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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4:55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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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전제군주국
Српска деспотовина
파일:Coat_of_arms_of_the_Serbian_Despotate.svg.png
국장
파일:Serbian_Despotate_(1422)-en.svg.png
1402년 ~ 1439년
1444년 ~ 1459년
수도 베오그라드
스메데레보
바르
위치 세르비아, 코소보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데스포티스
언어 세르비아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종족 세르비아인
건국 이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1. 개요2. 역사
2.1. 스테판 라자레비치
2.1.1.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등장2.1.2.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대결2.1.3. 헝가리 왕국과의 동맹2.1.4. 부크 라자레비치의 반란과 무사와 쉴레이만의 내전 개입2.1.5.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화해2.1.6. 무사의 침공과 격퇴2.1.7.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2.1.8. 무라트 2세와의 대결2.1.9. 내치
2.1.9.1. 군사 개혁2.1.9.2. 경제 발전2.1.9.3. 문화 발전
2.1.10. 말년
2.2. 주라지 브란코비치
2.2.1. 첫번째 통치2.2.2. 오스만 제국의 지배2.2.3. 2번째 통치
2.3. 멸망의 길
3. 이후4.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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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02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크냐지 스테판 라자레비치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8세로부터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으면서 성립된 전제군주국. 1459년 오스만 제국 에 의해 정복되었다.

2. 역사

2.1. 스테판 라자레비치

2.1.1.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등장

1389년 6월 28일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의 초대 공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오스만 제국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후, 장남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그를 계승했고 어머니 밀리카가 섭정했다. 1389년 10월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지그문트가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북부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세르비아 정부는 헝가리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되기로 했다. 그 후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의 충실한 가신이 되어 그가 치르는 모든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1402년 7월 28일,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가 이끄는 적군을 상대로 맹활약했지만, 바예지트 1세가 참패하고 생포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동생 부크와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렀다. 이때 서유럽 전역을 돌며 원조를 요청하던 마누일 2세를 대신해 제국을 다스리던 요안니스 7세는 1402년 8월 스테판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했으며, 피렌체 출신의 레스보스 영주 프란체스코 2세의 딸이자 자기 아내 이리니의 누이인 헬레나 가틸루시오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스테판의 요청에 따른 요안니스 7세에 의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스테판이 조카를 가두게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일로 스테판과 주라지 브란코비치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2.1.2.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대결

데스포티스에 선임된 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육로를 통해 세르비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드리아노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생포되게 해놓고 도망친 것으로 오해한 오스만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그는 동생 부크 및 260명 가량의 남은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세르비아로 떠나 레스보스에 잠시 머물렀다. 그들의 첫번째 목표는 스테판의 여동생 엘레나의 남편 주라지 발시치가 통치하는 제타였다. 주라지 발시치는 수도 울치니에서 스테판 일행을 맞이했다. 여기에 스테판의 어머니 말리카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자기를 가두게 한 스테판에게 원한을 품고 오스만군과 결탁한 뒤, 스테판의 귀환을 막기 위해 코소보와 메토히야 등지의 도로를 장악했다.

1402년 10월 말, 스테판의 군대는 바르에서 발시치 영지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를 거쳐 슈코더르로 이동한 뒤, 뒤이어 코소보로 이동했다. 그는 적군이 통제하는 주요 도로를 피해 산길로 이동하다가 그라차니차에 이동했다. 11월 21일, 트리폴리 인근에서 주라지 브란코비치와 격돌했다. 그는 어머니가 보낸 분견대와 합류한 뒤, 대부분의 병력을 형제 부크의 지휘하에 둬서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일부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분견대를 상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전에 스테판과 내통했던 우글레사 발코비치가 스테판의 편으로 넘어갔고, 그 덕분에 스테판이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반면 부크 라자레비치는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격파되었지만, 주라지는 오스만군이 무너진 걸 보고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전투가 끝난 후, 스테판과 부크는 노보 브르도로 이동했다. 이때 스테판은 동생이 군대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해 아까운 병력을 많이 잃었다며 질타했다. 한편 우글레사 발코비치는 중간에 그에게 가담해 승리에 기여한 공으로 브란예, 수르둘리차, 프레셰보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으며, 해당 지역은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로 귀환한 스테판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다시 찾았지만, 노보 브르도에서 공개적으로 질타당한 것에 반감을 품은 동생 부크가 그에게 대적할 마음을 먹었다. 1403년 여름, 부크는 세르비아를 떠나 쉴레이만 첼레비를 찾아가서 스테판이 자기에게 일부 영토를 양도하도록 강요할 군대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걸 알게 된 스테판과 부크의 어머니 밀리카가 급히 쉴레이만에게 찾아가 부크의 요청을 들어주지 말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낸 뒤, 두 아들을 화해시키고 스테판과 쉴레이만 사이의 관계를 원할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2.1.3. 헝가리 왕국과의 동맹

