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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60년 10월 4월 13~14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그랜드군이 프랑스 중부의 샤르트르 요새를 포위했다가 우박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방전.2. 상세
1358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 카를로스 2세는 자크리의 난을 틈타 발루아 왕조를 실각시키고 프랑스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왕태자 샤를을 지지하는 귀족과 주민들의 반격으로 파리에서 밀려난 그는 노르망디로 도주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일전에 카를로스 2세에게 연이어 속았던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간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뒀던 에드워드 3세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1359년 3월 24일,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런던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카를로스가 소유한 프랑스 영지를 포함한 많은 영토를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다.
샤를 왕자와 삼부회의 입장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재차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359년 늦여름, 4,000명의 맨앳암즈, 700명의 대륙 용병, 5,000명의 장궁병을 칼레에 집결시킨 그는 랭스로 진격해 5주 동안 랭스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워낙 굳건해서 함락이 어려워지자 1360년 봄 포위를 해제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교외는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샤를 왕자와 수비대는 파리 성에서 끝까지 버텼다. 천혜의 요새인 파리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었고, 프랑스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고 곳곳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급기야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들이 죽자,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1360년 4월 13일,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대성당이 있는 도시인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클리니 수도원장 앙드루앵 드 라 로슈가 이끄는 수비대는 요새 뒤에 숨어서 농성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맹렬한 폭풍우가 잉글랜드 진영을 강타했다. 우박이 사람과 짐승을 죽일 만큼 컸고 수없이 떨어졌기에 가장 용감한 자도 겁을 먹었다.
조슈아 반스의 <가장 성공한 군주 에드워드 3세>에 따르면, 이날 6000마리의 말과 거의 1000명의 병사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는 수치가 확인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고위급 기사인 기 드 뷰챔프 2세가 우박에 맞아 3주간 고통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볼 때 피해가 심히 큰 건 사실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하느님이 프랑스 왕국과 완전한 화해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징벌을 내렸다고 여기고, 샤르트르에 있는 성모 교회 쪽으로 몸을 돌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4월 14일, 앙드루앵이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샤르트르 공방전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이후 양국이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60년 5월 10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하는 대신 기옌과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는 내용의 브레티니 협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에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하고 풀려났고,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 여러 명 등이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리하여 1337년에서 1360년까지 23년간 이어졌던 백년전쟁의 제1기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