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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 전투 | ||
시기 | 1356년 9월 19일 | |
장소 | 프랑스 푸아티에 남쪽 모펠튜이 언덕 | |
원인 | 긴느 조약이 취소되면서 백년전쟁 재개.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공국 가스코뉴 공국 브르타뉴 공국 |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
지휘관 |
흑태자 에드워드 장 3세 드 그레일리 토머스 뷰챔프 윌리엄 몬타구 존 챈더스 |
장 2세
◎ 도팽 샤를 호담공 필리프 ◎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고티에 6세 드 브리엔† 장 드 클레르몽† 필리프 도를레앙 윌리엄 더글러스 |
병력 |
총원: 약 7,500명[1] 맨앳암즈: 2,000명 장궁병: 4,000명 경보병: 1,500명 |
총원: 약 16,000 ~ 20,000명 맨앳암즈: 13,000명[2] 석궁병: 2,000명 경보병: 1,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2,500명 포로: 2,000명[3] |
결과 | 잉글랜드의 대승. | |
영향 | 1360년 영국과 프랑스 종전협정 체결. 프랑스는 영국의 아키텐, 칼레, 퐁티웨, 푸아투 영토와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영국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을 철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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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attle of Poitiers
크레시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프랑스군이 다시금 잉글랜드군에 대패한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국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장 2세의 몸값이 훗날 아쟁쿠르 전투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 배경
1350년 전쟁이 재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리프 6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한다. 크레시 전역으로 전비가 바닥난 잉글랜드는 당분간 내정에 집중하면서 요충지의 요새들을 기반으로 방어전을 수행한다. 프랑스도 가스코뉴 원정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으로 전략을 수정해 국경의 요새들을 하나씩 공략하면서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한다.그러나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아직도 프랑스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국민들은 전면전을 회피하는 전략을 정부의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이해한다. 새 국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과 기회를 찾는 야심가들은 카페 왕가의 후손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한다. 국내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에 진이 빠진 장 왕은 결국 긴느 조약에서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의 주권을 양도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곧 카를로스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조약을 파기한다.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1355년부터 장 왕이 시도한 개혁들은 전부 실패하거나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참다 못한 장 왕은 1356년 4월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추종자들 중 일부를 처형한다. 이에 카를로스의 동생 펠리페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장 왕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인 6월에 에브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공은 예상된 목표인 랑그독 대신 북쪽으로 진군한다.
이에 장 왕은 랑그독에 배치된 야전군을 국왕군에 합류시키는 동시에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해 흑태자의 진군을 방해했다. 그리고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루아르 강의 다리들을 파괴했다. 흑태자는 투르 시를 점령하고 그곳의 다리를 통해 루아르 강을 건너려 했으나 결국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그동안 장 왕은 크레시 이전의 국왕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가용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야전군 편성을 가까스로 끝낸다.
프랑스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주저없이 군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으나 보병을 해산하면서까지 기동성을 높인 장 2세에게 퇴로를 차단당한다. 흑태자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 집결하기 전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절반의 성공만 거두고 궁지에 몰린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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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투 과정
▲전투 전개. 붉은 색이 잉글랜드군이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크레시 전투와 동일한 대형을 구축했다. 잉글랜드군은 좌측이 개천으로, 후방이 숲으로 막힌 방어가 용이한 지형에 포진했으며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우측면은 그간 약탈했던 막대한 양의 전리품들로 방벽을 구축했다. 이 우측면은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로마 시대의 가도가 위치해 있었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와 유사하게 기사들에게 하마를 명령하고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두세 개의 분견대로 나누어 중앙에 포진시키고 장궁병대를 V자 형태의 양 날개에 배치했다. 물론 그때와 동일하게 장궁병대의 앞에는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말뚝 등 기병의 진군을 막기 위한 온갖 장애물들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는 한편 소수의 기병대를 장 드 그레이 3세의 휘하로 두고 후방의 숲속에 감추어 두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4개의 제대로 편성되었는데 최전방에는 클레르몽 휘하의 300명가량의 기사들과 독일 용병대가 포진했다. 이 최전방의 임무는 아군 보병대가 활의 사거리 안에서 진군하는 동안 장궁병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의 배후에는 말에서 내린 맨앳암즈로 구성된 세 개의 부대가 배치되었다. 그 지휘관은 각각 후일 샤를 5세가 되는 샤를 도팽,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였다.