이 무렵, 쉴레이만은 오스만 술탄위를 놓고 자기와 대적하는 형제들을 물리치기 위해 갈리폴리에서 동로마 제국,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구호 기사단, 낙소스 공국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이 나라들은 유럽에서의 자신의 영지를 인정하고, 아시아에 거점을 잡은 형제들과 대적하는 쉴레이만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더이상 아니며, 술탄에게 조공을 바칠 의무에서 벗어났고, 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마르마라 해와 흑해 인근에 있는 여러 도시를 되찾았다. 이때 스테판도 이 조약에서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그는 이후에도 쉴레이만에게 계속해서 공물을 바치고 보조군을 보낼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오스만 술탄국의 내란을 틈타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403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가 피렌체 출신의 헝가리 기사 필리포 스콜라리를 세르비아에 파견해 동맹을 제안했다. 그는 니코폴리스 전투 이래 국내의 혼란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벌어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남부 전선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던 스테판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403년 말 또는 1404년 초, 두 통치자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스테판은 지그문트를 자신의 주권자로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마츠바와 베오그라드를 수여받았다. 스테판은 이를 통해 사바 강과 다뉴브 강에 의해 형성된 북쪽 국경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14세기 내내 세르비아와 헝가리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과 손잡은 뒤, 스테판은 브란코비치 가문과 시트니차 강 주변의 오스만 제국 영토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뒤이어 1405년 수도를 크루셰비츠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겼다. 또한 그 해에 라구사 공화국의 무역 특권에 관한 협상이 이뤄진 끝에 그들이 역대 세르비아 통치자들에게 인정받았던 특권을 계속 인정하고, 그 대가로 그들이 가져온 우수한 상품을 공급받기로 했다. 그러던 1405년 초, 슈코더르 지역 주민들이 자기들을 지배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스테판의 사촌인 제타 공작 발샤 3세 발시치는 이를 이용해 지난날 오스만 술탄국의 침입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 위해 베네치아에게 넘겨줬던 슈코더르를 되찾기로 했다.

발샤 3세는 쉴레이만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부크 라자레비치도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은 소규모 접전만 이뤄졌을 뿐 결판이 나지 않았다. 스테판은 중재자로서 평화 협상에 개입했지만, 여러 차례 협상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8년 12월, 지그문트가 용 기사단을 창설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이때 용 기사단 명단 첫번째에는 스테판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는 부더에서 열린 용 기사단 창립 기념식에 참석했고, 그의 궁정에 용을 묘사한 깃발이 걸렸다.

2.1.4. 부크 라자레비치의 반란과 무사와 쉴레이만의 내전 개입

1408년 말, 남동생 부크가 자신과 권력을 공유하고 일부 영토를 떼주지 않는 형 스테판에게 분노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다. 그는 쉴레이만 첼레비에게 달려가서 스테판과 싸우기 위해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쉴레이만을 주권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테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도 여기에 가세했다. 1409년 초, 쉴레이만은 이에 응하기로 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스테판은 이에 맞서 필리포 스콜라리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합세한 뒤 코소보로 진군했지만, 그해 6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베오그라드로 도주했다. 쉴레이만은 베오그라드를 포위하면서, 서부 모라바 강 일대를 포함한 세르비아 남부 지역을 부크에게 넘겼다. 부크는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통치했고, 브란코비치 가문도 쉴레이만을 주권자로 인정했다.

이 무렵, 무사 첼레비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쉴레이만과 대적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진군했다. 스테판은 비트코를 무사에게 파견해 동맹을 맺고 쉴레이만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1410년 초, 무사의 군대는 갈리폴리를 점령했고 뒤이어 잠볼을 공략했다. 스테판은 그 덕분에 포위망을 풀고 세르비아의 최고 통치자로 돌아올 수 있었고, 부크와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무사를 주권자로 받들었다. 당시 아나톨리아에 있던 쉴레이만은 즉시 발칸 반도로 돌아가려 했다. 스테판과 무사는 쉴레이만의 군대를 수송하던 함대를 공격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들은 갈라타 인근에서 일부 선박을 파괴했지만, 쉴레이만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부크와 주라지는 다시 쉴레이만 쪽으로 돌아섰다.

1410년 6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육지 성벽 바로 앞에 있는 골든 혼 해안의 요새인 코스미디온 인근에서, 쉴레이만과 무사가 맞붙었다. 스테판은 이 전투에서 무사 편에 싸웠지만, 무사가 패배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골든 혼을 따라 갈라타로 퇴각하다가, 도중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가 보내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그는 마누일 2세의 환대를 받고, 데스포티스의 직함을 확인받았으며, 데스포티스의 왕관을 수여받았다. 그 후 수행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세르비아로 돌아가 7월 말이나 8월 초에 흑해와 다뉴브 강을 거쳐 왈라키아 공국을 지난 뒤 골루박에 상륙했다.

코미스미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뒤, 쉴레이만은 스테판을 몰아내려 했다. 그는 6월 말에 스테판의 동생 부크 라자레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로 보냈고, 자신은 무사를 계속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르비아로 가던 중 7월 4일 플로브디프에서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었다. 부크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라자르 브란코비치는 인질로 잡혀 있다가 7월 11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무사가 쉴레이만에게 또다시 패배하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그 틈에 세르비아로 돌아온 뒤 형제 부크가 통치했던 남부 지역을 포함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전역을 장악했다.

