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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10:53:28

마흐무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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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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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오스만 제국 제30대 파디샤
마흐무트 2세
محمود ایكینجی | II. Mahmud
파일:Mahmud_II.jpg
출생 1785년 7월 20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사망 1839년 7월 1일 (향년 53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묘소 이스탄불 마흐무트 2세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1]
1808년 7월 28일 ~ 1839년 7월 1일
서명 파일:마흐무트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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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압뒬하미트 1세
어머니 나크시딜 술탄 (출신: 조지아 추정)
배우자 베즈미얄렘 술탄 (출신: 조지아)
페르테브니얄 술탄 (출신: 체르케스 / 루마니아)
자녀 압뒬메지트 1세, 압뒬아지즈를 포함한 8남 19녀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즉위 이후2.3. 예니체리 숙청 및 해체2.4. 개혁2.5. 열강과의 관계2.6. 메흐메드 알리와의 관계와 사망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30대 술탄이자 24대 파디샤, 95대 보편 칼리파.

군사, 법률 및 재정 개혁에 힘쓴 혁신적인 군주로, 이 개혁의 기조는 이어져 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에 의해 탄지마트가 실시되는 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제국의 근대화의 포문을 연 그의 공적을 기리며 대왕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큰 괴로움에 봉착했던 시기로, 그리스가 독립하여 떨어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군벌인 메흐메드 알리의 공격으로 숙적인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굴욕도 겪었다.

2. 생애

2.1. 즉위 전

1785년 압뒬하미트 1세의 막내 아들로 톱카프 궁전에서 태어났다. 1807년 사촌이었던 셀림 3세는 그의 개혁 정책에 반발한 무스타파 4세와 예니체리에게 폐위당했다. 그리고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가 반란을 일으켜 셀림 3세를 복위시키려 하자 두려움을 느낀 무스타파 4세는 예니체리들에게 명하여 셀림 3세를 암살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를 이을 마흐무트 2세의 출생은 그의 어머니에 의해 비밀로 감춰져서 마흐무트 2세는 안전할 수 있었다.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코스탄티니예를 장악해서 무스타파 4세를 폐위시킨 뒤 마흐무트 2세를 옹립했다. 그렇게 마흐무트 2세는 황제에 즉위했다.

2.2. 즉위 이후

마흐무트 2세가 황제가 된 후로 그를 옹립한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가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는 마흐무트 2세가 즉위한 지 4개월 만에 예니체리들의 습격을 받아 자살해버렸다.[2] 그래서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미루고 약 20년간 예니체리들을 안심시키며 몰래 유럽에서 신무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신식 군대를 양성, 친위대로 삼는 등 권력 보강에 힘써야 했다.

사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갈수록 쇠퇴 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종교 조직인 울레마는 세속적인 제도가 이슬람 율법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는 무슬림의 입대가 가능해지고 지위 세습이 가능하게 된 후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익집단으로 부패했다.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네지드 반란군으로부터 메디나 메카를 탈환했지만, 이로 인해 이집트에서 메흐메드 알리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2.3. 예니체리 숙청 및 해체

권력을 충분히 보강한 마흐무트 2세는 1826년 울레마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종교 재단인 '에우카프'를 창설하는 한편, 20년 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예니체리의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예니체리들은 셀림 3세 때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폐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코스탄티니예에서 마흐무트 2세의 친위대에게 패배, 막사로 후퇴하였다.

마흐무트 2세는 포병대에 막사의 포격을 명령했고, 포병대는 예니체리 막사에 유럽에서 도입한 신형 대포 15문을 30분에 걸쳐 일제 발포하여 예니체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이들 말고도 남아있는 예니체리 잔당들이 있었지만 신식 군대와 시파히가 동원된 2년여의 토벌 끝에 수천 명의 예니체리가 도망치다 죽거나 잡혀 처형당했고, 일부는 유배되거나 신식 군대에 편입되면서 예니체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예니체리가 완전히 해체된 이 사건을 '상서로운 사건'이라 부른다.

