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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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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Conclave
영어 Papal conclave

1. 개요2. 유래3. 교황 선거 방식4. 오늘날의 교황 선거
4.1. 교황의 사망에서부터 선거까지4.2. 교황의 퇴위에서부터 선거까지
5. 진행6. 기타
6.1. 한국인 추기경들의 콘클라베 참석
7. 창작물

1. 개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모임과 교황 선거 그 자체를 뜻한다. 어원은 '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onclave'이다.

2. 유래

가톨릭 교황직을 처음부터 콘클라베로 선출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 동서 로마 제국이 모두 건재했던 3세기 이전에는 로마 주교의 선출이 다른 지방 주교들의 경우와 크게 차별화되는 부분은 없었고 로마 교황도 처음엔 다른 지역의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내부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물론 클레멘스 1세 교황의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 사례에서 보듯 로마 지역 교회가 특별하다는 인식 자체는 있었지만[1] 박해 받는 처지에 오늘날과 같은 콘클라베를 한다는 건 당연히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로마 주교는 좁게는 라틴 교회의 대표자이며 넓게는 세계 주교단의 수장[2]이라는, 로마제국 정치의 최중요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서로마 제국이 공중 분해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이 기존의 2위이던 알렉산드리아를 추월하면서 수위권 분쟁의 조짐이 점차 일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탈리아를 일시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고 그에 따라 동로마 황제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로마의 주교 선출은 반드시 라벤나 총독부에 보고되어야 했다. 이렇게 로마 주교직의 선출은 점점 정치적인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769년에 행해진 시노드에서 정식으로 로마인 평신도에 의한 승인이 폐지되었지만, 862년의 로마 시노드에서는 귀족에 한해서만 그 권리를 부활시켰다.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는 교령을 발표하여 추기경으로 승격되려면 로마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교황 선출은 추기경단으로부터 선택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것이 바로 콘클라베의 시초다. 당시에는 주교급 추기경들이 최초로 모여 누가 다음 교황 자리에 어울릴까 하는 문제를 토의하여 결정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제급 추기경과 부제급 추기경도 동참하여 투표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국력 약화와 성상 파괴 위기를 겪고 비틀거리던 동로마가 라벤나 총독령의 절반을 상실해 교황좌에 대한 압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이후에도 이 문제는 여전했으며,[3] 9세기부터는 온갖 권력자들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의해서 마구 갈아치워지는 지경이었다.[4] 이에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교황 선거권은 추기경만이 가진다'라는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이 규정은 1378년 이후에 활발한 논의를 거쳐 다시 제정된다.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이나 추기경의 선출에서의 평신도와 하급 성직자의 동의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초대 교회의 주교들은 각자의 공동체 창시자에 의해 지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윽고 로마나 다른 지역에서 사제와 평신도, 이웃 교구의 주교들이 모이고 주교를 결정하는 방법이 취해지게 되었다. 교황으로 선택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성직자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에게는 교황을 결정하여 승인할 권리를 주었다. 주교는 보좌 및 감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교황 후보자가 결정되면 평신도의 동의가 요구되고 동의를 받으면 교황이 되었다. 민중이 큰 소리로 동의(또는 거부) 의사를 표하는 것은 고대 이래의 로마의 관습이었다. 선출 과정에서 불투명한 부분이 있으면, 후보자들끼리 분란이 일어나 대립 교황이 생기는 일도 자주 있었다.

