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620년 | ||
사망 | 1686년 (향년 66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673년 11월 | |||
2차: 1674년 2월 ~ 1675년 11월 10일 | |||
3차: 1684년 2월 8일 ~ 1685년 6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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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하이 칸타쿠지노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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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칸타쿠지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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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63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대 재무관 미하이 칸타쿠지노의 아들이다. 1663년, 왈라키아에서 강력한 보야르로 군림했으며 그리고레 1세 기카를 옹립했던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해, 그리고레 1세 기카가 이를 믿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를 처단하는 데 일조했다. 1673년경 왈라키아 공국의 대사로서 코스탄티니예에 거주했다.1673년 11월,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호틴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쳐부수고 이아시를 점거했을 때, 해외로 도주한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되었다.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자국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이에 페트리세이쿠가 몰다비아로 돌아와서 두미트리슈쿠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1674년 2월, 두미트리슈쿠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 궁정의 지시에 따라 수체아바, 네암슈, 호틴 요새 성벽 일부를 파괴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몰다비아에 주둔한 타타르족은 몲다비아인들을 상대로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그는 세금 시스템을 인두세로 대체했다. 주민들은 이름, 별명, 거주지, 국고에 갚아야 할 금액이 기재된 서류를 항시 휴대해야 했다. 1675년 11월 10일,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안토니에 루세트에게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1684년 2월 8일,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아 슈테판 페트레세이쿠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몰다비아 공국은 그의 세번째 치세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굶어죽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늑대 무리가 도시에 들어와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85년 6월 25일에 그를 폐위하고 콘스탄틴 칸테미르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그 후 두미트라슈쿠는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1686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