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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o III Pedro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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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239년 | |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 ||
사망 | 1285년 11월 11일 (향년 45~46세) | |
아라곤 왕국 빌라프란카 델 페네데스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276년 ~ 1285년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1282년 ~ 1285년 | |
아버지 | 차이메 1세 | |
어머니 | 헝가리의 욜란 | |
형제자매 | 알폰소, 비올란테, 콘스탄츠,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 페르난도, 산초, 이사벨라, 마리아, 산초, 레오노르 | |
배우자 | 쿠스탄차 2세 | |
자녀 | 알리폰소 3세, 차이메 2세, 아라곤의 이사벨, 프리드리히 3세, 비올란테, 페드로 | |
종교 | 기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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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0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제14대 국왕.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시칠리아로 진출해 아라곤 왕국이 지중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페드로 3세', 아라곤어로는 '페로 3세'이다.
2. 생애
1239년경 아라곤 9대 국왕 하이메 1세와 헝가리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딸 욜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형제 자매로 알폰소[1], 비올란테[2], 콘스탄츠[3], 마요리카의 하이메 2세, 페르난도(유년기에 사망), 산초(유년기에 사망), 이사벨라[4], 마리아, 산초[5], 레오노르(유년기에 사망)가 있었다. 1244년 아버지로부터 카탈루냐를 상속받기로 예정되었고, 1257년 법무 장관(procurador general)에 임명되었다. 1260년 이복형 알폰소가 사망한 뒤 아라곤 왕국의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1258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뒤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던 만프레디는 딸 쿠스탄차 2세와 결혼하고 자신과 동맹을 맺을 상대를 물색한 끝에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인 페드로를 점 찍고 사절단을 아라곤 왕국의 수도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손잡으면 지중해로의 진출에 큰 도움이 되고 아라곤 왕위를 위협하는 프랑스 왕국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만프레디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6]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시칠리아와 아라곤의 동맹을 교황령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여기고 하이메 1세에게 페드로와 쿠스탄차의 결혼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하이메 1세는 이를 무시하고 1262년 봄 쿠스탄차를 아라곤 궁정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함선에 몸을 싣고 바다로 떠났고, 1263년 6월 13일 몽펠리에에서 페드로 왕자와 만나 결혼했다. 페드로는 지참금으로써 아내에게 제노아 시와 피레네 산맥에 있는 콜리우레의 고대 왕궁 등 여러 재산을 넘겼다. 부부는 곧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다. 페드로는 용모가 뛰어나고 성격이 온화하고 총명한 아내를 깊이 사랑했고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쿠스탄차 역시 자상한 페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
1264년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었던 무르시아 토후국이 그라나다 왕국과 마린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왕비이자 하이메 1세의 딸인 비올란테는 아버지에게 카스티야를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하이메 1세는 페드로 왕자에게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로 가라고 명령했다. 당시 25세였던 페드로는 1265~1266년에 군사 작전을 벌여 무르시아 토후국의 에미르 무함마드 이븐 후드 비하 알 다울라(Muhammad ibn Hûd Biha al-Dawla)를 격파하고 무르시아 토후국을 제압해 그들로부터 상당한 영토를 뜯어냈다. 하이메 1세는 아들이 확보한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양도했다.
1275년, 카르도나의 라몬 폴크 5세, 로카베르티의 조프레 3세, 팔라르소비라의 아르나우 로제 1세, 에스푸리의 위그 5세 등 카탈루냐 귀족들이 아르탈 데 루나, 페리즈 데 리차나, 페레 코르넬, 시메노 도레아 등 아라곤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이메 1세의 사생아인 카스트로 남작 페르난도 산치스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페르난도 산치스는 하이메 1세의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에 가담하여 상당한 용맹을 떨쳤으나, 하이메 1세에게 반항하는 귀족들 편을 자주 들었고, 만프레디를 제압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한 카를루 1세와 접촉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다가 페드로가 자신과 귀족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발하면서 하이메 1세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려지자, 이대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느니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산치스를 격파한 뒤 1275년 6월에 포마르 드 싱카( Pomar de Cinca) 성에 가둬놓고 공성전을 벌였다. 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산치스는 양치기로 변장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싱카 강을 건너려던 중 체포되었다. 페드로는 이복 형제를 강에 던져 익사시키라고 명령했다.
1276년, 발렌시아 사라센들이 알 아즈라크의 지휘하에 아라곤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발렌시아 전역을 초토화했다. 사라센들은 여세를 이어가 루첸트(Llutxent)를 파괴한 뒤 알바이다 계곡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로 진격했다. 이렇듯 상황이 위급해지자, 하이메 1세가 이를 토벌하고자 출진했지만 알지라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국왕에서 물러난 뒤 포블레 수도원으로 은퇴하려 했으나 그해 7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아라곤 본토와 발렌시아, 카탈루냐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페드로 3세로 즉위한 페드로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영역은 페드로 3세의 친동생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아갔다.