파일:external/ignatiushisconclave.files.wordpress.com/cropped-cropped-council-of-trent1.jpg

프랑스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사망 후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으며, 추기경단은 압박을 참기 어려워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다. 나중에 선거에 부당한 압력이 가해졌다고 생각한 추기경단은 같은 해, 로마에서 다소 떨어진 폰디로 이동하여 다시 선거를 개최하여 대립교황을 선출했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자 1409년에 피사 공의회가 열렸지만, 결국 교황이 3명으로 늘어나는 등 사태만 더욱 악화하였다. 결국, 1411년부터 1418년에 걸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2명을 폐위시키고 남은 1명이 자진 퇴위하는 것으로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추기경단만이 교황 선거권을 가지는 것이 재차 확인되어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3세기까지 불과 7명에 불과했던 추기경단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확대되어, 1578년까지 인원이 놀라운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를 우려한 교황 식스토 5세는 추기경단의 인원을 70명으로 제한했다. 20세기까지 이 관례가 지켜지고 있었지만, 교황 요한 23세가 이 제한을 철폐했다. 후임 교황 바오로 6세도 교황 선거 제도의 개혁을 단행해 80살 이상의 추기경은 교황 선거에 참가할 수 없다는 제한을 걸어 두었다.[5] 바오로 6세는 투표권을 가지는 추기경단의 인원을 120명으로 지정했지만,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에는 한때 이 인원 수를 넘은 적도 있었다.

1179년까지는 투표자의 과반수의 지지를 얻으면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투표의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얻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교황 선거에서는 본인에게 투표하는 것은 인정되지 못한다. 교황 선거에서는 투표자의 익명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투표를 막는 교묘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 왔다. 교황 비오 12세는 필요한 득표 수를 3분의 2 +1표로 고쳤다.

이 3분의 2 득표에 의해 선거가 종종 지연돼 공석이 자주 발생했다. 교황 선거법에는 교황 선출이 될 때까지 공석 기간과 선거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268년 클레멘스 4세 사망 후 비테르보 교황궁 경내 성당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는 추기경들의 정치적 투쟁 때문에 무려 2년 9개월 하고도 이틀 후인 1271년에야 교황이 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금처럼 추기경들을 감금하는 형태의 콘클라베는 이때 정립되었다. 선거가 늘어지자 지친 비테르보의 시민들과 행정 당국자들은 성당의 문을 걸어잠가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지붕을 뜯어 빗물이 새게 함과 동시에 제공되던 물과 빵의 양을 줄여 선거를 독촉하는 조치를 취했다.[6] 이 일이 있은 직후 새로 즉위한 그레고리오 10세는 이것을 제도로 편입해 콘클라베의 절차를 새로 세웠으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3. 교황 선거 방식

일찍이 교황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두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덧붙여 발성에 의한 만장일치로 선출된 마지막 교황은 1621년에 선출된 그레고리오 15세이며, 선거 위원회의 주도로 선택된 마지막 교황은 1316년에 선출된 요한 22세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사문화되어 있던 앞의 두 가지 방법을 정식으로 폐지하고, 공식적으로 투표에 의한 결정만을 인정했다.

4. 오늘날의 교황 선거

파일:external/blogs.usyd.edu.au/conclaveinfographic.jpg

교황 선거에 관한 최신 규정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 헌장 《주님의 양떼》이다. 이 규정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관습을 정리하여 시대에 맞지 않은 부분만 수정한 것이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발성에 의한 선출과 타협에 의한 선출은 모두 인정되지 않아 폐지했다.

이 헌장에서, 추기경단은 전처럼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밀집 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며, 요한 바오로 2세 시절인 1990년대에 신축된 성 마르타의 집이라고 하는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시스티나 성당에 투표하러 가는 것으로 고쳐졌다.

주교급 추기경만이 될 수 있는 수석 추기경에게는 교황 선거에서 몇 가지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만약 수석 추기경이 연령 제한에 의해 선거에 참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차석 추기경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차석 추기경도 참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주교급 추기경 중에서 최고 선임자가 대신 역할을 행한다.

