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샤를 다르투아 Charles d'Arto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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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28년 ~ 1385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외 | |
아버지 | 로베르 3세 다르투아 | |
어머니 | 발루아의 잔 | |
형제 | 루이, 장, 잔, 자크, 로베르 | |
아내 | 잔 드 보카이 | |
자녀 | 루이 | |
직위 |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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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2. 생애
1328년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에서 아르투아 백작위 주장자 로베르 3세 다르투아와 발루아, 알랑송, 페르세, 샤르트르, 메인, 앙주 등지를 장악하고 아라곤 왕국의 명목상 국왕이자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이기도 했고, 프랑스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최강의 위세를 떨쳤던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인 발루아의 잔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잔[1], 장, 잔[2], 자크, 로베르가 있었다.1334년, 아르투아 백작위 계승권을 놓고 소송전을 벌이던 아버지 로베르가 베쑨 성의 영주 하벳 드 디비옹의 딸 잔 드 디비옹과 짜고 아르투아 백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문서를 비밀리에 위조했다가 발각당했다. 잔 드 디비옹은 화형에 처해졌고, 로베르는 왕실 행정의 신뢰성을 훼손해 국왕의 권위에 모독을 가한 혐의로 형사 재판에 회부된 뒤 1332년 4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모든 소유물을 영구히 박탈당한 뒤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로베르는 플란데런으로 망명했다가 아비뇽으로 이동했고, 1334년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이후 샤를은 어머니 및 형제 장, 자크, 로베르와 함께 샤토-가이야르 성에 투옥되었으며, 자크, 로베르가 투옥 중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350년 프랑스 국왕이 된 장 2세는 아직까시 살아있던 발루아의 잔과 장, 샤를을 석방했다. 이후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처형한 그는 장을 외 백작에 선임했다. 이후 장 2세의 생장당젤리 공방전에 참여했고, 1351년 8월 왕실 평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356년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의 노르망디 영지를 몰수하기 위해 원정을 개시한 장 2세에게 가담한 그는 카를로스2세의 동생인 필리프 드 나바르로부터 빼앗은 롱그빌 백국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이후 형 장과 함께 에브뢰와 브레퇴유 공략에 참여했으며,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다가 장 2세와 함께 생포된 뒤 런던의 호텔 드 사부아로 이송되어 4년간 억류되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면서 장 2세가 몸값을 지불하는 걸 보장하기 위해 잉글랜드에 계속 남았고, 롱그빌 백작령은 필리프 드 나바르에게 넘어갔다. 그 대신, 그는 1360년 10월 24일 페제나스 시와 성을 수여받았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에 가담한 뒤 지난날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딸 마호트 다르투아가 부르고뉴 공작 오톤 4세와 결혼하면서 부르고뉴 공작령에 넘어간 아르투아 백국과 부르고뉴 백국을 탈환하려 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이 소식을 듣자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1375년 샤를 5세와 화해했지만 다시 잉글랜드 편에 붙으려 했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체포된 뒤 용서를 구하고 왕의 사면을 받았다.
1380년 샤를 6세의 대관식에 프랑스 하원 의원으로서 참석했으며, 1381년 9월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온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브르타뉴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곧 돌아왔다. 1385년경 외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무테레-실리와 샹피니쉬르뵈드의 영지를 보유한 잔 드 보카이와 결혼해 외아들 루이를 낳았다. 그러나 루이는 어릴 때 일찍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