얼마 후, 무사는 쉴레이만의 추격을 피해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이후 쉴레이만의 독선적인 행보에 반감을 품은 튀르크 영주들이 대거 무사에게 가담하면서 상황은 무사와 스테판에게 유리해졌다. 1411년 초, 무사와 스테판은 세르디카 인근에서 쉴레이만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으로 도주하다가 도중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어 그해 2월 17일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무사는 오스만 술탄국 유럽 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2.1.5.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화해

1411년 7월, 스테판은 부더에서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로부터 사트마라, 비하르, 사볼 등지의 광산 수입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지그문트와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질 때 참여했으며, 보스니아 도시인 스레브레니차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1412년 5월, 스테판은 대규모 수행단과 함께 다시 부더로 가서 지그문트와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한편,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무사의 군대에 가담해 쉴레이만의 아들 오르한이 있던 마르마라해의 작은 마을 셀림브리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런데 무사는 공방전 도중에 주라지를 죽이려 했고, 주라지는 급히 부하들과 함께 셀림브리아에 귀순한 뒤 테살로니키를 거쳐 1412년 가을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이후 스테판의 누이이자 주라지의 어머니 마라의 중재로 스테판과 주라지는 화해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에 분열을 야기한 두 사람의 갈등이 종식되었다.

2.1.6. 무사의 침공과 격퇴

스테판은 유럽 영토를 장악한 뒤 세르비아를 위협하는 무사 첼레비에 맞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사의 유일하게 남은 형제 메흐메트 1세와 연합했다. 1411년 말, 스테판은 스코페의 산작베그와 함께 무사의 영토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했다. 1412년 초, 무사는 이에 대응해 브란예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고, 브란예를 통치하던 우글레사 발코비치는 겨우 탈출했다. 무사는 노비 브로도를 향해 진군하면서 주변의 여러 촌락을 약탈했다. 그러다가 스테판이 이끄는 강력한 세르비아 주력군이 접근해오자 세르비아를 떠나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로 이동했다.

1413년 초, 무사는 소콜니차와 스브릴지그를 지배하던 함자 베이를 공격했다. 함자 베이는 생포된 뒤 처형되었고, 무사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보반과 리포나츠를 거쳐 모라비아 계곡의 일련의 마을들을 파괴한 뒤 스탈라치 요새를 포위해 몇 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그곳 사령관을 체포해 처형했다. 무사의 군대는 여기에 더해 토플리카와 브라니체보를 황폐화했다. 스테판은 이에 대응해 지그문트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은 뒤 크루셰바츠에서 메흐메트 1세의 오스만군과 합세했다. 이후 토플리카 강 인근의 도브리치에서 무사에게서 이탈한 튀르크 영주들과 합세한 뒤 오브체 폴예로 이동했다.

1413년 7월 5일, 불가리아의 비토샤 산 아래 차모를루 마을 인근에서 바예지트 1세와 스테판의 연합군과 무사의 전투가 벌어졌다. 무사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도주하다가 이스크라 강변에서 생포된 직후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발발한 오스만 제국의 공위기는 10여 년만에 끝났다. 그 후 스테판은 메흐메트 1세를 주권자로 받들었고, 메흐메트 1세는 그에게 풍부한 선물을 제공하는 동시에 코프리잔 요새와 즈네폴예 지역을 포함한 일부 영토를 제공했다.

2.1.7.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

그 후 수년간 평화를 만끽하며 내치에 전념하던 스테판은 슈코더르에서 벌어진 전쟁에 다시 개입했다. 이보다 앞서, 스테판의 사촌인 제타 공작 발샤 3세 발시치는 1419년 슈코더르를 향한 전쟁을 재개했지만, 슈코더르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린 그는 1421년 초 스테판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제타 공국의 소유권을 스테판에게 넘기겠다고 밝힌 뒤 4월 28일 스테판의 궁정에서 사망했다. 이때 네레트바 강변 일대의 영주인 산달리 흐랴니치도 발샤 3세의 영지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했고, 제타 배후지를 지배하던 두라셰비치 가문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두라셰비치 가문과 산달리는 그에게 대적하지 않고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베네치아와의 전쟁을 맡겼다.

스테판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그들이 발샤 3세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421년 8월 군대를 일으켜 드리바스타를 점령했고, 두라셰비치 가문은 미홀스카 지협과 그발리를 점령했다. 11월 스테판의 군대가 바르를 점령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절단을 보내 협상한 끝에 반년 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1422년, 스테판은 휴전이 아직 유효한 동안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비트코를 베네치아로 보냈다. 비트코는 슈코더르를 포함해 제타에 있는 발시치 가문의 모든 소유물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에 대해 스테판이 지난해에 점령한 도시와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교섭 과정에서 양측의 요구가 줄어들어 부분적인 합의가 이뤄졌으나 여전히 평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동시에, 슈코더르의 베네치아인들은 세르비아군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물자를 충당했고, 보자나 강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을 통제하기 위해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다. 그 후 세르비아군이 슈코더르를 포위했지만 12월 철수했고, 베네치아인들은 반격을 가해 보자나 강변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1423년 초여름, 주라지 브란코바치가 스테판의 의뢰를 받고 8,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세르비아군 수장으로서 슈코더르를 포위했다. 주라지는 보자나 강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고 보조나 강 입구에 슈코더르를 바다에서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사슬을 설치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베네치아 인들은 평화 협상을 요청했고, 양자는 8월 12일 슈코더르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스테판은 바르와 드라바스타로부터 연간 1,000 두카르를 받았고, 주라지를 이 도시들의 영주로 세웠다. 반면 코토르 울치니 및 슈코더르는 베네치아의 영토로 확인되었다. 이후 협상이 계속 논의된 끝에 1426년 4월 22일 부치트른에서 주라지 브란코비치와 슈코더르 총독 프란체스코 사이에 최종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스테판(1426년 7월 22일)과 베네치아 원로원(1427년 2월 3일)에 의해 비준되었다.