추기경단의 규모 자체가 생각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인원을 늘려 교황을 선택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오늘날과 같이 추기경단에 선거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에 맡기는 편이 좋다고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재 규정상 주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사람은 교황 뿐이다. 《주님의 양떼》에서는 시노드뿐 아니라 공의회조차 교황이 사망할 시에는 일단 휴회하고, 새로 선출된 교황에 의한 재개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4.1. 교황의 사망에서부터 선거까지

교황이 사망하면 교황 궁무처장(Camerlengo)이라는 직위에 있는 추기경이 입회한다. 궁무처장은 교황이 생전에 지명해 둔 추기경이며, 교황 부재 시에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황이 사망했다고 판단되면, 궁무처장이 은망치로 교황의 이마를 살살 두드리며 세례명으로 3차례 부르고 반응이 없다고 판단되면 죽음을 확인하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행해졌던 적이 없다. 《주님의 양떼》에서는 단지 교황청 전례 위원장과 성직자단의 대표, 교황의 비서, 사도단의 단장 등 80살 이하의 고위 성직자가 입회하여 확인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7]

확인이 끝나면 궁무처장은 어부의 반지라고 불리는 교황의 황금 반지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 추기경단 앞에서 반지에 공식 인장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2개의 깊은 흠집을 낸다.[8] 어부의 반지에는 교황이 작성한 문서에 찍는 인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교황의 사망이 발표되면 추기경단은 전원 집합하여 회합을 열어, 교황 선거에 관한 일정을 결정한다. 투표권이 없는 80세 이상의 추기경은 이 회합에 불참할 권리가 있다. 장례 미사를 포함한 교황의 장례 절차는 사후 4일부터 6일간에 걸쳐 행해진다. 그 후 교황청 전체가 9일간의 애도 기간을 갖는다. 이것을 라틴어로 9일을 의미하는 노베디아레스라고 한다. 교황 선거는 통상 교황 사후 15일 이후에 행해진다. 불참해도 무방한 80세 이상인 자를 제외한 모든 추기경이 다 모이지 않는 경우, 선거 개최일을 많게는 20일까지 늘릴 수 있다.

4.2. 교황의 퇴위에서부터 선거까지

교황이 스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는다면, 교황 본인이 물러나고 싶은 날짜를 스스로 선택하고 공고한다. 교황의 퇴위권은 순전히 본인 의사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를 수리하는 기관도 없다. 본인이 퇴위 선언하면 그것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교황이 물러나기로 공고한 날 새벽 4시가 되면 교황직이 공석이 된다. 그때부터는 사망 직후와 마찬가지로 문서 위조 방지를 위해 어부의 반지를 반납하고 이를 흠집 내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추기경단이 집합한 뒤 회합을 열어 교황 선거 일정을 결정한다. 이 경우에는 교황 본인이 스스로 물러난 경우이므로 퇴위 발표 뒤 전세계 추기경들에게 공식 사임 전에 미리 투표 날짜를 정하여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이롭다고 할 수 있겠다.

《주님의 양 떼》에서 콘클라베 개시 시점을 명시한 조항은 제37조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콘클라베는 교황의 사망이나 퇴위로 사도좌가 공석이 된 지 15~20일 사이에 개시해야 한다. 만 15일을 기다리는 것은 장례와 애도기간 포함해 약 15일, 그리고 아직 로마에 도착하지 않은 추기경들을 위한 배려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때(퇴위하기 전)인 2013년 2월 25일, 자의교서(Motu Proprio)를 발표하여 제37조에 “모든 선거인 추기경이 도착하면 선거 개시를 앞당길 권한도 있다”는 문항을 추가함으로써 일정이 앞당겨질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교황이 항상 공석이었던 통상적인 콘클라베와 달리, 600년 만의 생전 퇴위로서 이례적으로 교황이 살아 있는 중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9]

5. 진행



선거 당일 아침, 추기경단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여 미사를 올린다. 오후에는 바티칸 궁전 내의 파올리나 성당에 집합하여 <성인 호칭 기도>(Litaniae Omnium Sanctorum)[10]를 부르며 선거 장소인 시스티나 성당으로 이동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추기경 좌석에는 교황령 <주님의 양 떼>와 <콘클라베 예식서>(Ordo Rituum Conclavis), 시간전례서( 성무일도)가 구비되어 있다.

