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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5년 8월 말 ~ 10월 4일,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파리 근교 생드니 요새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포위 공격한 공방전.2. 상세
1435년 5월 9일.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제르베로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노련한 지휘관이었던 아룬델 백작 존 피츠엘런을 생포했다. 이로 인해 플아스의 일드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이 한층 더 악화되자, 6월 1일 피에르 드 리외가 이끄는 1,500명 가량의 프랑스군이 파리 근교 생드니 요새를 기습 공략했다. 그들은 요새 주변을 흐르는 센강의 수운을 통제하고 파리로 향하는 도로 역시 가로막음으로써 파리에 물자가 공급되는 것을 방해했다. 여기에 파리 교외 농지와 과수원을 지속적으로 습격하여 파리 주민들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파리 주민들은 루앙에 거주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존의 병환이 위중했기에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그 대신 테루안의 주교이자 잉글랜드 및 프랑스 총리였던 룩셈부르크의 루이가 사촌인 룩셈부르크의 장에게 피카르디에서 500명의 부르고뉴군을 소집해 생드니를 탈환하게 했다. 여기에 존 탈보트와 로버트 윌로비가 이끄는 2,500명의 잉글랜드군이 파리로 이동했고, 1435년 7월 말에 토머스 스케일스가 이끄는 50명의 맨앳암즈와 728명의 장궁병이 합류했다.
8월 초,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그리고 잉글랜드 대표단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파리 주변의 전쟁은 이어졌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먼저 루브르 인근의 오르빌 성을 급습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프랑스 분견대를 쫓아낸 뒤 8월 마지막 주에 생드니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성벽에 대포를 발사해 큰 피해를 입힌 뒤 성벽에 틈이 생긴 지점을 공략하기 위해 600명의 돌격대를 편성하여 9월 9일 공격을 개시했다. 적군이 해자를 건너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자,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피에르 드 리외는 성벽에 있는 부하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고, 어떤 구역이든 위기에 처한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예비대를 배치했다.
격전은 2시간 동안 이어지다가 결국 돌격대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해자나 성벽 아래에서 80명 이상의 돌격대 장병 시신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적의 방비가 강건하니 무력으로 공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저히 봉쇄해서 굶겨죽이기로 했다. 9월 21일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간의 아라스 협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간의 동맹이 끊어졌지만, 부르고뉴 분견대는 끝까지 남았다.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상리스에서 생드니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 모집에 착수했지만, 연합군에 도전할 만큼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리외는 포위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도시를 넘겨주고 모든 포로를 돌려보내는 대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를 희망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10월 4일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기병 6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생드니를 떠났다.
잉글랜드군은 파리와 가까운 중요한 지역을 탈환했지만, 9월 24일 밤 프랑스군이 생드니 서쪽에 있는 묄렁을 기습 점령하면서 파리로 향하는 물류 운송에 차질이 또다시 발생했다. 게다가 부르고뉴 측은 아라스 조약 체결 후 잉글랜드군과 함께 하던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고, 베드퍼드 공작 존이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일주일 전에 사망하고 잉글랜드 수뇌부간의 권력 다툼이 거세지면서, 잉글랜드군은 이전처럼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공세를 펼치거나 효율적인 방어를 하기 힘들어졌다. 또한 생드니에서 풀려난 리외의 프랑스군은 1435년 10월 29일 디에프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킨 뒤 파리 교외를 또다시 약탈하고 시민들을 살해했다. 그 후 1436년 4월 13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2차 파리 공방전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