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ascalina Lehnert독일 출신의 수녀로 바이에른의 에베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요제피나 레네르트다.
흔히 수녀님이라고 하면 연상되기 쉬운 인자하고 다정한 이미지와는 꽤나 거리가 먼 가톨릭의 여장부이며 이른바 여교황(La Papessa)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20세기 중반의 바티칸의 거물이었다. 여교황 요한나는 그저 전설에 불과한 인물이지만 이 수녀는 비록 여교황은 별칭일 뿐 실제 교황이 아니라 그냥 수녀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설 속 여교황보다 더욱 크고 강한 역사적 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1]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4년 8월 25일에 바이에른[2]의 에베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요제피나(Josephina). 1917년 성 십자가 멘칭겐 수녀회[3]에 입회하여 파스칼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무렵 이탈리아의 파첼리 추기경의 가정부 겸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4] 이 사람이 바로 뒷날의 교황인 비오 12세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파첼리 추기경과 친밀하게 지냈고 1939년의 콘클라베에서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라는 이름으로 등극하자, 그를 따라 바티칸으로 가서 직무를 수행했다.
2.2. '여교황' 파스칼리나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교황 비오 12세 재위 기간부터다. 비오 12세는 재위 말기에 신경쇠약이 발병하여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비오 12세의 치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도 겹쳤던지라 전쟁 말엽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을 이끌고 와서 바티칸을 포위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신경증이 발병한 시기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였으니 직무를 수행하기엔 참으로 피곤했다.결국 비오 12세는 비서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정치적 실무를 맡기고 자기는 종교적인 업무에만 전념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즉, 가톨릭의 최고 지위로서는 비오 12세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 바티칸'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는 사실상 그녀의 섭정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5] 그녀가 실권을 거머쥠에 따라 자연스레 바티칸에서 그녀의 입김은 매우 커졌고 추기경단은 수녀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좌지우지되는 사태를 보고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다만 후술할 그녀의 화끈한 일화와 성격 때문에 비오 12세가 즉위 전부터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교황 자리나 겨우 지키다가 그녀에게 권한을 맡기고 뒷방 늙은이가 된 인사로 여길 수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6] 오히려 비오 12세는 재위 초기에는 정무 감각과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교황 대사, 국무원장, 궁무처장 등 교황청 내 고위직들을 역임하며 즉위 전부터 교회법과 바티칸 외교 분야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한 인사였으며 교황 즉위 후에도 매우 깐깐하고 권위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활동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요약하자면 당시 그의 이례적인 권한 행사는 비오 12세가 교회에서 확고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실권을 대리자에게 맡긴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임을 보장받은 대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비오 12세의 신임이 없었다면 그녀는 바티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진작에 비오 12세에 의해 쫓겨났을 것이고 다른 고위 성직자들도 그녀의 행보를 그저 무시하거나 집단 행동을 통해 몰아냈을 것이다.
2.2.1. 왜 이례적이었는가?
천주교 성직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보충하면 천주교에서 수녀(여성 수도자)는 수사(남성 수도자)[7]와 함께 수도자로서 성직자[8]와 구별된다. 수도자는 사제만 집전할 수 있는 7성사와 사제만 집전 가능한 준성사[9]를 집전하도록 축성된 신분이 아니다. 수사는 사제 서품을 받은 수사신부(수도사제)와 평수사로 구분된다.그의 사례가 당시 가톨릭계에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무래도 사제가 될 수 없는 여성에게[10] 교황청의 주요 행정, 권력 관련 기능들에 관한 재량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여성 사제나 목회자가 허용되는 성공회나 개신교였다면[11] 상대적으로 덜 이례적인 현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신 근래에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개혁 노선을 반영해 수녀, 평신도를 비롯한 여성의 행정직 임명을 확대하는 추세에 있다. 주요 사례로는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시노드) 사무국장에 프랑스 수녀 나탈리 베라크를, 바티칸 재정을 감독하는 재무평의회 내에서 평신도에게 할당된 7명 중 6명이 여성 신자로 임명되었다. 바티칸 국무차관, 부대변인, 박물관장 등도 여성이다.