성당에 도착한 추기경들은 성령의 도움을 바라는 찬미가 Veni, creátor Spíritus(오소서, 창조주님)[11]를 부른 다음 한 명씩 선서를 한다. 선서 내용은, 만약 자신이 선출되었을 때는 성좌의 자유를 수호할 것, 선거의 비밀을 지킬 것, 투표에 대해 외부 압력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약은 먼저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의 주도로 다 같이 아래 선서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Nos omnes et singuli in hac electione Summi Pontificis versantes Cardinales electores promittimus, vovemus et iuramus inviolate et ad unguem Nos esse fideliter et diligenter observaturos omnia quae continentur in Constitutione Apostolica Summi Pontificis Ioannis Pauli II, quae a verbis « Universi Dominici Gregis » incipit, data die xxii mensis Februarii anno MCMXCVI. Item promittimus, vovemus et iuramus, quicumque nostrum, Deo sic disponente, Romanus Pontifex erit electus, eum munus Petrinum Pastoris Ecclesiae universae fideliter exsecuturum esse atque spiritualia et temporalia iura libertatemque Sanctae Sedis integre ac strenue asserere atque tueri numquam esse destiturum. Praecipue autem promittimus et iuramus Nos religiosissime et quoad cunctos, sive clericos sive laicos, secretum esse servaturos de iis omnibus, quae ad electionem Romani Pontificis quomodolibet pertinent, et de iis, quae in loco electionis aguntur, scrutinium directe vel indirecte respicientibus; neque idem secretum quoquo modo violaturos sive perdurante novi Pontificis electione, sive etiam post, nisi expressa facultas ab eodem Pontifice tributa sit, itemque nulli consensioni, dissensioni, aliique cuilibet intercessioni, quibus auctoritates saeculares cuiuslibet ordinis et gradus, vel quivis hominum coetus vel personae singulae voluerint sese Pontificis electioni immiscere, auxilium vel favorem praestaturos.
교황 선거에 참석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단체로서, 1996년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주님의 양떼》의 규정들을 충실하고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가운데 누가 하느님의 섭리로 교황에 선출되든 보편 교회의 사제로서 베드로의 교의(敎義)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과 교황의 영적·세속적 권리와 자유를 힘껏 지지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합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로마 교황 선출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그리고 선출 장소에서 발생한 것에 관한, 직접적 내지는 간접적으로 투표 결과와 관련돼 있는 비밀을 엄수할 것을 충심을 다해 모든 사람과 함께 약속하고 선서합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어떤 식으로든, 새 교황 선출 중이든 선출 후든, 선출된 교황의 분명한 허가가 없는 한 깨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선서합니다. 어떤 계층이나 지위의 세속적 권위 그리고 단체나 개인이 교황 선출에 개입하려 하더라도 모든 간섭이나 반대 또는 다른 형태의 개입에 대해서도 결코 지지하거나 찬성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선서합니다.

선서문을 낭독한 후 수석 추기경은 경당 중간에 놓인 복음서 앞으로 가 아래의 기도를 바치며, 이후 순서에 따라 추기경단이 모두 아래의 기도를 바친다.
Et ego N. Cardinalis N. spondeo, voveo ac iuro, (imponendo manum super Evangelium) Sic me Deus adiuvet et haec Sancta Dei Evangelia, quae manu mea tango.
그리고 나 (세례명), 추기경 (속명)은 그와 같이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하오니, (복음서에 손을 올린다) 하느님과 제가 손을 얹은 이 거룩한 복음은 저를 도와주소서.



