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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9:43:36

구엘프

1. 개요2. 기원3. 12세기4. 13세기5. 구엘프의 분열과 이후 역사

1. 개요

이탈리아어: Guelfi
영어: Guelphs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특히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맞서 교황청을 지지하는 중세 이탈리아 파벌.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지지하는 기벨린을 상대로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이탈리아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기원

구엘프(Guelfi)는 작센 바이에른을 지배하던 벨프 가문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표기한 용어다. 1140년 바인스베르크 공방전 때 벨프 가문 하인리히 사자공 벨프 6세는 성을 공격하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구호로 삼아 피아식별을 하도록 했다. 이들에 대항하던 호엔슈타우펜 가문 콘라트 3세는 이에 대응해 "바이블링겐(Wibellingen)"라는 구호로 구별하도록 했다. 이후 벨프 가문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폭정에 맞서는 이들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구엘프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문헌상으로는 13세기에 작성된 <피렌체 연대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다만 토스카나 지방에 주로 사용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당"과 "제국당"이라는 이름을 선호했다.

3. 12세기

1125년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한 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는 선제후들을 소집했다. 독일 제후들 중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공작이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다른 제후들을 노골적으로 깔보는 행태를 보인 데다 너무 강력한 자가 황제가 되면 자신들에게 심각한 간섭을 할 거라 여긴 제후들은 작센에서 상당한 봉토를 가지면서도 나이가 많고 남성 상속자가 없었던 주플린부르크 가문의 로타르 3세를 새 독일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프리드리히의 동생 콘라드를 대립왕 콘라트 3세로 내세우며 반기를 들었다. 콘라트 3세는 112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라노로 가서 그곳의 대주교 안셀모 델라 푸스테를라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콘라트가 이탈리아로 가 있는 사이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1129년 뉘른부르크와 슈파이어를 공략했다. 반면 콘라트는 이탈리아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1130년에 돌아왔다. 그는 이후에도 로타르 3세에 계속 맞서 싸웠지만,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1135년 형 프리드리히와 함께 로타르 3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고 이탈리아 왕 직함을 포기하는 대가로 용서를 받고 뉘른베르크와 슈파이어를 돌려받았다.

그러던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사망했다. 이후에 열린 독일왕 선거에서, 로타르 3세의 사위인 벨프 가문 하인리히 오만공과 콘라트 3세가 출마했다. 선제후들은 바이에른, 작센, 토스카나, 스폴레토 등지에 방대한 봉토를 두고 있고 매우 오만하기로 정평이 난 하인리히가 독일왕이 되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콘라트 3세를 새 독일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하인리히는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의 충성 거부를 빌미로 삼고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하인리히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일 정계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지지 세력과 벨프 가문 지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1142년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벨프 가문은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콘라트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1152년 콘라트 3세는 임종을 맞이하면서 조카 프리드리히 1세를 새 독일왕으로 세웠다. 프리드리히 1세는 토스카나 변경주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유력 도시들의 반기로 인해 무력화된 후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를 제국의 치하에 재편입시키기 위해 1154년부터 6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으며, 황제가 교황의 밑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은 교황 하드리아노 4세와 마찰을 벌이다가 1159년 하드리아노 4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빅토르 4세를 지지하면서 교황청을 황제에 예속시키려 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이같은 움직임에, 이탈리아 정계는 두 패로 나뉘었다. 황제의 등을 업어 이득을 챙기거나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들은 프리드리히 1세를 지지했고, 황제에 맞서 도시 공동체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은 교황청의 지원을 받으며 프리드리히 1세에 대적했다. 파비아, 코모 등이 프리드리히 1세를 지지했고, 다른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롬바르드 연맹을 결성하고 프리드리히 1세에 대적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 대적하는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일시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자유를 쟁취하려는 도시 국가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좀처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벨프 가문의 수장인 하인리히 사자공은 한때 프리드리히 1세와 화해하고 협력하기도 했지만, 1176년 황제가 이탈리아로 출진했을 때 지원 요구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1176년 레나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연맹에게 참패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복귀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게 동조하는 제후들을 포섭한 후 1180년 사자공에게 불복종죄를 물어 제후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궐석 재판에 회부했다. 제국 법정은 제국법이 게르만 전통 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하고 사자공에게 법의 보호를 모두 박탈하는 형벌을 내렸으며, 그의 영지 역시 모두 몰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프리드리히 1세의 이어진 침략을 피해 잉글랜드 국왕이자 장인인 헨리 2세의 노르망디 공국 아르장탕 왕궁으로 피신했고, 그의 영지는 프리드리히 1세의 여러 신하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인은 벨프 가문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표기한 '구엘포(Guelfo)'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폭정'에 맞서는 이들의 상징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벨린과 구엘프라는 용어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4. 13세기

