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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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8년경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756년 2월 19일 이후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52년 9월 3일 ~ 1753년 7월 3일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53년 7월 3일 ~ 1756년 2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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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그리고레 2세 기카 어머니: 조이 마나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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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스카를라트 기카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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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74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75대 보이보드.2. 생애
1728년경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조이 마나이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스카를라트 기카가 있었다. 그는 1751년 6월부터 1752년 8월까지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을 역임했다. 1752년 9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왈라키아 보야르들에 의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즉위 후 첫 3개월간 스톨니치 30명, 파하르니치 20명, 세르다르 50명을 대거 선임했다. 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짊어진 막대한 빚을 어떻게든 마련하려는 그의 의중에 따라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을 얻어낸 뒤 농민들에게 가혹한 징수를 가해 본전을 뽑으려 했다. 이로 인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포착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753년 7월 3일에 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전임시켰다.마테이 기카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한 뒤에도 빚을 갚기 위해 농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겼으며, 몰다비아 궁정 직위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들에게 끊임없이 판매했다. 여기에 1755년 성 사바 수도원에 면세 권리를 박탈하고 연간 100 탈러의 세금을 거뒀으며, 성금요인 수도원의 키시너우 마을 소유권을 박탈했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종종 보내서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포착되었고, 파디샤 오스만 3세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해 1756년 2월 19일 마테이를 추방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