2021년 11월에는 바티칸의 행정 수반인 행정원장을 보좌하며 관련 실무를 총괄하는 바티칸 행정의 2인자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의 중책인 사무총장 겸 행정부원장에 이탈리아 라파엘라 페트리니 수녀가 임명되면서 여성으로서 바티칸 최고위직에 올랐다.[12]
2.2.2. '여교황'으로서의 행적
이에 고무된 그녀는 추기경들을 자기 맘대로 구워삶기에 이른다.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보면 그녀는 여교황이라는 비유가 비유가 아닐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일단 대주교 임명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의 뉴욕 대주교 자리에 당초 유력시됐던 맥니콜라스 대신 스펠만이 임명된 사건, 훗날 바오로 6세로 등극한 성직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가 밀라노 대주교[13] 시절 직책에 비해 발언권이 약했던 것도 비오 12세 교황의 신임을 등에 업은 그녀에게 밀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4]또 다른 공포스런 일화로는 프랑스 출신 외젠 티스랑(Eugène Tisserant) 추기경이 당시 바티칸 국무원장인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과 함께 교황 알현을 요청했으나 그녀가 이를 거부한 것이다. 티스랑 추기경은 화가 나서 그녀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녀는 근위병들을 호출한 후 티스랑 추기경을 밖으로 모시라고 명령했다.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티스랑 추기경은 물론이고 근위병들도 모두 당황했을 정도였나. 결국 티스랑 추기경은 근위병들이 강제로 붙잡고 나갔는데 화가 난 나머지 파스칼리나를 죽여 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녀는 뒷날 요한 23세 교황으로 즉위하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클라크 게이블이 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와 비오 12세 모두 게이블의 팬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스케줄로 잡혀 있었던 론칼리 추기경의 교황 면담을 취소하고 게이블의 교황 알현을 스케줄에 넣어 론칼리 추기경을 쫓아냈다. 그녀는 연예인의 알현과 같은 갖가지 이유로 추기경들의 교황 알현을 방해하는 식으로 추기경들을 길들였다.
참고로 뒷날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요한 23세로 등극하자 그녀는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될 줄 알았더라도 그를 바람맞혔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추기경은 여러 명이지만 게이블은 1명이잖아요."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상당수 추기경들이 이런 식으로 알현이 지연되거나 아예 거부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전술한 티스랑 추기경은 교황 한 번 알현하려고 60일이나 대기한 적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이러니 '여교황'의 통치에 못마땅한 추기경들과 그녀가 언쟁을 벌이는 건 아예 예삿일 수준이 될 정도였다.
이러는 사이 비오 12세의 신경증은 더욱 심해져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을 때 신경증으로 인한 딸꾹질 때문애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직무 중에 파리라도 날아다니면 그 파리를 잡을 때까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 때의 비오 12세의 주치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인성도 막장이었는지 그녀를 대상으로 파파라치 짓을 하다가 의료계에서 매장당하는 막장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교황의 여름 별장인 간돌포 성에 머무르던 비오 12세는 여름 기간이 끝나도 그 곳에서 나오지도 못 하고 끝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유언으로 교황의 중요한 메모를 소각했다가 추기경단의 수석인 티스랑 추기경[15]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평소의 비오 12세는 무척이나 권위주의적이고 고집스러웠고 이는 그의 오랜 친구인 그녀도 그러하여 바티칸은 한동안 두 교황의 통치에 이래저래 곤욕스러운 일을 많이 겪어야만 했다. 이에 질린 추기경들은 이제 좀 쉬자는 의미에서 콘클라베에서 조용하고 야심이 없어 보이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다만 뒷날 그가 가톨릭 교회에 대격변을 일으키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던 그녀는 교황이 바뀌자 별다른 잡음 없이 그대로 물러났다. 바티칸이 무슨 전제왕조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교황 비오 12세의 대리로서 직무를 수행했던 만큼 다툼은 없었다. 교황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실각한 그녀는 바티칸을 떠나 스위스의 한 수녀원에서 몇 년간 보내다 이후 자선 사업가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2.3. 요한 23세와의 갈등
요한 23세라는 이름의 교황으로 등극한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은 즉위하자마자 가톨릭 교회의 대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의 내용이 너무나도 방대하여 여기에 다 적을 수 없으므로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이런 교황의 진보적 행보에 분노한 그녀는 요한 23세가 과거 자기가 추기경이었을 적에 그녀가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하는 의미에서 위로하려고 그녀 자신을 불러낸 자리에서 교황설전을 하기까지 했는데 이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노선이 다른 것도 있고 해서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도 못했다.[16]
다만 요한 23세는 끝까지 자신과 대립했던 그녀에게 화 한 번 내지 않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였으며 사이가 마냥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니어서 그녀가 진행하는 자선 사업을 돕기도 했다.
1963년 요한 23세 교황의 사망 직후 장례 미사 참례를 위해 비행기로 도착하는 파스칼리나 수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사람의 생전 관계를 아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
2.4. 말년
만년(晩年)의 모습. 오른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말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원을 받아 자선 사업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3년 11월 13일에 오스트리아의 빈에 위치한 수녀원에서 사망하였다.