페드로 3세는 즉위 직후 아라곤 왕국으로 쳐들어온 사라센들을 격파하고 발렌시아로 진격해 1277년 반란군이 농성하던 몬테사 시를 정복해 발렌시아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사라센 봉기로 인해 발렌시아가 황폐해지면서 국고가 큰 손실을 입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카탈루냐에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카탈루냐 귀족들이 분노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 3세는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의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소집한 뒤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전쟁은 3년간 이어지다가 1280년 반란군의 최후의 근거지인 발라게르를 공략하면서 페드로 3세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뒤, 페드로 3세는 바르셀리나 왕실 조선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조선소는 모서리에 4개의 탑이 있는 직사각형 평면의 큰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2개의 탑이 현존한다. 그는 이 조선소를 통해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장차 지중해에 영향력을 행사할 야망을 품었다. 특히 시칠리아가 그의 주요 목표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멸족시킨 카를루 1세에게 원한을 품은 왕비 쿠스탄차는 남편에게 시칠리아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카를루 1세에게 축출된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시칠리아 원정을 은밀히 준비했다.
페드로 3세는 먼저 시칠리아로 갈 때 왕국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 국가들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1279년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와 페르피냥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가 자신을 주권자로 받드는 선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1281년 알폰소 10세의 후계자 산초와 아그레다 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간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포르투갈 왕국의 디니스 1세와 자신의 딸인 아라곤의 이사벨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는 카를루 1세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함대를 건조하고 용병을 끌어모았다.
1282년 초,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튀니지로 출진했다. 그 후 그곳에 정박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해 3월 말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이 카를루 1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시칠리아 귀족들은 처음엔 아라곤 왕을 주군으로 섬기는 것에 마뜩치 않아 했다. 그들은 오직 교황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다며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충실한 동맹자인 카를루 1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그들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두려워한 끝에 튀니지 해안에 주둔 중이던 페드로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페드로 3세는 곧바로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루 1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시칠리아로 진격해 메시나를 포위했으나, 페드로 3세가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퇴각했다. 이후 카를루 1세는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페드로에게 "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1384년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앙주 해군 전체를 격멸하고 42척의 적선을 포획했으며,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면서 아라곤 왕위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4남인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샤를은 즉시 군대를 소집해 아라곤으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가 프랑스에 가담하면서, 프랑스군이 발레아레스 제도와 루시용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했다. 1284년, 필리프 3세와 샤를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루시용에 입성했다. 이후 지역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무릅쓰고 그 일대를 약탈한 그들은 1285년 지로나를 포위 공격해 아라곤군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지로나를 공략했다. 샤를은 그 곳에서 임시로 제작된 아라곤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스페인으로 달려온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프랑스 함대를 습격해 레 포르미게 해전에서 섬멸했다. 여기에 프랑스 진영에서 이질이 유행하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갔고, 필리프 3세 역시 병마에 시달렸다.
결국 필리프 3세와 샤를은 철수를 결심하고 페드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얌전히 돌아갈 테니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는 길목을 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페드로 3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콜 드 파니사르 전투에서 대파했다. 필리프 3세는 자기를 쫓아오는 페드로 3세를 피해 마요르카의 페르피냥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뒤 나르본에 묻혔다.
1285년 11월, 페드로 3세는 프랑스와 손잡은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다가 급병에 걸리자 빌라프란카 델 페네데스의 별궁에 실려갔다. 임종을 눈앞에 두자, 포로로 잡힌 모든 프랑스인을 석방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이 시칠리아를 공략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을 막으려 한 게 아니라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며 교황청에 사면을 요청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11월 11일 성 마르틴 축일에 사망했다. 2010년에 발굴된 그의 유해에 대한 법의학 연구에 따르면, 사인은 폐질환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와 대적한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교황 마르티노 4세 역시 같은 해에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 이후 신임 교황에 오른 호노리오 4세는 페드로 3세를 사면했다.
페드로 3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었다. 아라곤을 장남 알폰소 3세에게, 시칠리아를 차남 하이메 2세에게 물려줬다. 셋째 아들인 프리드리히는 하이메 2세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의 섭정이 되었고, 나중에는 프리드리히 3세를 자처하며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 페드로 3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데 산테스 크레우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835년 제1차 칼리스트 전쟁이 한창일 때, 프랑스 외인부대와 미켈레트(Miquelet: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산악 경보병)로 구성된 정부군이 수도원 건물에 머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페드로 3세와 아들 하이메 2세의 왕릉이 도굴되었고, 두 사람의 유해는 불에 탔지만 일부 유해가 겨우 살아남았다.
3. 가족 관계
- 쿠스탄차 2세(1249 ~ 1302): 아라곤 왕국의 왕비, 시칠리아 왕국의 14대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