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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1:50:23

라디보이 오스토이치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장.png
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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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D7585> 코트로마니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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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토마셰비치 }}}}}}}}}

<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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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보이 오스토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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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voj Ostojić}}}
출생 미상
사망 1463년 5월 말 또는 6월 초 (향년 불명)
클류치 또는 야이체
재위 보스니아 반왕
1432년 ~ 1445년
아버지 스테판 오스토야
형제 스테판 토마시
아내 카타리나
자녀 트브르트코, 두라드, 마티아 라디보예비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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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반왕. 트브르트코 2세 스테판 토마시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2. 생애

보스니아 왕국 제4대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 사생아로, 친형제로 스테판 토마시가 있었으며, 이복형이자 스테판 오스토야의 적법한 아들로 스테판 오스토이치가 있었다. 1420년 이복형 스테판 오스토이치가 트브르트코 2세를 앞세운 보스니아 대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뒤, 그는 트브르트코 2세의 반대자로서 보스니아 왕위를 노렸다. 1428년부터 외국에서 보스니아 왕위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1431년 라구사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자기가 왕이 되는 걸 도와달라고 청했지만 무시당했다.

1432년, 라디보이는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라트 2세는 그를 보스니아 왕위에 앉혀서 보스니아를 오스만 제국의 완벽한 속국으로 삼기로 마음먹고 지원하기로 했다. 1433년, 라디보이는 오스만군과 함께 보스니아로 진군해 트브르트코 2세와 전쟁을 치르면서, 라구사 공화국에 2명의 대표단을 다시 보냈다. 그러나 라구사인들은 그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보스니아의 왕이라고 자칭하는 라디보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친헝가리 정책을 추진하는 트브르트코 2세에게 반감을 품던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인 주라지 브란코비치, 그리고 오스만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스니아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장악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유라이 보이살리치의 지원을 받으며 보스니아 중부와 북서부 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달리는 곧 중병에 걸려 대외 활동을 중단했고,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트브르트코 2세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에 만족해 라디보이를 더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라디보이를 계속 지원했고, 1434년에 그의 이름을 내세우며 보스니아의 수도 보보바츠를 공략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 왕국에 구원을 간절히 청했지만, 헝가리군은 1434년 중반이 되어서야 보스니아로 진군했다. 그들은 야이체, 호디제드, 보차츠, 코모틴 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철수했고, 탈환했던 영역은 도로 라디보이에게 넘어갔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과 함께 부더로 이동해 그곳에 머물렀다. 이리하여 라디보이가 사실상 보스니아 왕이 되었지만, 어떤 기독교 국가도 그를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1435년 오스만 제국이 라디보이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자, 라디보이는 트르브트코 2세 추종자들의 반격을 받고 자클루미아에 있는 코사차 궁정으로 피신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의 도움을 받아 보스니아로 복귀했다. 라디보이는 코사차 궁정에서 계속 보스니아 왕이라고 칭했지만,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443년 11월, 자식이 없던 트브르트코 2세가 사망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차기 국왕으로 라디보이의 남동생으로 지금까지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던 스테판 토마시를 지명했다. 이는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라디보이에게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보스니아 귀족 대다수는 선왕의 지명을 받들어 스테판 토마시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만 지지 세력은 라디보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라디보이는 라구사 공화국에 사절을 재차 보내 자기를 지지하고 토마시를 받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스테판 토마시를 후원하는 헝가리 왕국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자, 라디보이 추종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결국 그는 1445년 스테판 토마시와 화해하고 브란두크 요새 및 우소라와 솔라의 영지를 하사했고, 라디보이는 자신을 브란두크 공작이라고 칭했다. 1445년 5월 29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스테판 토마시와 라디보이 오스토야를 보스니아 전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했다.

1449년 6월 헝가리 귀족인 벨리카의 니콜라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아들이 없던 니콜라는 6월 19일 자신과 아내 마거릿이 죽은 후 슬라보니아와 헝가리 내 자신의 영지 1/3을 라디보이에게 물려주고, 라디보이도 보스니아와 슬라보니아에 있는 자기 영지 절반을 시부모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1458년 10월, 라디보이는 트로기르 출신의 니콜라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마린과 함께 헝가리에 사절로 가서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와 접견한 뒤, 조카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딸 옐레나와의 결혼 협상에 참여했다. 그는 이듬해 1월에 부더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에 조카와 함께 참석했고, 두 달 후에는 스메데레보로 가서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옐레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458년 6월, 오스만군이 세르비아를 침공해 라디보이와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있던 스메데레보 요새에 접근했다. 그는 요새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협의해 그곳을 오스만군에 곧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이에 마차시 1세는 라디보이와 스테판 토마시가 배신하고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 팔아 신앙을 버렸다고 비난했고, 라디보이가 헝가리에서 소유한 영지를 몰수했다. 마차시 1세는 자기 주장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고, 토마시는 이를 부인하기 만토바에 사절을 보냈다. 7월 10일 교황 비오 2세가 사절단을 마징했는데, 라디보이가 이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461년 7월, 스테판 토마시가 사망했다. 세간에는 라디보이가 스테판 토마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불확실하며, 그를 음해하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라디보이와 새로운 국왕이 된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해 9월 18일에 토마셰비치의 헌장이 발행되었는데, 라디보이의 모든 요새와 왕국 내의 다른 소유지를 "왕관에 대한 충실하고 진정한 봉사"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1463년 5월 오스만 제국이 보스니아에 쳐들어와 전국을 휩쓸자, 라디보이는 토마셰비치와 함께 크로아티아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토마셰비치는 5월 말 또는 6월 초 클류치에서 메흐메트 2세가 급파한 추격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라디보이도 이때 처형되었거나 그 직후 야이체 인근의 메흐메트 2세 진영에서 처형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