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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6:26:12

로베르 3세 다르투아

파일:로베르 3세 다르투아.jpg
성명 로베르 3세 다르투아
Robert III d'Artois
생몰년도 1287년경 ~ 1342년 11월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필리프 다르투아
어머니 브르타뉴의 블랑슈
누이 마르그리트, 이자벨, 잔, 마리, 카트린
배우자 발루아의 잔
자녀 루이, , 잔, 자크, 로베르, 샤를
직위 보몽 르 로제 백작, 아르투아 백작위 주장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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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잉글랜드 왕국의 군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문서 위조 혐의로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백년전쟁 시기에 영지를 되찾기 위해 잉글랜드의 편에서 싸웠다.

2. 생애

1287년경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외아들인 필리프 다르투아와 브르타뉴 공작 장 2세의 딸인 블랑슈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르그리트[1], 이자벨[2], 잔[3], 마리[4], 카트린[5]이 있었다. 1297년 8월 20일, 아버지 필리프 다르투아가 플란데런 백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푸르네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이후 필리프는 1년간 고통에 시달리다 1298년 9월 11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로베르 2세 다르투아도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플란데런군에게 참패했을 때 전사했다.

본래라면 그가 로베르 3세로서 아르투아 백작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로베르 2세의 딸이자 필리프의 누이이며, 그의 고모인 마호트 다르투아가 아르투아 백국의 계승에 관한 관습법을 제시하며 이를 막았다. 아르투아 관습법에 따르면, 직함은 살아남은 자녀, 소년, 또는 소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그러나 영주가 죽기 전에 그의 아들이 이미 죽었다면, 손자가 이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명시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국왕 루이 8세는 로베르 3세의 증조부인 로베르 1세 다르투아에게 아르투아를 영지로 주었을 때 가문의 계승이 남성을 통해서만 이뤄질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마호트는 이 점을 근거로 내세우며, 자신이 로베르 2세의 딸로서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투아 귀족들 역시 15살 소년보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부르고뉴 공작 오톤 4세의 부인인 마호트 쪽을 선호했다. 결국 마호트가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고, 로베르 3세는 보몽 르 로제라는 작은 영지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로베르 3세는 이 상황에 격분했고, 고모를 축출하고 자신이 아르투아 백작이 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1309년과 1318년에 열린 법원 모두 마호트가 옳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이에 로베르 3세는 프랑스의 왕자인 발루아 백작 샤를[6]과 라틴 제국의 망명 황제 카트린 1세의 딸인 발루아의 잔과 결혼해 입지를 강화했다. 그러던 중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후사를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그는 처남 필리프 드 발루아가 프랑스 왕이 되게 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필리프 드 발루아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등극했다. 필리프 6세는 그의 헌신에 고마움을 느껴 수많은 연금을 제공했고, 자신의 친구이자 조언자로 삼았다. 1년 후인 1329년 마호트가 사망하고 마호트의 장녀 잔이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잔 역시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아르투아 백작위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파리 법원에 계승 문제를 3번째로 제기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이 불확실하다고 여겼다. 현재 아르투아 여백작인 잔은 부르고뉴 여백작이기도 했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미망인이기도 했다. 또한 잔이 사망한 후 그 뒤를 이어 아르투아 여백작이 될 것으로 예정된 장녀 잔은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의 부인이기도 했다. 그는 재판에서 승리하려면 확실한 물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아르투아 백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문서를 비밀리에 위조했다. 재판에 참석한 필리프 6세는 그를 소중한 동료로 여겼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척지기도 싫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르투아 백국을 분할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아르투아 백국 전체가 자신의 관할에 들어가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 재판에 참석한 법률가들이 면밀히 조사한 끝에, 1330년 12월 14일에 로베르가 제시한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위조 문서를 제작한 이는 베쑨 성의 영주 하벳 드 디비옹의 딸 잔 드 디비옹으로, 부친이 아르투아 여백작 마호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전 재산을 상실한 뒤 로베르 3세가 아르투아 백작이 되게 해준 후 재산을 돌려받고자 문서를 위조했다. 세간에서는 1329년 마호트의 사망과 1330년 1월 마호트의 장녀 잔이 사망한 것 역시 로베르 3세와 잔 드 디비옹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이것의 진의는 알 수 없다.