2.1.8. 무라트 2세와의 대결

1421년 5월 26일, 스테판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던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오스만 술탄국의 새 술탄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일전에 자신이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와 함께 티무르에게 생포되었던 무스타파 첼레비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메흐메트 2세에게 진압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던 자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풀려난 뒤 2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테판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함께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지만, 스테판은 사절을 체포한 뒤 무라트 2세에게 넘겼다.

1423년 무스타파를 사칭한 인물이 전사하면서 반란이 진압된 뒤, 무라트 2세는 상호 관계에 관해 스테판과 협상하기 위해 사절단을 베오그라드로 보냈다. 1423년 여름, 스테판은 무라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기가 가진 영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스테판은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의 협력도 이어갔다. 1412년 가을, 지그문트는 후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세르비아 기병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스테판은 타미스 총독 필리포 스콜라리에게 보조군을 맡겨 지그문트를 돕게 했다. 또한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부더를 방문했을 때 참석했다.

그러나 스테판과 무라트 2세의 관계는 1425년 여름에 악화되었다. 무라트 2세의 사절단이 세르비아에 방문했을 때, 스테판은 헝가리에 있어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사절단은 세르비아에 전쟁 준비가 한창인 걸 확인했다. 이에 사절단은 부르사로 돌아간 뒤 무라트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무라트 2세는 그가 서방에서 몰려오는 기독교군과 연합해 대규모 전쟁을 벌일 거라고 확신하고, 이를 응징하기로 했다. 그해 가을, 오스만군은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했다. 스테판은 사절을 급히 파견해 오해를 풀려 했지만, 무라트 2세는 이를 묵살하고 세르비아를 그대로 침공해 니스를 함락한 뒤 포모라블예 중심부를 관통하고 크루셰비츠까지 침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스테판은 지그문트로부터 지원군을 받았지만 사절을 계속 파견해 무라트 2세와의 갈등을 끝내려 노력했다. 그 결과 무라트 2세는 그의 협상 제안을 수락했고, 평화협정이 체결한 뒤 세르비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보스니아의 국왕 트브르트코 2세는 스테판과 무라트 2세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하려 했다. 보스니아군이 스레브레니차 요새를 포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스테판은 군대를 이끌고 그쪽으로 달려가 보스니아군을 격파했다. 이후 보스니아로 약탈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도록 했다.

2.1.9. 내치

2.1.9.1. 군사 개혁
스테판은 아버지가 전사한 이래 주변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각지에 프로니아(Pronia: 특정 귀족이 해당 지역의 수비를 전담하는 대가로 수여받은 영지)의 수를 대폭 늘리는 동시에 방비를 자체 강화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튀르크 약탈대의 습격으로부터 자체적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도원 사유지의 군사 의무 면제를 부분적으로 폐지해 가용 군사력을 늘렸으며, 여러 도시를 자체적으로 다스리는 보이보다의 지위를 강화했다. 한편, 스테판은 '여름 공물세'와 '겨울 공물세' 개념을 도입했다. 두 공물세 모두 각집당 20디나르를 부과했으므로, 세르비아인들은 매년 40디나르를 그에게 바쳐야 했다. 스테판은 세르비아에 거주하던 라구사 공화국 사람들에게도 이 세금을 거뒀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을 군사비에 씀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2.1.9.2. 경제 발전
스테판은 세르비아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자 광산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1422년을 기준으로 하는 라구사 공화국의 기록 보관소 데이터에 따르면, 당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에서 수입된 은의 양은 대부분 세르비아에서 생산되었으며, 당시 유럽 전체 생산량의 1/5를 차지했다. 주요 광산 지역은 노보 브르도, 코파오니 산지의 트레프차, 플라나, 코포리치, 오스트리차, 그리고 북부의 루드니크 산지 및 스레브르니차였다. 15세기 초 자플라니나와 리바제 광산이 개장되었고, 1420년경 아발라 광산이 개발되었으며, 보호리나, 크루프냐, 자야차 등지가 뒤따라 개발되었다.

광산의 발달은 무역의 증가 와 도심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은은 당시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중세 세르비아의 전통 수출품인 밀랍, 가축, 가죽 등의 수출도 이어졌다. 수출은 주로 아드리아 해안 도시, 특히 두브로브니크를 통해 이뤄졌고, 코토르, 드림, 보자나 강변 주변 도시를 통해서 이뤄졌고, 베오그라드를 거쳐 중부 유럽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수입품은 소금 등 일반 소비재 외에도 실크, 진주 등 사치품이 주류였다. 스테판은 일련의 법령과 특권을 통해 자국의 무역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무역 참여를 장려하는 동시에 라구사 공화국의 독점에 가까운 무역 지위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광업과 무역의 발전은 금세공 기술의 발전을 동반했다. 장인들은 장인이 이끄는 전문 길드 협회 로 조직되었으며 , 지역 장인 외에도 두브로브니크 장인도 도시에 있었다.