2.4. 개혁

예니체리 해체 후 마흐무트 2세는 수취 제도 개편, 군사 교육 개편, 군의관 창설 등 연쇄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이 개혁은 셀림 3세의 개혁과 달리 보수 세력과 신학자들의 지지 또한 얻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개혁에 착수했다. 그 일환으로 새로운 도로를 세우고 인구 토지 조사, 우편 제도를 실시했으며, 재상의 권력을 상당 부분 없애고 유럽식 장관 제도를 도입했다[3]. 그리고 봉건 제도인 티마르 제도로 관료들에게 할당되었던 영토를 공유지로 개방했다. 한편 교육 분야에서는 초등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공무원 교육을 위한 기관을 세웠다.

또한 복식도 서구식으로 개혁했는데, 위 초상화에서 마흐무트 2세가 쓰고 있는 붉은 모자는 마흐무트 2세가 복식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모자로, 이름은 페즈이며 오스만 제국에서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 최초로 국가를 도입한 파디샤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인 작곡가 주세페 도니체티(Guiseppe Donizetti)가 작곡했으며, 마흐무디예 행진곡(Mahmudiye Marşı)라는 이름이 붙었다. 들어보기 가사는 없으며, 로코코스러운 느낌이 들어 이후 작곡되는 오스만 제국의 국가들에 비해 밝고 발랄한 느낌이 특징이다.

2.5. 열강과의 관계

마흐무트 2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구 열강, 특히 러시아 제국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일어나자, 마흐무트 2세는 독립군을 제압했지만 독립군이 오스만을 약화시키려는 열강의 지원을 받자, 전세가 오스만 제국에게 불리해졌다. 특히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군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함대에게 패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패배가 확실해졌고 1828년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마저 패배했다. 결국 마흐무트 2세는 열강의 압박으로 인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 내 세르비아 발칸 반도 문제에서도 러시아의 간섭을 받았다. 마흐무트 2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패배로 에디르네 조약에 서명하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의 일부를 러시아에 할양하면서 세르비아와 발칸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특권을 인정해야 했다. 그 결과 러시아의 개입으로 세르비아의 자치권이 인정되었고, 러시아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발칸 반도 내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조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방해만 받았던 것은 아닌데, 오스만 제국이 1830년 메흐메드 알리의 침공으로 이집트군과 싸우게 되었을 때 러시아와 연합하기도 했다. 메흐메드 알리(정확히는 장남 이브라힘)가 이끄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무너진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코스탄티니예까지 진격하자 다급해진 마흐무트 2세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여 1833년 방위조약을 맺었다. 그렇게 러시아와 연합한 마흐무트 2세는 간신히 재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반대로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와 대립했다.

2.6. 메흐메드 알리와의 관계와 사망

이집트 총독이었던 메흐메드 알리와는 러시아, 프랑스보다 더한 원수관계였다.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이상 황제인 마흐무트 2세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마흐무트 2세에게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자신의 총독직 세습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흐무트 2세가 원군을 받고는 약속을 거절하자 격분한 메흐메드 알리는 위에서 언급했듯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코스탄티니예로 진군했다.

열강의 중재로 메흐메드 알리가 아나톨리아에서 철군하여 마흐무트 2세는 재위를 보전했지만 그 뒤 메흐메드 알리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분노한 마흐무트 2세는 1839년 이집트가 점령한 시리아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니지프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만다. 이 패배로 이집트는 형식상 오스만의 속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론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홧병으로 결핵을 앓다가 7월 1일에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어찌 보면 마흐무트 2세가 일찍 사망한 것도 메흐메드 알리의 탓이 크다.


[1]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 [2] 예니체리들이 집을 포위하자 집에 가득 쌓인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 400명이 넘는 예니체리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3] 이때까지 재상은 거의 일본 막부 시대의 쇼군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황제가 직접 주재하던 국무회의 디반(Divan)을 황제 대신 재상이 주재하는 것으로 바꾸고 회의가 끝나면 재상이 황제를 알현하고 결과를 보고한 다음 그에 따른 황명을 받도록 했는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며 황제의 권위도 추락하면서 황명을 받는 과정이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즉 재상이 사회를 보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황제의 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가 정책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된 것. 그러다가 한 술 더 떠서 아예 디반이 열리는 빈도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재상의 집무실에서 열리는 회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러다 보니 이전까지 장관 비슷한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재상을 견제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비서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