3. 기타 등등
엄청난 일 중독으로 유명했는데 한창 권세를 휘두르던 시절에는 바티칸 최고 권력자 역할과 교황 비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두 가지 일 모두 제대로 수행해냈다고 할 정도다. 심지어 말년에 자선사업을 할 때도 사망 직전까지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나머지 시간은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장수한 것을 보면[17] 그야말로 타고난 강골인 듯하다.바티칸 권력자로서 유명하지만 신학에도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다. 비오 11세의 연설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처음 발견하고 즉각 이 사실을 보고하여 연설 전에 연설문을 수정하게 만든 사례가 있다.
바티칸의 몇 안 되는 정치적 동지였던 스펠만 추기경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다.
이처럼 상관의 신임을 등에 업고서 권력을 누리는 측근 실세라면 수장에게 맹목적으로 충성, 아부하면서 권력을 누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는 다른 바티칸 성직자는 물론 직속 상관인 교황 비오 12세에게까지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비오 12세도 유능하며 고집 센 인물이다 보니 파스칼리나 수녀와도 종종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서로 쩌렁쩌렁한 고성이 오가는 건 예사였고 비오 12세가 그녀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는 증언까지 있다.
교황 비오 12세가 등장하는 가톨릭계 전기 영화 등에서 히로인(?) 역할로 나온다. 배경은 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바티칸.
[1]
그냥
힘만 휘두른 게 아니라 후술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능력도 인품도 뛰어났다.
[2]
당시에는
바이에른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의 일부였다.
[3]
1844년에
스위스 멘칭겐(Menzingen)에서 복녀 베르나르다 하임가르트너(Bernarda Heimgartner)가 창설한 수녀회.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4]
일반적으로는 공무 수행에 바쁜 고위
주교들이나
추기경들을 위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자산관리를 해주는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수녀들이 붙는다. 사망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곁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수녀가 있었다. 여담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수행비서였던 수녀의 말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아서 통장의 잔고는 늘상 바닥을 보였다고 한다.
[5]
일각에서는 이를 섭정 교황 내지는 바티칸의 정교분리라고 비유를 들기도 한다. 기나긴 가톨릭 교황 역사 속에서 정치적 실권과 종교 책임자가 분리된 시기는 매우 드물었다.
[6]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전제군주
숙종이 희빈 장씨 때문에 이미지가 퇴색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은 부부 관계나 불륜 등으로 인한 커플이 아닌 성직자로써의 동료나 상하 관계에 더 가깝긴 했다.
[7]
수사 중에는
사제로 서품된 성직수사와 그렇지 않은 평수사가 있다.(전자를 수사신부, 수도사제라고도 함)
가톨릭과
정교회는 여성의 서품을 불허하지만
성공회에서는 여성의 서품을 허용하여 성공회 수녀들 중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도 있다.
대한성공회에서는 2007년에 첫 여성 수도사제를 배출했다.(
성가수녀회 오인숙 가타리나 수녀)
[8]
주교품(
교황과
추기경도 품급으로
주교품에 해당),
사제품,
부제품의 삼품성직. 천주교에서는 "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
가톨릭교회법 제1024조)."
[9]
모든 준성사가
사제만의 고유 권한은 아니지만 일부 준성사는 사제와 부제만이 집전할 수 있다.
[10]
남성이라면 위에서 설명했듯이
수도자라도 성직자가 될 방법이 충분히 존재하겠지만
[11]
그나마
성공회도 1990년대에나 여성 사제를 인정했을 정도였고 반대의 목소리도 극심했다. 여성 성직 허용에 반발하여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12]
특히 파스칼리나 수녀가 공식 직책이 없이 교황의 개인적 신임에 의존해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는 달리 페트리니 수녀는 엄연히 공식 직책을 갖고 활동하는 것이다.
[13]
이를 '한직', '좌천'으로 묘사하는 이들도 있지만 밀라노는 인구 기준으로 이탈리아 최대의 천주교 교구이며 이곳의 교구장은 이탈리아 전체 주교회의 의장을 겸한다.
[14]
몬티니도 바티칸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원에서 근무하며 나름 비오 12세와 오래 근무했지만 아무래도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함께 했던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할 만큼은 못되었을 것이다.
[15]
위의 교황 알현을 거부당한 그
프랑스인 추기경이다.
[16]
파스칼리나 수녀는
요한 23세의 진보적 행보에 대해 굉장히 큰 불만을 품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도 이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17]
만 89세, 세는나이로 90세에 사망한 셈인데 지금도 평균 수명을 작지 않게 웃도는 수치로 당시에는 굉장히 장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