광산 개발은 그곳에 일하는 이들을 위한 도시 개발을 촉진했으며, 두브로브니크 및 기타 무역 거점으로 향하는 무역 경로를 따라 도시 개발 및 확장이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스테판 치세 때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도시는 단연 베오그라드였다. 1405년 스테판에 의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가 된 베오그라드는 대규모 인구 유입 덕분에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 간의 무역 교류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 자체에는 교회, 빵집 및 공장, 부두, 세관 및 시장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기능에 필요한 일련의 건물이 세워졌고, 문화 육성 정책을 추진한 스테판에 의해 세르비아 문화와 문학 생활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베오그라드 요새도 그의 치세에 대폭 강화되어, 다뉴브 강변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한 요새를 갖춘 곳으로 탈바꿈했다.
2.1.9.3. 문화 발전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피해 자국으로 망명한 기독교 학자들을 베오그라드 궁정에 받아들였으며, 이에 더해 서유럽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이들에게 번역되지 않은 그리스어 작품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고, 기존 번역을 수정하고 다시 작성하는 작업을 맡겼다. 번역 대상으로는 신학 및 교육 서적 외에도 철학적 저작물과 역사 및 시에 관한 책이 포함되었다. 그의 의뢰를 받고 번역 활동에 전념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초록>을 번역한 그리고리제 힐란다락(Григорије Хиландарац)을 들 수 있다. 당시 세르비아의 번역 및 필사 활동의 중심지는 레사바 수도원이었는데, 그곳에서 세르비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철자법 학교인 레사바 철자법 학교가 세워졌다.

문학 분야에서는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전기>를 집필한 코스테네츠의 콘스탄틴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 스테판 데찬스키의 생애>, 스테판 데찬스키에 대한 봉사>,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로 성 페트카 유물 이전에 대한 설명> 등을 집필한 그례고리예 캄블락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스테판 본인도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형제 부크 라자레비치에게 여러 편의 시적인 서신을 보냈으며, 올드 슬라브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데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2.1.10. 말년

1426년경, 스테판은 여러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1402년 8월 피렌체 출신의 레스보스 영주 프란체스코 2세의 딸 헬레나 가틸루시오와 결혼했지만, 헬레나 가틸루시오가 이후 기록상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걸 볼 때 결혼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재혼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던 그는 루드니크 산 아래 스레브레니차에서 교회-영주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세르비아 총대주교 니코 1세와 영주 앞에서 사촌인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그를 그들의 영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충실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주라지에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계속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1426년 5월, 스테판은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 휴양지인 타타에서 접견한 뒤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지그문트는 베오그라드와 골루박, 마츠바 및 드리나 강 서쪽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데스포티스로 집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봄, 스테판은 지그문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상호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는 협상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베네치아인들과 무라트 2세간의 갈등을 중재할 테니 세르비아에서 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협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427년 7월 19일, 스테판은 슈마디야의 여름 궁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베오그라드로 돌아가는 중 크라구예비츠에 들렀다. 거기에 있던 수도원에 기부한 뒤 점심을 먹은 후, 코스마이 산지의 글라바로 가서 사냥을 벌였다. 이때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평소처럼 손을 앞으로 뻗어 가 자기 팔에 안착하게 하려 했지만, 손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곧 그의 몸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낙마했다. 그는 천막으로 이송되었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었다. 사인은 뇌졸중 또는 심장마비였다고 전해진다.

2.2. 주라지 브란코비치

2.2.1. 첫번째 통치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급사했을 당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제타(현재 몬테네그로)에 있었고,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는 왈라키아에 있었다. 두 사람은 전령으로부터 스테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베오그라드로 달려갔다. 이후 1427년 9~10월 베오그라드에서 협상한 끝에, 주라지는 자신의 집권을 용인받는 대가로 베오그라드를 헝가리에 넘기기로 했다. 그 후 지그문트는 베오그라드와 골루박을 다뉴브 강을 따라 형성된 헝가리 방어 체계에 포함하려 했다. 골루박 요새를 다스리던 세르비아 영주 예레미아는 자기가 스테판 라자레비치에게 12,000두카트를 넘겨주고 이 요새의 소유권을 얻었으니, 지그문트 역시 자기에게 그만한 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그문트가 거부하자, 예레미아는 오스만 술탄국에 귀순하기로 했다. 이에 주라지가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골루박 성문 앞에서 예레미아의 부하들에게 공격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지그문트는 무력으로 골루박을 점령하기로 하고, 골루박 요새의 다뉴브 강 건너편에 성 라슬로 요새를 건설했다. 예레미아는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오스만군은 즉시 군대를 보냈다. 지그문트는 1428년 6월 초 오스만군에게 패배한 뒤 헝가리로 퇴각했다. 그 후 주라지는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협상을 요청했다. 오스만 측은 그에게 세르비아는 그의 것이 아니라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것이었으며, 이제는 술탄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주라지는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에 연간 50,000 두카트를 공물로 바칠 것이며,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스만 술탄국의 원정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는 본래 베오그라드였지만, 이제 헝가리 왕국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새 수도가 필요했다. 주라지는 스메데레보를 새 수도로 낙점하고 요새를 건설하기로 했다. 스메데레보 요새는 다뉴브 강과 예자바 강의 교차점에 지어졌다. 오스만 술탄국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지 두려웠던 그는 백성들을 대거 동원해 요새 공사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라고 독촉했다. 스메데레보 요새는 1430년에 완공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 일로 세르비아인들의 민심을 많이 잃었다. 그렇게 스메데레보를 건설하는 동안,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절로부터 데스포티스의 왕관을 받았다. 1430년 오스만 제국이 테살로니키를 점령했을 때 많은 시민의 몸값을 대신 지불했으며, 아들 중 한 명을 오스만 군대에 합류시켜 두라초를 포위하고 알바니아 영주 존 카스트리오티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1433년, 보스니아 왕국에서 트브르트코 2세 라디보이 오스토이치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주라지는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와 함께 라디보이를 지원해 보스니아 대부분을 공략하도록 도와주고, 트브르트코 2세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1434년 4월 20일, 주라지의 막내딸 카타리나와 첼레 백작이며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의 부하인 울리히 2세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헝가리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스만 술탄국은 1434년 중반에 재상 메흐메트 사리제파샤를 스메데레보로 파견해, 주라지의 큰딸 마라가 술탄 무라트 2세의 첩실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주라지는 세르비아 영주와 성직자들을 소집해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가을, 무라트 2세는 마라를 데려오기 위해 대신 몇 명을 파견했고, 주라지는 딸을 넘겨줬다.

