 튀르크 고문들과 함께 항현은 매일 즐겼으며, 세간에서는 하다르라는 튀크르 고문이자 남자 친구와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생활방식이 무척 사치스러웠으며, 이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악착같이 뜰어갔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여러 보야르를 처형했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민심이 악화했다.급기야 1548년 4월 7일, 몰다비아 공국 중심지인 수체아바의 포르타르(지사)이자 헤트만(사령관)인 페트루 바르티치를 처형하자, 바르티치 가문 인사들은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로 피신했고, 보야르들의 반감은 위험할 수준으로 고조되었다. 1549년, 로만의 마카리에 주교가 바르티치를 무단으로 처형한 것에 비난을 퍼붓자, 일리아슈 2세는 마카리에 주교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여론이 몹시 악화하여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1551년 초 마카리에를 복위하고 바르티치가 묻힌 보로네츠 수도원에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는 등 성직자들과 화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도저히 보이보드 직위를 수행하지 못할 것 같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재물을 모은 뒤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합당한 조공을 가지고 가서 국가의 재정적 의무를 줄여달라고 설득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보야르 100명이 그가 가지고 간 재물에서 조공으로 바칠 몫을 떼내는 걸 감독하기 위해 동행했다. 1551년 5월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일리아슈 2세는 쉴레이만 1세 앞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메흐메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할례를 받았다. 이후 쉴레이만 1세는 6월 11일에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요청에 따라 그의 동생인 슈테판 6세 라레슈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일리아슈 2세는 몇년간 코스탄티니예에서 살았으며, 실리스트라의 명목상 파샤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부르사로 유배되었고, 1553년경에 시리아 알레포에서 급사했다. 그의 아버지 페트루 5세가 1530년에 설립한 프로보타 수도원의 봉헌 그림에 그의 초상화가 함께 그려졌는데,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그 봉헌 그림에 그려진 일리아슈의 얼굴은 검은 색으로 칠해졌다. 그리고 로만 대교구와 바카우의 교회 기록에서, 그의 이름은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