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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2:17:12

라두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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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브 1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블라디슬라프 1세 라두 1세
단 1세 미르체아 1세 블라드 1세 미르체아 1세
미하이 1세 라두 2세 단 2세 라두 2세
단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2세 미르체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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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10세 라두 9세 라두 10세 라두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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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셰르반 게오르게 기카 그리고레 1세 기카 라두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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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레 2세 기카 마테이 기카 콘스탄틴 라코비차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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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를라트 기카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 그리고레 3세 기카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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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colbgcolor=#000><colcolor=#fff> ''''''
파일:라두 10세.jpg
본명 라두 셰르반
Radu Şerban
출생 미상
사망 1620년 3월 13일 (향년 ?세)
합스부르크 제국
재위기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colbgcolor=#f5f5f5,#2d2f34> 1차 1602년 8월 ~ 1610년 12월
2차 1611년 6월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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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포스텔닉 보야르 라두
어머니: 코자마의 마리아 주파니타
배우자 마르기네니의 엘리나
자녀 아나(또는 안쿠사) 라둘레아, 콘스탄틴 셰르반, 엘리나 칸타쿠지노
가문 크라이오베슈티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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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52대 보이보드.

2. 생애

포스텔닉 보야르 라두와 코자마의 마리아 주파니타의 아들이다. 그는 모계 쪽에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일원이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공국 제25대 보이보드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외손자라고 한다. 그는 미하이 2세 치세 동안 코이아니 일대를 통제하는 대총독이 되었으며, 술잔 관리인 직임을 역임했다. 또한 마을 71개와 대규모 토지를 보유해, 왈라키아에서 가장 큰 개인 영지를 소유했다. 아내인 마르기네니의 엘리나는 우드리스트 반(Ban)의 딸로, 그에게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다.

1600년 11월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의 도움으로 미하이 2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시미온 모빌라는 왈라키아 전역을 폴란드군과 함께 철저하게 약탈했고, 이로 인해 보야르들의 반감을 샀다. 폴란드군이 돌아간 뒤, 시미온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보야르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급기야 1601년 6월 라두 9세가 반란을 일으켜 왈라키아 전역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시미온은 몰다비아로 도주했고, 그해 10월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고 돌아와 라두 9세를 쫓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러나 1602년 8월 라두 10세의 정변으로 재차 축출되어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왈라키아를 해방하고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는 미하이 2세의 정책을 계승했다.

1602년 가을, 시미온 모빌라는 크림 칸국 에 찾아가서 자신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귀하는 걸 도와준다면 그들이 왈라키아를 마음껏 약탈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크림 칸국에 소속된 타타르인 수만 명이 가세했고, 그의 형이자 몰다비아 보이보드인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파견한 몰도바인, 카자크 300명이 가세했다. 라두 10세는 이에 대응해 보병 8,000 ~ 10,000명과 기병 6,000명을 소집했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장군 조르조 바스타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파견한 기병 1,000명이 가세했다. 라두 10세는 텔레아젠 강 계곡의 테이샤니에서 참호와 방어벽을 갖추고 적의 공세에 대항했다.

1602년 9월 23~24일, 타타르군은 이 요새에 대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막대한 손실만 보았다. 이때 크림 칸 가지 기라이의 사위가 결투를 제안하자, 스트로 부제스쿠라는 이름의 왈라키아 전사가 응해 결투를 벌인 끝에 그를 처단했다. 다만 스트로 역시 중상을 입고 10월 2일에 사망했다. 현재 루마니아 올테니아 발체아 주 스타네슈티 초원의 스타네슈티 수도원에 스트로 부제스쿠의 묘비가 세워졌다. 결국 타타르군은 왈라키아군을 꺾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603년 여름, 라두 10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몰아내려는 세케이 모제시가 이끄는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 연합에 맞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편을 들었다. 게오르게 라슈와 바실라 마르자가 지휘하는 왈라키아군 선봉대는 텔레아제눌루이 계곡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펠디오아라에 숙영지를 세웠고, 라두 10세는 본대를 이끌고 루카르-브랜 고개를 통해 카르파티아 산맥을 등반해 선봉대와 교차점을 이루었다. 세케이 모제시는 이에 대응해 헝가리인 4,000명, 타타르인 2,000명, 경대포 25문을 이끌고 브라쇼브 인근에 도착했다.