1439년, 무라트 2세는 유럽에서 십자군이 재차 결성되어 장차 발칸 반도로 진격할 것이며, 세르비아 전제군주국도 여기에 가담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무라트 2세는 그 전에 세르비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60,00 ~ 7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한 분대를 노보 브르도로 파견했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스메데레보로 진군했다. 1439년 4월 말 또는 5월 초 스메데레보에 도착한 오스만 제국군은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주라지는 헝가리 왕국으로 달아났고, 그의 아들 그르구르 브란코비치와 처남인 토마스 칸타쿠지노스가 임시로 데스포티스를 맡아 스메데레보 수비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3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두 사람은 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학살에 직면하는 걸 막기 위해 성문을 개방하기로 했다. 술탄 무라트 2세는 그르구르에게 세르비아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도록 했지만, 얼마 후 마음을 바꿔 에디르네에 있는 자신의 첩실이자 그르구르의 여동생인 마라에게 보냈다.

2.2.2. 오스만 제국의 지배

스메데레보를 함락한 뒤,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의 총독으로 이샤크 베그를 선임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은 공세를 이어가 노보 브르도를 상대로 2년간 공방전을 벌이다가 1441년 6월 27일에 함락했다. 이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에서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유일한 자유 지역은 제타 뿐이었지만, 이 지역 역시 베네치아인과 보스니아 보이보드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협공을 받고 1442년 3월에 공략되었다. 1443년, 무라트 2세는 이사베그 이사코비치를 세르비아의 새 술탄으로 선임했다.

한편, 주라지 브란코비치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세르비아를 되찾으려 했지만, 1439년 9월 로마왕이자 헝가리 국왕 알브레히트 2세가 돌연 사망한 뒤 알브레히트 2세의 갓난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간의 헝가리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주라지는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편에 서는 한편, 아들 라자르를 라디슬라우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내전의 향방이 라디슬라우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기병 수백 명 및 아내 이리니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 자그레브로 간 후, 1440년 7월 말에 라구사 공화국에 도착한 뒤 제타로 가서 부드바와 바르로 이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해 오스만 술탄국에 빼앗긴 세르비아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제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집안인 크르노예비치 가문이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1441년 4월 제타로 떠나 라구사로 이동했다. 오스만 측이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주라지를 넘기라고 요구하자, 라구사 측은 "우리 도시는 피난처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자유도시다"라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주라지가 라구사에 있는 편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장 좋은 보장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1443년 11월, 주라지는 후녀디 야노시의 헝가리군에 가담해 니시 전투와 즐라티차 전투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후 무라트 2세는 첩실 마라에게 그녀의 아버지에게 헝가리와 오스만 술탄국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주라지는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인 뒤, 후녀디 야노시에게 광대한 영지를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에 응하도록 했다. 그 결과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술탄은 1444년 세게드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했다. 그해 8월 22일, 주라지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 스메데레보에 돌아와서 정식으로 데스포티스에 복위했다. 그러나 그가 부재한 사이에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많은 영토가 베네치아 공화국 및 세르비아의 여러 영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의 권력은 오직 상부 제타 일대에서나 통했다.

2.2.3. 2번째 통치

1444년 11월 10일,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스만 술탄국과의 평화 협약을 깨고 십자군을 또다시 일으켰다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주라지는 대세는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오스만 술탄국에게 전적으로 충성했다. 한편, 주라지는 자기가 부재한 동안 광산 마을인 스레브레니차를 탈취한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토마시를 적대했다. 1445년 4월, 세르비아군이 공세를 개시해 스레브레니차와 드리나 계곡 전체를 탈취했다.

1446년 가을, 스테판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한 뒤 주라지와 협의해 두 사람이 마을과 광산 수입을 나눠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주라지는 내심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에 보스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448년 3월, 오스만군이 스테판 토마시의 영지를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해 9월 중순, 주라지의 처남 토마스 칸타쿠지노스는 토마시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스레브레니차를 공략했다. 1449년 2월, 토마시는 다시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했다. 이후 1451년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지만, 주라지는 끝내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하지 못했다.

1446년, 헝가리 섭정 후녀디 야노시가 바르나 전투의 참패를 설욕하고 니코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후녀디 야노시는 여러 통치자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그중엔 주라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참여를 거부했고, 후녀디 야노시가 준비하고 있는 원정을 무라트 2세에게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녀디와 그의 군대는 1448년 마치 적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처럼 세르비아로 진군해 모라바 계곡을 철저히 약탈했다. 그는 이에 대응해 알바니아의 영주 스컨데르베우가 후녀디 야노시와 합류하는 걸 저지했다.