13세기 초,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속한 슈바벤의 필리프와 벨프 가문의 사위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는 차기 독일왕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필리프는 프리드리히 1세의 친척으로서 기벨린의 지원을 받았고, 오토는 구엘프의 지원을 받았다. 필리프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오토를 꺾은 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군림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교황청이 반발하고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싫어하는 도시 국가들도 저항하면서, 기벨린과 구엘프간의 정쟁은 심화되었다.

1235년,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치안 법령을 공포하고 롬바르디아 연맹을 쳐부수겠다고 결의했다. 1237년 기벨린 세력인 크레모나와 연합한 뒤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밀라노군을 격파한 후 자치도시( 코뮌)의 상징인 카로치오를 파괴했다. 이후 기벨린에 속한 도시 국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냐, 마르케, 페라라, 스폴레토 공국 및 교황령 일부를 합병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제노바 공화국과 연합했지만, 기글리오 해전에서 피사 공화국과 연합한 제국 함대에게 패배했다.

1241년 8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하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새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교회 약탈을 자행하면서 민심이 급격히 악화되자 카푸아에서 추기경 2명을 석방했다. 그는 1242년과 1243년에 걸쳐 로마를 향해 다시 공격했지만, 구엘프 도시들의 격렬한 저항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자신에게 대적하려 들자,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비테르보를 포위했다. 이후 인노첸시오 4세와 협상 끝에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비테르보에 수비대를 남긴 뒤 철수했지만, 비테르보의 지도자였던 라니에로 카포치 추기경이 수비대를 학살했다. 황제가 이에 분노해 재차 침공하자, 교황은 또다른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즉시 이를 깨고 구엘프 도시들을 계속 지원했으며, 튀링겐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를 독일왕으로 지지했다. 심지어 일설에 따르면 교황이 직접 프리드리히를 암살할 음모까지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가 암살 음모를 적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황제는 이에 분노해 로마로 진격했다.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으로 망명한 뒤 제1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해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뿐, 대다수 독일 제후들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거듭된 파문과 복권에 질려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1246년 그동안 그에게 대적했던 피렌체가 기벨린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황제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 틈을 타, 친아들인 프리드리히를 피렌체 시장으로 임명했다. 1248년, 볼로냐의 지원을 받은 피렌체 내 구엘프 파벌이 반란을 일으켜 한때 기벨린 파벌을 도시 탑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가 프라토 성에서 1,600명의 무장병들을 집결시킨 뒤 반격을 개시하자 지도자 루스티코 마리뇰리를 잃고 구엘프 도시들로 피신했다.

그러나 롬바르드 도시 파르마가 프리드리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려던 프리드리히가 매복 공격을 받고 패퇴한 뒤 다른 도시들도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리드리히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여기에 피렌체에 집권하던 기벨린 인사들이 도시에서 도주한 구엘프 인사들을 잡기 위해 출정한 틈을 타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고 추방당했던 구엘프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새 정부는 1250년 10월 20일에 결성되었고, 포데스타와 12명의 장로의 도움을 받는 새로운 인물인 인민 대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이탈리아의 혼란이 심화되던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이며 시칠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만프레디는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 기벨린 측은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을 맡은 콘라트 4세의 지원을 받았고, 콘라트 4세가 1254년 5월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만프레디의 지원을 받았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만프레디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토스카나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 파벌이 장악한 피렌체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했다. 새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알렉산데르 4세는 시칠리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을 동원한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선종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 공작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샤를은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뒤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1266년 2월 26일 베네벤토에서 만프레디를 패사시키고 시칠리아 왕위를 탈취했다. 이후 1268년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격파하고 사로잡은 후 나폴리에서 반역죄를 적용해 참수했다.