선서가 끝나면, 교황청 전례위원장은 "Extra omnes."("모두 밖으로.")라고 외치고, 추기경단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내보낸 후 문을 걸어 잠근다. 전례위원장은 추기경단에게 교회가 직면한 위기 상황과 지금 요구되는 교황의 자질에 대해 설교한 후 투표를 지켜볼 수 없는 장소로 이동하고, 추기경단만 남아 본격적인 투표 절차를 시작한다

수석 추기경의 주도 아래 문답을 통해 선거법에 의문이 없는지 확인한다. 의문이 없으면 선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시작 전에 투표와 개표를 진행할 계표인과 검표인도 추기경단 중에서 추첨으로 결정한다. 선거는 수석 추기경이 콘클라베를 주재하게 되어 있으나, 수석 추기경이 선거권이 없으면 차석 추기경이, 차석 추기경도 선거권이 없으면 일반적 서열에 따라 선거인 추기경 중 최고령 추기경이 주재한다. 투표 개시에 늦었던 추기경은 해당 선거에 참가할 수 없다. 선거 중에 병환 탓에 건강이 나빠지면 퇴실할 수 있다. 그 경우에는 회복하고 나서 선거에 돌아올 수 있지만, 병 이외의 이유로 퇴실했을 때는 이후의 선거에 참가할 수 없다.

추기경단 이외에 교황 선거 중에 추기경들과 만나거나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추기경의 비서, 교황청 전례위원장, 의식장 등이며, 국제어에 능통한 몇 사람의 고해 사제, 2명의 의사, 요리사나 청소원뿐이다. 추기경뿐만이 아니라 스태프 전원이 선거의 진행이나 내용에 대해 중대한 비밀을 지킬 의무를 지니고 있다.

특히 추기경단은 외부 통신은 물론 접촉이 엄중하게 금지된다. 《주님의 양떼》에서는 특히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와 절대 접촉하지 말 것을 다짐하고 있다. 실제로, 2005년의 콘클라베에서는 추기경단의 숙소인 성 마르타 숙소에 전화나 인터넷 회선이 절단되어 성 마르타 숙소와 시스티나 성당에는 휴대전화 사용이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한 방해전파가 흐르는 등 전자적으로 경계 태세를 강화하였다.

곧이어 비밀 서면투표가 진행된다. 개표 직후 투표 용지는 불에 태워서 처리하는데, 선거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구설수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과거에는 만장일치였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과반수의 찬성으로 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가 전임 교황의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바꾸었다. 이는 미래의 교황들이 합의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면 가톨릭 교회의 일치와 운영에 지장이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표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추기경들은 이 기도를 바친다.
Testor Christum Dominum, qui me iudicaturus est, me eum eligere, quem secundum Deum iudico eligi debere
저의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님, 이 표가 하느님 뜻을 헤아려 제가 뽑혀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행사되나이다.

첫날 오후의 투표에서 당선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다음부턴 매일 오전/오후 2번씩 선거를 한다. 이 절차에 따라 3일 동안 투표를 하고서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투표를 하루 중단한다. 이후 이런 방식을 3번 실시, 즉 9일에 걸쳐 투표를 21회 해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궁내원장은 추기경들에게 선거 방식을 어떻게 할지 의견을 묻는다. 그 뒤의 투표 진행 방법은 선거인들의 과반수가 결정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만, 교황 선출은 3분의 2 이상 득표일 경우에만 유효하다.
파일:external/pope-election-2013.com/conclave-smoke.jpg
2005년 4월 19일 오후 3시 50분,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

투표 결과는 투표 용지를 태울 때 외부에 알려진다. 과거(1914년 베네딕토 15세 콘클라베 부터)에는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투표 용지와 젖은 짚단을 함께 태워서 불완전 연소되어 '미정'이란 의미의 검은 연기가 나도록 했고, 결과가 나왔을 경우엔 마른 짚을 함께 태워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흰 연기가 나오도록 했었다. 그런데 요한 23세가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 때는, 짚이 제대로 타지 않는 바람에 연기의 색깔이 불명확해져 회색 연기가 나온데다 양도 너무 적어서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아니 그래서 결과가 나왔다는 거야 안 나왔다는 거야?'라며 혼란을 준 적이 있었다. 때문에 1963년에 바오로 6세가 선출된 콘클라베에서는 이탈리아 육군이 제공한 백색, 흑색 연막탄을 써서 결과를 확실히 했다. 여기에는 TV 방송사의 압력도 있었다.[12]



위 영상은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당시 영상.

