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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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0년 | ||
몰다비아 공국 토포라우치 | |||
사망 | 1633년 7월 2일 (향년 43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626년 1월 13일 ~ 1629년 6월 | |||
2차: 1633년 5월 3일 ~ 1633년 7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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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드미트리에 바르노브스키 어머니: 엘리자베타 모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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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바르노브스키-모빌라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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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51대 보이보드.2. 생애
1590년경 몰다비아 공국 토포라우치에서 출생했다. 조부 토마스 바르노브스키는 폴란드계 몰다비아 보야르로, 1563년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를 타도하는 데 일조했다. 아버지 드미트리에 바르노브스키는 1599년부터 1606년까지 몰다비아 궁정에서 마레 포스텔니크(Mare Postelnic: 군주의 침실을 돌보거나 궁정에 출입한 외부 인사들을 대접하는 자)를 역임했다. 어머니 마리아 모빌라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시미온 모빌라의 조카였다.1611년 궁정 술잔 관리인에 선임되었고, 1615년 체르나우치의 보안관에 선임되었으며, 1616년 호틴의 파르칼라브(Pârcălab: 성주)를 역임했다. 1621년 호틴에서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평화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오스만어와 폴란드어를 모두 잘 알았기에 협상 타결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라두 9세 치세인 1622년부터 1626년까지 수체아바의 대 헤트만(hatman: 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중병을 앓아서 통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라두 9세를 대신해 몰다비아를 이끌었다.
1626년 1월 13일 라두 9세가 이아시에서 병사했다. 그 후 대 보야르들은 논의 끝에 미론을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고, 사절단을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해 오스만 제국 궁정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미론은 오스만 궁정이 승인해준 대가로 총 10만 크라운에 달하는 자금을 보냈다. 162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는 페트루 모빌라에게 통치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페트루 모빌라가 사촌인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첫번째 통치 기간동안 여러 기념물을 세웠다. 1627년 이아시에 성모 승천 교회를 세웠고, 1629년 이아시 카운티의 바르노바 마을에 바르노바 수도원을 세웠으며, 1629년 비스트리타 계곡의 한구 수도원 정착지를 건설했다. 또한 1609년부터 건축되던 드라고미르나 수도원을 1627년에 완성했다. 한편 1628년 1월 16일에 농민이 보야르 및 수도원 영지에서 떠나는 걸 금지하는 법안을 반포해, 농노제 확립에 일조했다.
1629년 6월, 미론은 공물 지불에 황금 봉지 40개[1]를 추가해달라는 오스만 재상의 요청을 거부했다가, 폴란드와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폐위된 뒤 폴란드의 우스티 영지로 은퇴했다. 이후 4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633년 초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가 바실레 루푸에 의해 축출된 뒤 몰다비아를 안정시키려는 보야르들의 초대로 돌아왔다.
1633년 5월 3일 이아시에 도착하여 보이보드로 취임한 그는 오스만 제국 당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보야르 사절단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부쿠레슈티에서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대면했는데, 마테이 바사라브는 바실레 루푸가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하기 위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코스탄티니예로 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몰다비아 공국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해, 그 말을 듣지 않고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
6월 20일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미론은 바실레 루푸로부터 미론이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폴란드와 붙으려 한다는 고발을 받은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4세는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미론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1633년 7월 2일 코스탄티니예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는 구금 기간 동안 드라고미르나 수도원에 유해를 안장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모이세 모빌라가 몰다비아 공국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1]
한 봉지에 500개의 황색 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