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0년 7월 23일 ~ 9월 25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플란데런 백국-브라반트-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이 플란데런-프랑스 국경지대의 투르네를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고 슬로이스 항구에 무사히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이 기세를 이어가 육지에서도 프랑스군을 무찌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난날 아르투아 백작위를 놓고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와 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 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에드워드 본인은 플란데런에서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이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 본대가 생오메르로 긴군하는 로베르를 요격하기 위해 그 쪽으로 이동한 사이, 에드워드 3세는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란데런군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가 이끄는 브라반트군, 에노 백작 기욤 2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함께 투르네로 진격했다. 당대의 프랑스 연대기는 연합군 규모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고 최대 23,000명, 최소 16,000명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에 맞서는 투르네에는 주민들 외에도 5,8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있었다. 이 수비대는 프랑스 국경 수비대장 라울 1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현지 주둔군과 필리프 6세가 파견한 푸아 백작 가스통 2세 드 푸아가 지휘하는 2,500~3,000명의 기병 및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1340년 7월 23일 투르네에 도착한 연합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공성 무기를 건설했는데, 그 중에는 대포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포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고 투르네 성벽이 매우 탄탄했던 터라 공성 무기를 통한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성내에 수천 명에 달하는 수비대가 밀집해 있고 수만 명의 주민들도 거주하고 있으니, 가만히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이 금세 바닥나 항복하거나 성 밖으로 나와서 싸우려 들 거라 판단하고, 성벽 주위에 참호를 파고 외벽을 쌓았다.
8월 26일, 한 달 넘게 이어진 공성전에 인내심을 잃은 플란데런인 2,000명이 성벽을 공격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9월 2일 공성추가 성문 앞으로 성공적으로 옮겨져 성문을 치기 시작했고, 성벽을 파괴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한 데다 신성 로마 제국군과 브라반트군이 잉글랜드 왕을 위해 피를 흘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공성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이로 인해 연합군 내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잉글랜드 의회는 에드워드 3세를 위해 5만 파운드 이상의 전쟁세를 거두기로 결의했으나, 막상 9월이 지나고도 그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연합군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했고, 연합군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이끄는 구원군이 투르네 인근에 이르자, 브라반트 공작과 에노 백작이 이끄는 장병들이 급여를 주지 않는다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필리프 6세와 평화 협상을 가질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프랑스 진영에서는 에노 백작부인이자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며 에드워드 3세의 시어머니이기도 한 발루아의 잔이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요청에 따라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필리프 6세는 전쟁이 발발한 1337년부터 1340년까지 화폐 가치를 5번이나 떨어뜨려야 할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마을이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에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연합군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잔은 9월 22일 연합군 진영에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도 같은 호소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는 양국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했다. 이후 연합군은 즉시 해산되었고, 필리프 6세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던 투르네 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헨트에 도착한 뒤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10월 28일 자신이 더 이상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면서 사과하는 글을 남겨둔 채 잉글랜드로 몰래 도주했다.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예고도 없이 도착한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장관들을 비난하고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총리, 런던 시장, 재무관 윌리엄 드 라 폴, 리처드 드 라 폴 등을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었다. 이러한 장관 숙청으로 인해 1341년 첫 4개월 동안 잉글랜드 정부는 마비되었고, 존 챈더스 휘하의 잉글랜드군은 런던 인근 마을과 작은 성을 약탈하고 불태워가며 왕을 위한 자금을 모으려 했다. 이로 인해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가 공개적으로 왕을 규탄했고, 귀족과 민중들도 분개하면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일었다.
에드워드 3세는 뒤늦게야 자신이 아버지 에드워드 2세처럼 반란군에 의해 폐위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1341년 4월 의회 회의에서 귀족들과 화해하고 과세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재정, 행정에 대한 왕권 행사에 규제를 두는 법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상황이 수습된 후인 같은 해 10월에 법령을 거부하고 스트랫퍼드 가문을 정치적으로 배척했다. 그 후 그는 슬로이스 해전에서의 완승을 근거 삼아 자신을 "바다의 군주"라고 칭하고 대륙에서의 활약상을 미화, 선전해 민중의 지지를 회복하고자 애썼다.
그러던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다. 필리프 6세는 처음에는 중립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나 몽포르가 잉글랜드와 연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륙에서 잉글랜드의 새로운 동맹이 생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를 지원해 내전을 조기에 종결하려 한다. 그러나 1342년 8월 몽포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군대가 마침내 브르타뉴에 도착하면서 2년만에 전쟁이 재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