잉글랜드군 좌익이 거짓으로 퇴각하자 선봉에 선 300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그 미끼를 물고 돌격을 개시했다. 산울타리와 가시덤불이 깔려 있는 험지였기에 기병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은 가운데 뚫려 있는 도로 하나밖에 없었고, 잉글랜드 궁병들은 손쉽게 기사들의 측면을 노리고 사격을 퍼부었다. 마갑을 입지 않았거나 마갑이 얇은 측면에 화살을 맞은 말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기사들이 낙마하자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뛰쳐나가서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때 선봉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장 드 클레르몽이 전사했는데, 그가 전투 직전의 회담에서 잉글랜드군 지휘관 존 챈더스를 모욕한 일[4] 때문에 포로로 잡히지 않고 살해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
제1파가 무너지자 뒤따라오던 독일 용병대와 샤를 도팽의 중보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의 맨앳암즈의 수가 더 많았으나 갑옷을 입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느라 지쳐 있었다. 한편 선봉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사기가 오른 잉글랜드군은 성 조지의 이름을 외치며 맹렬하게 반격을 가했고, 말을 탄 궁수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맨앳암즈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프랑스군 측면에 자리를 잡고 화살을 쏘아댔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도팽의 부대가 패주하기 시작했고, 나이가 어렸기에 800명의 호위대와 함께 안전한 후방에서 전투를 관전하던 도팽과 다른 왕자들도 퇴각했다.
이때 즈음 해서 잉글랜드 장궁병대는 모든 화살을 소진한 상태였고 만약 프랑스군의 남은 두 개의 부대가 통제하에 들어왔다면 역전을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의 제3파가 패주하는 샤를 도팽의 부대를 보고 공황에 빠져 도망쳐버렸다.
오를레앙 공작의 부대가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것을 본 장 2세는 바로 공격을 개시했고 화살이 다 떨어진 장궁병대의 견제 없이 잉글랜드의 전열에 도달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화살을 모두 소진한 장궁병대는 신속하게 보병들에게 합류하여 진형을 형성하였고 일부는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전환했다. 흑태자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군의 정면을 향해 중기병 돌격을 감행하고 숲에 숨겨둔 200명의 기병대를 프랑스군 제4파의 측면과 후방을 향해 돌격시켰다. 사방에서 잉글랜드의 중기병들이 덮쳐 도륙을 해대자 포위의 두려움에 프랑스군은 그대로 도주를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도 장 2세는 끝까지 싸우다 측근들과 포로로 잡혔으며 ‘붉은 왕기 기수’인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끝까지 왕기를 지키다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기병, 보병, 궁병의 협동 플레이는 매우 매끄러웠다. 잉글랜드군은 기사가 보병으로 전환한 뒤에도 장궁병대의 엄호를 받아가며 싸울 수 있었고, 장궁병대 또한 말에서 내린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이 다시 기병으로 전환하여 중기병 차지를 통해 가장 치명적인 결정타를 먹이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잉글랜드군하면 주로 장궁병과 하마기사들이 부각이 많이 되는 편이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한방을 먹인건 바로 중기병이었다.
즉 이 전투는 잘 짜여진 전략, 전술, 시스템이 질적으로 우월한 적을 찍어누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이다.
4. 영향
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이러한 협정을 맺었네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은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진영을 정찰했으며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서 하마한 채 도보로 진격했다. 그 덕분에 더 오랜 시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결과만 보면 크레시 전투의 재판이었는데 이번에도 프랑스 기사들은 장궁병대에게 호되게 당했고 침착하게 대응한 잉글랜드군과는 달리 패퇴하는 아군을 보며 덩달아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체면도 완전히 구겨버렸다.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프랑스는 왕의 몸값으로 국가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장 2세는 런던에서 꽤나 좋은 대접을 받았고 몸값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마련할 수 없자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스스로 다시 잉글랜드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런던에서 수개월 후 병사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장 왕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왕권에 드리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용감하고 고결한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지금껏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모든 재난은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측근들과 사치에 젖어 군기가 빠진 기사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5]
5. 관련 문서
[1]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주장
[2]
잉글랜드의 3배인 8천 ~ 9천 정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연대기에 의하면 25명의 백작들과 공작들이 참전했고, 당시 프랑스의 백작들은 각각 400명 이상의 맨앳암즈를 동원할 수 있었다
[3]
포로 중에는 고위 귀족(lords) 17명, 백작 13명, 자작 5명, 기사 100명, 그리고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포함되었다.
[4]
챈더스의 문장이 자신의 것과 비슷한 걸 보고, 잉글랜드인은 독창성이 없어서 남들이 발명한 좋은 것을 훔치는 것밖에 못한다고 비웃었다.
[5]
이때 프랑스 민중들이 기사들에게 가진 분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게르만 왕국 기원의 사회 시스템상 기사계층은 전사로서 왕을 수호함과 동시에 자기영지의 백성을 보호하는 대가로 영지와 조세라는 특권을 가진다고 여겨졌는데, 평소에는 큰소리치며 그렇게 수탈하던 기사들이 정작 잉글랜드가 약탈을 하며 영지 백성을 학살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심지어는 끝까지 싸우며 포로가 된 왕까지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백성의 흉흉한 분위기 속 농민 반란으로 기사와 그 가족까지 싸그리 죽여버린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