이후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부터는 교황 선출이 확정되었을 때 시스티나 경당의 굴뚝에서 흰 연기를 피운 후 성 베드로 대성당 시계탑의 종을 울리는 것을 병행하고 있으며, 기존의 투표 용지 소각용 굴뚝과는 별도로 선출 결과만을 알리는 굴뚝을 추가로 설치했다. 그리고 과학의 힘을 빌려서 염소산칼륨을 태워서 명확한 흰 연기와 검은 연기를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이 기사와 이 기사 참조.

차기 교황이 확정되면 수석 추기경이나 품계와 연배가 가장 높은 추기경이 선거인단을 대표해 선출된 사람의 동의를 구한다. 새로 선출된 교황은 자신의 왕호를 직접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속명[13]을 왕호로 쓴 마지막 인물은 1555년에 선출된 제222대 교황 마르첼로 2세(마르첼로 체르비니)였다. 새 교황이 '요한'이라는 인물을 평소에 존경하거나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싶어할 경우, 그 교황은 '요한 24세'가 될 것이다. 첫 번째 교황의 이름인 베드로 사용하지 않는데, 생전의 예수자신의 으뜸가는 수제자에게 직접 지어주신 이름 쓰자니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14] 성문법적인 금제는 없으며, 실제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가 물린 교황도 있다.

이후 추기경들은 새 교황을 알현하고, 선임 부제급 추기경은 외부사람들에게 새 교황 탄생 소식과 이름을 공표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파사드 가운데에 있는 강복의 발코니에 전 교황의 문장이 걸린 뒤[17], 새 교황이 모습을 드러내어 로마와 전 세계에 축복을 보낸다. 이 때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축복하는 것도 관례.



새 교황은 적절한 때에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로마 주교 착좌식을 거행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즉위식을 미루기를 바랐는데, 즉위식을 거행하기로 한 때가 하필 요한 바오로 2세보고 싶어하던 축구 경기가 방송되던 때(…)라 그렇다.[19]

6. 기타

교황을 뽑을 권한은 80살 미만의 추기경들에게만 있지만, 교황으로 뽑힐 자격은 가톨릭 세례성사 견진성사를 받은 남성 누구에게나 있다. 즉 선거 전에 미리 후보들을 추려서 그 후보들에게만 피선거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론상으론 모든 남성 신자에게 피선거권이 있는 것.[20] 즉, 80살이 넘은 사제도 교황 선거에 참여만 못할 뿐 교황 후보로 뽑힐 수 있다. 요즘 추기경들이 워낙에 능력자들이라서 그렇지, "이론적으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옆집 김씨 아저씨 같은 사람이 교황으로 뽑히는 것도 가능하며 미혼 등 조건만 충족한다면 연예인이나 정치인 신자도 이론적으로 불가능할 것은 없다. 2013년 콘클라베 때는 몇몇 도박 사이트에서 안드로메다급 배당률을 걸어 놓고 보노를 후보에 올려놓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 아일랜드 사람이니까 가톨릭 신자일 것이라 착각한 결과로 보인다. 문서에 나와 있듯 보노는 개신교(성공회) 신자다.

언론에서 교황을 선출하기 전 '유력 후보'라며 몇몇 인사들을 소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직책이나 정치 활동 등을 볼 때 교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암묵적으로 평가받는 성직자들을 분석해 추려낸 형태이다. 그래서 아예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지 않던 성직자가 깜짝 선출된 사례도 있다.[21]

