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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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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마이센 도자기

1. 개요

엘베 강 연안에 위치한 독일 작센주의 도시. 인구는 2023년 기준 약 29,000여 명.

그 유명한 마이센 도자기의 원산지로, 현재 작센주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드레스덴에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으며, S반으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2. 역사

슬라브족의 취락이 있었으나, 작센 왕조 독일왕 하인리히 1세 게르만족을 이주시키면서 독일인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마이센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089년부터 베틴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23년 작센- 비텐베르크의 아스카니아 가문이 절손되자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 선제후 작위를 하사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하면서 작센 선제후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1485년 베틴 가문의 분할 조약에 따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과 함께 알브레히트계의 영지가 되었다.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 교구는 해체되었으며 17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겸했던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에 의해 마이센 도자기가 생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 마이센 도자기

아우구스트 2세는 중국, 일본산 청화백자에 심취해 거액을 들여 백자를 수집하다가, 작센에서도 백자를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화학자 에렌프리트 폰 치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ß)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며 백자 연구소를 만들어 연구하였으나 처음에는 성과가 나지 않았다.

백자 제조에 돌파구가 열린 것은 요한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의 합류 덕분이었다. 만 18세 청년으로 자칭 연금술사였던 뵈트거는 프로이센에서 연금술 행각을 하다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감금당해 강제로 금을 만들라는 처지에 처하게 되자, 이대로 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판단하여 탈옥, 드레스덴으로 도피하게 된다. 뵈트거의 화학 능력을 알게 된 아우구스트 2세는 1707년 뵈트거를 치른하우스의 조수로 삼아 백자에 대해 함께 연구하게 되고, 1708년 치른하우스가 사망한 후 뵈트거가 수석 연구자가 된다. 그러던 중 뵈트거는 작센 영토 내에서 고령토 산지를 찾게 되고,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열 가마의 구조도 터득하게 된다.[1] 1710년 드디어 유럽 최초의 경질 백자인 마이센 도자기의 생산에 성공한다. 하지만 과로와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뵈트거도 백자 생산에 성공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1719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이후 마이센 도자기는 1722년부터 정식으로 상품화되어 출시되며 작센 선제후국의 문장에 들어있는 '교차된 검'을 상표로 사용할 권리를 받게 된다.


[1] 전임자 치른하우스는 고열 가마의 구조를 생각해 내지 못해 볼록렌즈로 태양빛을 집광하여 그릇 하나하나에 직접 쬐서 온도를 올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