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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3년 9월 26일, 앙주와 메인을 약탈한 뒤 노르망디로 돌아가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의 습격을 받고 궤멸된 전투.2. 상세
1423년 7월 31일, 부르고뉴를 공략하기 위해 북상하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섬멸되었다. 헨리 6세의 섭정으로서 잉글랜드 치하 프랑스를 통치하던 베드퍼드 공작 존은 여세를 몰아 앙주와 메인을 공략하기로 하고 존 드 라 폴(John de la Pole)에게 이 지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423년 9월, 존 드 라 폴은 2,0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노르망디에서 출발하여 메인과 앙주 전역을 습격했다. 그들은 세그레를 점령한 뒤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1,200마리의 황소와 소떼를 노획한 후 노르망디로의 귀환길에 올랐다.당시 앙제에 있던 도팽 샤를의 시어머니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자신의 영지인 앙주가 심하게 약탈당한 것에 격분해 아르마냑파 인사들 중 반 잉글랜드 성향이 가장 강한 인사들에게 당장 보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들은 튀르네, 앙주 및 투렌의 방위 사령관 장 8세 다르쿠르에게 조속히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라고 지시했다. 때마침 생트수잔의 수비대장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적군이 조만간 라 브로시니에르를 통과할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장 8세는 앙드레 드 라발 몽모랑시, 앙브루아즈 드 로레와 함께 라 브로시니에르에서 잉글랜드군을 격멸하기로 하고 병력을 규합했다.
9월 26일 일요일 아침, 라 브로시니에르에 먼저 도착한 프랑스군 6,000명은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적이 오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했다. 2시간 후, 양측 정찰병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프랑스 정찰병들이 돌아가자 잉글랜드인들이 쫓아갔지만 프랑스 기병대에게 가로막히자 곧바로 물러났다. 존 드 라 폴은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파악하고 기병대로부터 병사들을 숨기기 위해 수송 마차로 이동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지휘관들의 인도하에 잉글랜드 보병대를 공격했지만 수송 마차에 의존하여 저항하는 적을 쉽사리 뚫지 못했다. 이에 일부 프랑스 기병대가 돌아서서 수송 마차가 커버하지 못하는 적의 측면을 요격했고, 잉글랜드군은 급격히 전의를 잃고 큰 계곡으로 흩어졌고, 프랑스 보병대가 이들을 쫓아가서 무차별 학살했다. 결국 존 드 라 폴을 비롯한 잉글랜드 장교들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1,200~1,400명이 전사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스군 측에서는 기사 장 르 루 한 명만 전사했고, 종자 몇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을 격멸한 뒤, 장 8세는 노르망디로 쳐들어가서 아브랑슈를 포위하고 생로 교외를 약탈했다. 하지만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양측은 이후에도 서로의 영지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