1448년 10월 17~20일,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무라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2차 코소보 전투를 치렀다. 후녀디 야노시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퇴각하려 했지만, 도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체포되어 주라지에게 넘겨졌다. 주라지는 모라바 계곡을 약탈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지하 감옥에 한동안 가뒀다가 100,000두카트의 몸값을 받고 그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를 인질로 삼은 채 헝가리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451년 2월, 무라트 2세가 사망했고 뒤이어 메흐메트 2세가 새 술탄으로 등극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마라를 하렘에서 내보내 그에게 돌려보냈다. 1453년 4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감행했을 때, 주라지는 세르비아군 분견대 1,500명을 파견해 오스만군을 도왔다. 여기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아래에 터널을 파는 걸 돕고자 노보 브르도와 광부들을 보냈다. 노브 브르도 인근의 작은 마을인 오스트로비치 출신의 세르비아 군인이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에 참여했던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훗날 폴란드로 망명한 뒤 집필한 저서 <예니체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는 주라지에게 카라마니아의 영주에 맞서 싸울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라지는 이에 응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군인들은 돌아가고 싶었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고 한다.

주라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고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축하 인사를 건네게 했고, 메흐메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노포릴스의 교회 물품을 선물로 줬다. 또한 이피로스에 있던 루가의 유물이 그에게 구입되어 스메데레보로 옮겨졌다. 한편, 주라지는 포로로 잡혔던 많은 동로마 사람의 몸값을 내줘서 세르비아로 데려왔다. 이 중에는 프로코피우스의 사본 2권을 스메데레보에 가져온 건축가 도르제 칸타쿠지노스가 있었다.

그 후 코스탄티니예를 제국의 수도로 삼고 자신을 파디샤로 칭한 메흐메트 2세는 발칸 국가들 정복전에 착수했다. 그는 주라지에게 사절을 보내 스메데레보와 골루박을 넘겨준다면 소피아시 및 브란코비치 가문의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주라지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메흐메트 2세는 1454년 7월 데스포토비나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데스포토비나는 곧 함락되었고, 14세 이상의 남성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주라지는 공포에 질려 헝가리로 피신했고,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루드니크와 스메데레보를 포위했다. 루드니크 주민들은 자유롭게 다른 곳으로 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복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묵살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후 스메데레보 공방전을 이어갔지만 수비대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고전하던 메흐메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에디르네로 후퇴하면서, 수많은 세르비아인을 코스탄티니예로 끌고 갔으며, 크루셰바츠에 총독 3명을 남겨뒀다. 한편, 주라지는 헝가리군의 지원으로 스메데레보에 복귀했다.

후녀디 야노시는 1454년 가을 니시와 피로트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했다. 그해 9월엔 니콜라 스코발리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봉기군이 바냐 지역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노브 브르도 인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하고 오스만군에 사로잡힌 뒤 꼬챙이에 산 채로 찔려 죽었다. 1455년 봄,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다시 침공해 노브 브르도를 포위했다. 노브 브르도는 4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고, 메흐메트 2세는 일부 병사를 예니체리로 삼고 다른 병사를 처형했으며, 700명의 여성을 병사들에게 분배했고, 성 니콜라스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다. 뒤이어 세르비아의 옛 수도 프리즈렌이 함락되었고, 레비슈카 성묘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그 후 메흐메트 2세는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이듬해 원정을 준비했다.

1456년, 메흐메트 2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베오그라드 공방전을 치렀다가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에게 완패했다. 오스만군은 퇴각하는 동안 세르비아를 지나면서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군의 위협에서 당분간 안전해졌다. 그해 12월 24일, 주라지는 스레브레니차에서 생을 마감했고, 루드니크 산 아래 크리카 레카 마을에 안장되었다.

2.3. 멸망의 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숨을 거뒀을 당시, 그에게는 세 아들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스테판 브란코비치,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르구르와 스테판 모두 1439년 스메데레보가 함락될 당시 오스만 제국에 끌려갔다가 1441년 술탄 무라트 2세에 의해 실명형에 처해졌던 터라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했기에, 막내아들 라자르가 새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라자르는 1457년 1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 대한 가신 의무 갱신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면서도 헝가리 왕국의 가신을 자처했으며, 헝가리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후녀디 라슬로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에 참여했다. 이후 헝가리 정계가 내전에 휘말리자, 라디슬라우스에 반기를 든 후녀디 가문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후녀디 가문의 영지에 속한 코빈 등 다뉴브 강변 요새들을 공략했다.

한편, 그는 어머니 이리니와 갈등을 벌인 끝에 어머니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을 박탈하고 가혹하게 대했다. 이에 형 그르구르, 외삼촌 토마스, 여자 형제 마라가 이리니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리니는 도중에 붙잡힌 뒤 루드니크에 감금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라자르가 어머니를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1457년 12월 오스만 제국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라디슬라우스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라디슬라우스의 응답이 오기 전인 1458년 1월 20일 스메데레보에서 급사했다.