모제시는 왈라키아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라쇼노프 인근에서 요새를 세운 뒤 방어 전술로 적에 맞서기로 했다. 7월 17일에 벌어진 라쇼노프 전투에서, 왈라키아군은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방어선을 뚫고 적군을 패주시켰고, 라두 10세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때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국경지대의 여러 요새를 자기 수중으로 삼은 뒤 왈라키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트란실바니아 공국과의 북쪽 국경을 확보하고 타타르군을 격파하면서 입지를 확고히한 뒤, 오스만 제국에게 공물을 보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대비해 수비에 용이인 트르고비슈테를 수도로 삼는 한편 부쿠레슈티 인근에 요새를 설치했다. 또한 개인 간의 부채를 소멸하고 약탈, 절도 및 강도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해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또한 1608년 체르니카 수도원을 건설을 후원했으며, 1461년 블라드 3세가 세웠지만 폐허가 되었던 코마나 수도원을 재건했다.

1608년, 미하이 2세의 아들 니콜라에 파트라스쿠가 소규모 군대를 모집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가서 그곳의 지배자인 바토리 가보르와 동맹을 맺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바토리 가보르는 그를 체포한 뒤 라두 10세에게 넘겼고, 그는 코 일부가 베어짐으로써 보이보드 계승권이 무효화된 뒤 추방되었다. 니콜라에는 나중에 라두 10세와 화해하고 포스텔닉으로 선임되었으며, 아버지가 과거에 영지로 다스렸던 치울니차에 대한 증서를 왈라키아의 로고테테스인 오안세아에게 넘기고 대신 글리나를 다스릴 권리를 획득했지만, 글리나를 실제로 다스리지 못했다.

1610년, 트란실바니아의 공 바토리 가보르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상대로 공격적인 정책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이에 대응해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 콘스탄틴 모빌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쳐들어와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모조리 약탈당했고, 납 지붕이 녹여져서 총알로 제작되었으며, 수많은 무덤이 도굴당했다. 한편 라두 10세는 몰다비아의 로만에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복수전을 준비했다.

1611년 3월, 오스만 제국이 바토리 가보르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갸게 한 뒤 라두 9세를 보이보드에 복귀시켰다. 그해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에 행한 악행을 복수하려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르기로 하고,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 뒤 7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프레지미르로 진격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급히 브라쇼브로 후퇴하려 했지만, 라두 10세는 산을 넘는 험난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격해 7월 9일 브라쇼브와 산페트루 마을 사이의 평야에서 따라잡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왈라키아인과 라두 10세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된 폴란드 흉갑기병들은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바토리 가보르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도주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왈라키아로 돌아간 라두 10세는 1611년 9월 라두 9세를 복위하기 위한 오스만 제국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라두 10세는 몰다비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9월 30일 바카우 인근 숲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혀 가을비로 인해 진흙에 갇힌 대포와 보급품이 담긴 마차를 전부 잃었고, 숙련병 상당수와 주력군의 퇴각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폴란드 흉갑기병들도 상실했다. 라두 10세는 수체아바로 이동한 뒤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빈으로 떠났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었기에, 그에게 연금을 지급할 뿐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키려 하지 않았다. 왈라키아 내 라두 10세 추종자들은 1611년 말, 1612년, 1616년에 반란을 꾀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고, 라두 9세는 음모를 꾸민 많은 보야르의 처형을 명령하고 그들의 땅을 압수했다.

그 후 빈에서 지내던 라두 10세는 1618년 7월 10일 자기 딸 아나(또는 안쿠차) 라둘레아를 니콜라에 파트라스쿠와 결혼시켰다. 1619년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가보르 30년 전쟁에 착수한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황폐화했을 때, 당시 티르나우에 있던 라두 10세는 사위와 딸과 함께 도주해 모데른을 거쳐 아이젠슈타트로 이동했으며, 1619년 11월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베틀렌 가보르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에 사위와 함께 참여했다. 이후 몰다비아 보이보드 가슈파르 그라치아니와 손잡고 왈라키아 공국을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가슈파르 본인이 왈라키아까지 차지하려 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620년 3월 13일, 라두 10세는 통풍에 시달리다가 빈에서 사망했다.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그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기독교 투사라고 치켜세우며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 매장하도록 했다. 딸 아나는 1640년경 아버지와 남편 니콜라에의 유해를 왈라키아로 가져와서 코마나 수도원의 공동 무덤에 매장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