필리프 6세는 문서를 위조해 자신을 기만한 것에 분노했다. 잔 드 디비옹은 화형에 처해졌고, 로베르는 왕실 행정의 신뢰성을 훼손해 국왕의 권위에 모독을 가한 혐의로 형사 재판에 회부된 뒤 1332년 4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모든 소유물을 영구히 박탈당한 뒤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로베르는 플란데런으로 망명했다가 아비뇽으로 이동했고, 1334년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당대 프랑스 연대기들은 로베르가 당시 22살이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꼬드겨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고 기술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1336년 필리프 6세로부터 프랑스 왕국의 적으로 선포된 로베르는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고 플란데런 백국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로베르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 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에드워드 본인은 플란데런에서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이 투르네를 공략하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프랑스 북부 전역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 해 7월 25,000명 가량의 병력이 투르네 인근에 집결했다. 이렇듯 프랑스 측이 투르네 쪽에 시선을 집중했기 때문에, 로베르가 신속하게 움직였다면 프랑스군이 미처 대처하기 전에 생오메르를 공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와 에드워드가 병력을 규합하는데 시일을 지체하면서 중간에 정보가 샜고, 필리프 6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 휘하 1,000명을 생오메르로 파견하고 7일 후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휘하의 또다른 병력을 생오메르에 파견했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생오메르에 로베르보다 먼저 도착한 뒤 대부분의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도시 외곽 건물들을 파괴하고 성벽을 강화하는 등 방위 준비를 신속하게 수행했다. 한편 로베르는 주민들이 자신과 에드워드 3세의 대의에 호응해 대거 가담할 거라 여기고 천천히 진군했지만, 그가 생오메르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는 뜻밖의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행군을 이어가 1330년 7월 25일 생오메르의 인근 마을인 아르케스를 철저히 파괴한 뒤 셍 오메르 동쪽 외곽 평원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얼마 후, 필리프 6세가 이끄는 본군이 자신들의 후미를 쫓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로베르와 플란데런 장군들은 공성전을 벌이려 했다가는 성안의 수비대와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에 협공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적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섬멸해 승부를 빨리 내기로 했다. 그들은 생오메르 성 앞에 군대를 배치했다. 잉글랜드 장궁병과 브뤼헤, 이프르 출신 플란데런인들을 중앙에 배치했고, 페르네스 등지의 병사들을 좌익에 배치했으며, 베르겐 등지에서 온 병사들을 우익에 배치했다. 그 외의 플란데런 지역에서 온 민병대는 예비군으로서 숙영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며칠만 기다리면 왕이 온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성밖으로 나가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전의가 끓어오른 나머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도시 밖으로 나와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 좌익을 공격했다. 이들은 곧 격퇴되었지만, 연합군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도시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이에 후퇴하던 기사들이 반전하여 맞서 싸웠고, 오후 내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성벽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합군이 아군 기사들을 추격하느라 군대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보고, 각각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던 연합군 좌익을 공격해 적 대열에 구멍을 뚫었다. 플란데런인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패주하자, 아르마냐크의 부하들은 적 숙영지까지 추격했다. 그들은 무질서한 예비군을 공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반면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의 기병대는 연합군의 신속하게 반격을 가하고 화살비를 퍼붓자 곧 압도당했다. 연합군 중앙과 우익 부대는 본진이 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적 기병들을 물리쳐서 도시 방향으로 패주시킨 뒤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생오메르 북부 교외 지역을 침공했다.

생오메르 주민들은 적이 밀려오자 민병대를 결성하여 항전했고, 로베르는 이들을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전열을 가다듬은 수비대가 반격했고, 양자는 성문 바로 앞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자 로베르는 숙영지로 철수했고, 장 1세 역시 철수했다. 그들은 도중에 조우하여 몇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지만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베르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8,000명에 달하는 플란데런인들이 죽거나 도주했고 숙영지가 초토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신속하게 운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남겨둔 채 퇴각하여 에드워드3세와 합류했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쫓지 않았다.

1342년 10월, 로베르는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브르타뉴의 도시 반으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그 후 로베르는 런던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 공방전을 감행했다.

3. 가족



[1] 1285 ~ 1311, 에브뢰 백작 루이의 부인 [2] 1288 ~ 1314, 푸아시 수녀 [3] 1289 ~ 1347, 푸아 백작 가스통 1세의 부인 [4] 1291 ~ 1365, 나무르 백작 장 1세의 부인 [5] 1296 ~ 1368, 오말레 백작 장 2세 드 퐁티외의 부인 [6]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