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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09:54:33

장 3세 드 브라반트

파일:장 3세 드 브라반트.png
성명 장 3세 드 브라반트
Jean III de Brabant
생몰년도 1300년 ~ 1355년 12월 5일
출생지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사망지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아버지 장 2세 드 브라반트
어머니 잉글랜드의 마거릿
아내 에브뢰의 마리
자녀 , 마르그리트, 마리, 장, 앙리, 고드프루아
직위 브라반트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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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반트 공국의 공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챙기려 노력했다.

2. 생애

1300년경 브라반트 공국의 수도 브뤼셀에서 브라반트 공작 장 2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인 마거릿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312년 9월 27일, 장 2세는 코르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브뤼셀, 앤트워프, 스헤르도헨, 도시 대표들과 접견한 뒤 아들의 공작위 계승을 보장받는 대가로 영주들이 의회를 구성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며 도시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코르텐베르크 헌장>을 반포했다. 그 직후 장 2세는 사망했고, 영주들은 코르텐베르크 헌장에서 규정한 대로 의회를 구성한 뒤 12살의 어린 아이였던 장 3세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다.

하지만 브라반트 민중은 장 3세의 조부와 아버지가 쌓아온 빚으로 인해 해외로 나간 브라반트 주민들의 재산이 압류되고 있는 점을 들먹이며, 그의 집권에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장 3세는 코르텐베르크 헌장을 존중하고, 공국의 재정을 큐레이터에게 맡기며, 브라반트의 도시들에게 새로운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고, 주민들은 그 대신 공작의 빚을 갚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걷는 데 동의했다. 1314년, 도시들은 공국의 고위 관리들의 임명을 비준하고, 국가 재산의 양도에 동의하며, 주화 주조를 감독할 권리를 얻었다.

1315년, 장 3세는 반란을 일으킨 신민들 진압에 애를 먹고 있던 리에주 주교 아돌프 2세에게 도움을 제공했다. 131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0세는 브라반트 공국에 사절을 보내 자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플란데런 백국과의 무역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의원들은 플란데런 백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확보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중단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이에 루이 10세는 그해 2월 브라반트와의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브라반트 공국은 프랑스와 가까운 여러 영주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여야 했다.

1327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가신이었던 장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로부터 롬바르디아 원정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무시했다. 1332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추방당한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브라반트로 망명해 장 3세의 환대를 받았다. 필리프 6세가 이에 문제를 제기하자, 장 3세는 자신은 브라반트의 주권을 필리프에게서 양도받은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양도받은 거라며 그의 간섭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후 양자간 협상이 이어진 끝에, 콩피에뉴에서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르면, 장 3세의 장남 장은 필리프 6세의 딸 마리와 약혼하며, 프랑스의 파리 궁정에서 교육받기로 했으며, 로베르 3세 다르투아는 브라반트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그 후 로베르 3세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33년 6월, 플란데런 백국, 에노 백국, 헬러 백국 등이 방어 동맹을 맺고 브라반트 공국에 공동 대항했다. 1334년 초 메헬렌의 지배권을 두고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헬러 백국, 에노 백국이 플란데런 백국을 도왔고, 에브뢰 백작 샤를, 에탕프 백작 루이 1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달랑송이 장 3세를 도왔다. 이 전쟁은 2년간 이어지다가 필리프 6세가 아미앵에서 중재하면서 평화가 성립되었다. 필리프 6세는 장 3세가 티엘, 헤레바르덴, 잔드베이크를 헬러 백작에게 넘겨주고 그의 딸 마리를 헬러 백작의 아들 레지날트 3세와 약혼하도록 했다.

1337년, 프랑스를 상대로 백년전쟁을 시작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장 3세에게 접근해 6만 파운드를 줄 테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혹해 에드워드 3세에게 맨앳암즈 1,200명에게 줄 급료에 쓰일 자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1338년 앤트워프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를 환영하고자 직접 그곳에 갔고,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동참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에 있는 브라반트인들의 자산을 압류했고, 브뤼셀 시민들은 이에 분개해 집단 항의했다. 장 3세는 시위 주동자 한 명을 체포해 처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340년, 장 3세는 에노 백작 기욤 2세 등 저지대 영주들과 함께 에드워드 3세가 감행한 투르네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잉글랜드를 위해 병사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기에, 공성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드워드 3세가 약속한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면서, 연합군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이끄는 구원군이 투르네 인근에 이르자, 브라반트 공작과 에노 백작이 이끄는 장병들이 급여를 주지 않는다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필리프 6세와 협상한 끝에 1340년 9월 25일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이 체결되면서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의 휴전이 성립되었다.

1343년, 장 3세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딸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성립되지 않았다. 1345년 9월, 장 3세는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프랑스 사절과 만나 예비 협정을 체결했고, 1347년 6월 생캉탱에서 체결된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동맹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의 딸 마르그리트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과 결혼했고, 플란데런 백국과 브라반트 공국의 분쟁지였던 메헬렌의 영주권은 브라반트 쪽으로넘어갔다. 그 후 장 3세는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다가 1355년 12월에 사망했고, 빌레르라빌의 빌레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할 무렵 세 아들이 모두 사망했기에, 장녀 이 브라반트 여공작이 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