콘라딘이 처형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된 뒤, 구엘프와 기벨린이라는 용어는 제국과 교황권 간의 투쟁보다는 개별 가문 및 도시와 연관되었다. 당시 구엘프의 주요 거점은 볼로냐 시였다. 이 도시는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2세의 공격을 격파하고 황제의 아들을 사로잡는 등 상당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 외에도 시에나, 루카, 제노바, 페라라, 사보이, 안코나, 아퀼레이아, 페루자 등지에서 구엘프가 득세했고,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도시들은 기벨린과 구엘프간의 분쟁에 시달렸다. 특히 피렌체는 13세기 내내 구엘프와 기벨린 파벌간의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일반적으로 넓은 농지를 보유한 전통 귀족들이 기벨린의 입장을 취한 반면, 상인 및 부유한 시민들은 구엘프의 입장에 섰다. 그들은 소속에 따라 모자의 특정 면에 깃털을 달거나 특정 방식으로 과일을 자르는 등 독특한 관습을 채택했다.

5. 구엘프의 분열과 이후 역사

1289년, 기벨린 파벌은 캄팔디노 전투와 비코파사노 전투에서 구엘프 파벌에게 참패했다. 그후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한 구엘프 파벌은 1300년경에 구엘프 흑파와 구엘프 백파로 분열되었다. 구엘프 흑파는 교황을 전적으로 지지했지만, 구엘프 백파는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특히 백파는 보니파시오 8세의 성직판매와 정적 제거에 반감을 품고 거세게 맞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군대를 파견해 아나니에 머물던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구엘프 백파의 일원으로서 신곡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맹렬히 비난했다.

구엘프 파벌이 이렇듯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기벨린은 이후에도 종종 여러 도시의 정치 투쟁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1310년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에 진군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애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던 여러 도시의 귀족들이 대거 호응해 황제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장악하는 걸 도왔다. 1325년 기벨린 측 도시 국가 모데나가 구엘프측 도시 국가 볼로냐와 맞붙어 자폴리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1324년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것에 분노해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기벨린은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 황제가 로마에 입성하여 대관식을 치르는 것을 지지하고 로마의 정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했지만, 로마에서 요한 22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금세 무너졌다. 1334년, 구엘프와 기벨린의 오랜 대립으로 이탈리아 각지가 장기간 혼란에 빠지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긴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구엘프와 기벨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447년, 밀라노에서 구엘프와 기벨린 인사들이 협력하여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창설했다. 기벨린 측이 초기에 정권을 잡았지만, 이후 정권을 잡은 구엘프 측이 밀라노 자유의 선장 및 수호자 선출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점점 독재를 행사했다. 이에 조르지오 람푸냐노(Giorgio Lampugnino), 테오도로 보시(Teodoro Bossi)가 이끄는 기벨린 측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지만 1449년에 발각되었고, 많은 기벨린이 반역 혐의로 처형되거나 망명했다. 밀라노 시민들은 이에 혐오감을 느껴 구엘프에게 등을 돌렸고, 다음 선거에서 기벨린 파가 잠시 승리했지만 구엘프의 반격으로 무너졌다. 1450년 밀라노 원로원에 의해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공작이 된 후, 필리포 보로메오와 루이시노 보시 등 망명했던 기벨린 인사들이 밀라노로 돌아와 요직을 되찾았다.

그 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수많은 열강이 개입한 이탈리아 전쟁이 1494년부터 1559년까지 진행되는 동안 정치적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구엘프와 기벨린간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없게 되었다. 이는 1605년 선출된 교황 바오로 5세가 교황 문장에 최초로 기벨린이 주로 사용하던 라이히사들러(Reichsadler: 제국 독수리) 문양을 새긴 것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