라자르 브란코비치 사후, 은둔 중이던 스테판 브란코비치가 새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그는 실명 상태였기에 통치할 수 없었고, 그 대신 미하일로 안젤로비치와 라자르의 미망인인 엘레니 팔레올로기나가 섭정했다. 엘레니는 친 헝가리 왕국 성향이었던 반면, 미하일로는 친 오스만 제국 성향이었다. 1458년 3월 말, 미하일로는 스메데레보에 튀르크 분견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같은 날 스메데레보 주민들이 튀르크군의 진주에 분노해 폭동을 일으켜 튀르크 장병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미하일로도 3월 31일에 체포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헝가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헝가리인들은 두 사람에게 방어를 위해 전제군주국을 자기들에게 맡기라면서, 그 대신 헝가리 남부의 일부 영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시라지 미하이가 이끄는 헝가리군 8,000명이 다뉴브 강을 따라 배치되어 강을 건너려는 오스만 제국군의 횡단을 저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헝가리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헝가리 왕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이 그르구르를 앞세워 공세를 벌이자 본래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영역에 속했던 영주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잇달아 투항하면서, 스메데레보와 골루박 만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에 남았다.

한편, 보스니아 왕국의 국왕 스테판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자 동로마 제국 공주인 엘레니 팔레올로기나의 딸 옐레나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지닌 며느리를 확보하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그 주변으로 축소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보스니아에 편입하려 했다. 1458년 10월, 명목상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자기 계획을 설명했고, 마차시 1세는 보스니아 왕국과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오스만 제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해 헝가리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헝가리 의회는 1459년 1월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세르비아에 대한 권리를 확인했다.

그 후 부더에서 옐레나와 결혼식을 치른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1459년 성주간 동안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중심지인 스메데레보에 도착한 뒤 3월 21일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에 즉위했다. 스테판 브란코비치는 데스포티스에서 강제로 물러난 뒤 4월 8일 추방 통보를 받고 세르비아를 떠났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토마셰비치의 집권을 자기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로 간주했다. 1459년 6월, 메흐메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스메데레보로 진격해 단숨에 포위했다. 이에 겁을 먹은 토마셰비치와 삼촌 라디보이 오스토이치는 6월 20일 보스니아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마을을 넘겼다. 오스만군은 1년 안에 세르비아 전역을 장악하고 자국에 합병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 이후

1471년, 헝가리 왕국의 국왕 마차시 1세는 세르비아 제3대 데스포티스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사생아인 부크 브란코비치를 데스포티스로 삼았다. 부크 브란코비치는 마차시 1세에게 충성하면서 그가 그가 보헤미아 왕국, 폴란드 왕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맞서는 걸 도왔으며, 세르비아로 침투해 오스만 제국군과 맞섰다. 특히 1479년 트란실바니아 지부트 인근 브레드필드 전투에서 세르비아 경기병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군 중앙 대열을 돌파해 승리를 견인했으며, 1481년 크루셰바츠 주변 지역을 급습해 주민 수 만명을 데려와 티미쇼아라 주변에 정착시키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끝내 세르비아를 탈환하지 못한 채 1485년 생을 마감했다.

1486년, 마차시 1세는 세르비아 제6대 데스포티스의 장남 도르제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도르제는 10년간 헝가리군이 오스만 제국과 맞서싸우는 걸 돕다가 1496년 데스포티스를 내려놓고 수도사가 된 뒤 베오그라드의 막심 대주교로 활동했다. 그의 동생 요반 브란코비치가 형의 뒤를 이어 데스포티스를 맡은 뒤 헝가리군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다 1502년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브란코비치 가문이 단절되자,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는 1504년 슬라보니아 출신 크로아티아 귀족 가문인 베리슬라비치 가문의 일원인 이바니시 베리슬라비치를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이 선택은 이바니시 베리슬라비치의 사촌인 프라뇨 베리슬라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었던 바르바라 프란보판이 결혼하면서, 베리슬라비치 가문이 브란코비치 가문과 연계된 점이 고려된 것이었다. 이바니시는 세르비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야크시치 가문의 일원이며 요반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인 옐레나 야크시치와 결혼하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

1514년 이바니시 베리슬라비치가 사망한 뒤, 아들 스테판 베리슬라비치가 1520년 러요시 2세에 의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되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군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은 뒤,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페르디난트 1세 헝가리 국왕으로 받드는 세력과 트란실바니아 공작 서포여이 야노시 헝가리 국왕으로 받드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스테판은 처음엔 서포여이를 지지했다가, 1527년부터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이에 서포여이는 1527년 세르비아 귀족 라디치 보지치를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세웠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칭하는 이는 2명이 되었다.

1529년 페르디난트 1세와 갈등을 벌인 스테판 베리슬라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귀순한 뒤 브로드를 중심으로 한 슬라보니아 포사비나의 국경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1535년 보스니아의 오스만 총독과 갈등을 벌이다가 예니체리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한편 라디치 보지치는 1528년 9월에 사망했다. 이후 수년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직위는 공석이 되었다가, 1537년 9월 20일 동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귀족 파블레 바키치가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파블레 바키치가 세르비아 귀족들을 규합해 슬라보니아의 바나테와 포제가 카운티, 부코보 바운티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길 희망했지만, 그는 1537년 10월 9일 고르자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고, 그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졌다. 그 후 누구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칭하지 않았다.

4.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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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스테판 라자레비치 주라지 브란코비치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토마스 칸타쿠지노스
주라지 브란코비치
제5대 제6대 제7대
라자르 브란코비치 스테판 브란코비치 스테판 토마셰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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