다만 여기에는 약간의 제한이 있다.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 주교일 경우, 선출된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교황이다. 설령 어떠한 사정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교황으로서의 정통성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선출된 사람이 주교가 아니라면, 해당 인물이 결정을 받아들인 뒤 주교직을 서품받아야 한다. 주교품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교황이 되며, 만약 주교로 서품되지 않으면 교황이 되지 못한다. 이는 교황이 원칙적으로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절에는 이를 악용해 정치적 이유로 주교는 고사하고 신부조차 아닌 평신도가 교황으로 당선된 사례도 몇 차례 있었으며, 신부가 교황으로 당선된 예는 훨씬 많다. 현재의 가톨릭 교회법에도 이런 역사적 상황이 재현될 경우를 가정하여, 주교가 아닌 사람이 교황으로 당선될 경우 당선자가 교황직을 수락한 뒤에 최대한 빨리 주교로 서품받을 것과, 해당 서품식은 수석 추기경이, 수석 추기경이 없다면 차석 추기경이 집전할 것을 명시한 조항이 있다. 이게 완전히 확정된 것은 요한 23세 때로, 주교에 서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황에 즉위한 마지막 교황은 그레고리오 16세이다. 요한 23세 때 모든 추기경은 주교여야 한다는 제약이 생기기 이전에는 주교가 아닌 추기경도 가능했기 때문에, 주교가 아닌 사제가 교황으로 선출될 여지가 지금보다는 좀 더 있었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동안 시스티나 경당 주변은 금녀 구역으로서 어떠한 여성도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다.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이 전부 남성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 전통은, 비오 12세가 뽑히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깨졌다.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경당에 입장한 최초의 여성은 바로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 그녀는 비오 12세의 신임을 등에 업고 바티칸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서 여(女)교황 파스칼리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교회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콘클라베는 로마 지역 교회에 대하여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로마 주교가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을 서임하고 그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이 로마 주교를 선출하면서, 로마 지역 교회와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서로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는 예가 현대 교황들의 출신지인데, 폴란드 출신의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1978년부터 40년 넘게 이탈리아의 수석주교가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선출에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이 관여하면서 교황이 세계 교회에 대해 가지는 대표성을 실질적으로 보완해준다.

예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콘클라베 기간 동안 벌어지는, 차기 교황이 누구인지 예상하는 도박이 성행한 적이 있어서 바티칸 측에서 골머리를 썩힌 듯.

콘클라베 형식으로 1인을 선출하는 선거 방식을 교황식 선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부 의회 의장단 선거와, 대학 총장 선거 일부 의원내각제 국가의 대통령 선거에 유사한 방식이 사용된다. 다만 콘클라베와 달리 대통령 선거인단이나 의원들은 직/간선제로 선출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애초에 바티칸은 군주제이고[22] 대통령 선출은 공화정이기에 차이는 당연하다.

6.1. 한국인 추기경들의 콘클라베 참석

한국인 추기경의 콘클라베 참석은 2024년 10월 기준 딱 두 번의 사례가 있다.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1969년 서임)이 1978년(56세) 8월 6일에 제262대 교황인 바오로 6세의 사망 뒤 열린 콘클라베와 약 1달 뒤인 9월 28일에 263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해 곧바로 콘클라베에 참석한 것이 유이하다. 김수환 추기경 생전에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 이후 열린 콘클라베는 김 추기경 본인이 연령 제한(83세)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2006년에 서임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은 2013년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할 때 열린 콘클라베에 연령 제한(81살)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기사

2014년 서임된 염수정 추기경은 콘클라베에 참여한 적이 없고, 1943년 12월생이기 때문에 2023년 12월 5일부로 교황 선거권이 상실되었다.

2022년 8월 추기경으로 서임된 유흥식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도 아직까지 콘클라베에 참여한 적이 없다. 1951년 11월 생이기 때문에 2031년 11월까지 선거권이 있다. 다른 한국인 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유흥식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는 조만간 추기경에 서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향후 열릴 콘클라베에 참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1961년 8월 생이기 때문에 2041년 8월까지 선거권이 있다.[23]

7. 창작물



[1]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교단간의 갑론을박이 있기는 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인식 그 자체는 1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고, 로마 지역 교회는 베드로의 순교도시를 사목한다는 특별함은 인정 받았다. 게다가 굳이 그게 아니어도 당대 최대도시이자 로마의 수도였으니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2]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수장'이냐고 물으면 교단간 의견이 갈리지만. [3] 심지어 교회가 동서 대분열된 이후에도 교황직은 온갖 정치적 압력에 시달리는 판이었다. [4] 또한 아직 라벤나 총독부는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었으므로 동로마의 압력은 여전히 들어오고 있었다. [5] 현직 교황 선종 혹은 사임을 한 당일이 기준이며 1933년 3월 5일 출생한 독일의 발터 캐스퍼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당선된 2013년 3월 12일 콘클라베에서 80세 생일이 일주일 정도 초과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사임한 날짜가 2월 28일로 80세가 되기 5일 전에 교황직 공석이 되었기에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6] 미국 언론 ABC에서 작성한 기사에 따르면 “지붕을 뜯으면 추기경들에게 성령이 들어가실 수 있겠지!”라며 짖궂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7] 만 80세가 넘게 되면 추기경 직위는 유지되지만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8] 많은 사람들이 반지를 파괴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줄을 그어 지운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biffatura'의 오역인 것 같다."라고 베네딕토 16세의 교황 반지를 만들었던 세공사 클라우디오 프란치가 말했다. [9] 옛날에는 비행기도 없고 육로 및 해상교통으로만 바티칸에 갈 수 있었으니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지금은 비행기만 타면 하루이틀, 늦어도 사나흘이면 다 도착하고, 교황의 사망이 아닌 퇴위로 인한 콘클라베의 경우에는 장례 기간이 생략되기 때문에 이것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10] 라틴어, 한국어 [11] 참고: 『가톨릭 성가』 146번 '임하소서 성령이여'. [12] 다만 더 오래 전 옛날에는 (연기로 알리는 전통이 1800년대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연기의 색깔이 아니라 양으로 알렸다고 한다. 굵은 연기는 미결, 가느다란 실연기는 선출을 뜻했다. [13] 가톨릭권 국가에서 신자들은 대부분 세례명이 보통 때 쓰는 이름이기도 하다. 즉 '세례명 = 속명' [14]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12세기 아일랜드의 말라키 대주교의 예언에 따르면 마지막 교황의 이름이 '베드로'이며, 그 이후 교황은 없고 대심판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 예언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어떤 강심장의 교황이 이 예언을 알면서도 베드로라는 이름을 쓰겠는가. [15] 이하 한국어 번역은 한국어 위키백과 참고. [16] 베네딕토 16세의 선출 때에는 선두에 이 구문을 붙였지만, 후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출 때는 도로 빠졌다. [17]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우에는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빈 휘장이 걸렸다. [18]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도시와 촌락 전체'를 뜻하는 '京鄕(경향)'이 된다. 대한민국 일간지 경향신문의 경향이 바로 이 뜻이다. 뜬금없이 신문사의 이름에 '우르비 에트 오르비'가 붙은 것은 경향신문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경향신문은 원래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만들던 신문이었다. [19] 해당 경기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지역예선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회인 74년도의 3·4위 결정전에서 강호인 브라질을 꺾고 3위를 하여 한바탕 돌풍을 일으킨 폴란드가 또다른 강호 중 하나인 포르투갈을 상대하는 날이 바로 즉위식이 거행된 10월 16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2:0으로 폴란드가 이겼다. [20] 소설 천사와 악마에서, 악당이 이 점을 이용해 스스로 교황으로 선출되려 했다. [21]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비오 10세, 요한 23세가 대표적. [22] 상징적으로는 전제군주제이다. [23] 한편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조환길 대주교는 1954년 11월생,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인 옥현진 대주교는 1968년 3월생으로 만약 바티칸에서 서울대교구장 뿐만 아니라 대구 및 광주대교구장에게도 추기경을 서임해주면 이들은 각각 2034년 11월, 2048년 3월까지 콘클라베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한민국 출신 추기경은 대전교구장 출신인 유흥식 추기경(교구장 주교→교황청 장관)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대교구장 출신이기 때문에 두 대주교가 추기경이 될 확률은 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