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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9:08:54

퐁발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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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발랭 전투
영어: Battle of Pontvallain
프랑스어: Bataille de Pontvallain
파일:퐁발랭 전투.jpg [1]
시기 1370년 12월 4일
장소 프랑스 왕국 샤르트 지방 퐁발랭
원인 샤를 5세의 영토 회복 시도와 잉글랜드 왕국의 반격
교전국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잉글랜드 왕국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로버트 놀스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토머스 그랜디슨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월터 피츠월터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존 민스터워스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베르트랑 뒤 게클랭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루이 드 상세르
병력 6,000명 5,200명
피해 궤멸 미미함.
결과 프랑스 왕국의 승리.
영향 프랑스 왕국의 영토 회복.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70년 12월 4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한 잉글랜드군을 대파한 전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를 거듭하던 잉글랜드군이 참패를 당한 첫번째 회전이다.

2. 배경

1337년 전쟁 발발 이래 수십년간 여러 전투를 치렀던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은 1360년 브레티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하는 대신 기옌과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끌려갔던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하고 풀려났고,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 여러 명 등을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리하여 전쟁은 일시적으로 종식되었지만, 프랑스 왕실과 백성들은 잉글랜드에게 매우 유리한 이 협약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이후 용병들의 약탈과 민병대간의 소규모 접전,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부르고뉴 공작령 확보 시도, 카스티야 연합 왕국 내전 개입 등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평화를 유지하던 양국은 1369년에 이르러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벌일 기미가 감돌았다. 1367년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했다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막대한 전쟁 비용만 허비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한 조치는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1369년 1월 25일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가 파리에 직접 와서 아키텐의 명목상 주군인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프랑스 백성들에게 불법적인 세금을 매긴 것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는 "기꺼이 파리로 가겠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투구를 쓰고 6만 병사들과 함께 갈 것이다."라고 응수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잉글랜드는 에드워드가 아키텐에서 북상하고, 로버트 놀스가 칼레에서 남하하며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는 작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이 때를 틈타 1370년 봄 2개의 군대를 일으켜 아키텐을 전격 침공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라 레울과 베르주라크를 거쳐 기옌으로 진격했고, 베리 공작 장이 이끄는 군대는 리모주를 향해 진격했다. 두 군대는 앙굴렘에서 합류한 뒤 에드워드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맞서기 위해 병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마차에 의지한 채 코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푸아투 남작, 생통주 남자, 케임브리지 백작, 랭커스터 백작, 펨브로크 백작과 합류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리모주 주교이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였던 장 드 무라 드 크로스가 프랑스군이 리모주를 포위한 지 사흘만에 항복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이에 격분해 자신과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그곳을 탈환한 뒤 주민들에게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9월 14일 리모주에 당도하여 포위 공격을 개시했고, 9월 19일 함락한 뒤 리모주를 초토화했다.( 리모주 공방전) 이후 보르도로 귀환했다가 부재 중에 큰아들인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비탄에 잠겼고, 형제인 곤트의 존에게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수비를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한편,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은 1370년 8월 칼레에 상륙했다. 그는 솜 일대를 진군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랭스 시 외곽에서 무력행진을 벌였고, 뒤이어 트루아를 위협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느무르에서 파리로 접근했다. 그의 군대는 많은 마을을 점령하고 몸값 지불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파괴했다. 9월 24일 파리에 도착했지만 수비가 매우 견고해 공략이 불가능하자 파리 주변의 수많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해 수비대가 격분하여 요새 바깥으로 나오게 해 회전을 벌이려 했으나, 수비대가 이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결국 파리 공략을 포기한 놀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루아르 강변의 여러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고 푸아투나 노르망디 남부로 진군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에드워드가 북상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리모주 함락 후 보르도로 돌아간 뒤 꿈쩍도 하지 않았다. 10월 2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얼마 후 장 4세 드 모켄시 휘하의 브르타뉴 분견대와 합세해 4,000명을 확보했으며, 뒤이어 샤텔로에 집결한 루이 드 상세르 휘하 1,200명과 합류했다. 12월 1일 캉을 출발한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이르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건설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13주분만 지급했기 때문에,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매우 컸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 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 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3. 전투 경과

12월 3일 밤,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느라 지친 병사들을 독촉하여 야간 행군을 시작해 12월 4일 이른 아침에 퐁발랭에 도착했다. 토머스 그랜디슨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서둘러 전투 대형을 결성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프랑스 중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화살 몇 발만 쏜 뒤 숲으로 도주했지만, 적의 맹추격으로 인해 대거 학살되었다. 그랜디슨의 부대는 샤토 드 라 페뉴 성벽 아래로 피신했다가 적이 쫓아오자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끝내 섬멸되었다. 퐁발랭 전투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이는 이는 토머스 그랜디슨 외 몇몇 고위급 장교 뿐이었다.

게클랭은 적군을 섬멸한 뒤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피츠월터 쪽으로 향했고, 일부 병력에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피츠월터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스 수도원 내로 피신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버텨보려 했다. 그러나 루이 드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츠월터의 잉글랜드군과 거의 동시에 수도원에 도착했고, 수비대는 상세르의 즉각적인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적절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압도되었고, 게클랭이 뒤이어 도착한 뒤 패주하는 잉글랜드군을 대거 사로잡았다. 피츠월터를 비롯한 몇몇 고위급 장교들이 생포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 장병은 섬멸되었다.

퐁발랭과 바즈에서 용케 빠져나왔거나 다른 곳에서 약탈하느라 합류하지 못했던 잉글랜드인들은 루아르 남쪽의 생소뵈르로 향했다. 약 3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사토 드 쿠르시용 성을 점거했지만, 곧 그곳을 떠나 생모르르루아르라는 여울목으로 이동했다. 그곳 너머에는 잉글랜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있었다. 이후 수도원의 잉글랜드군과 합세한 그들은 보르도로 향했지만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자 샤토 드 브레수아르 성으로 피신했다. 그곳 역시 잉글랜드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보고 겁에 질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결국 패잔병들은 성 아래에서 프랑스군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후 게클랭과 상세르는 놀스가 약탈 행진 동안 점령했던 모든 마을과 성들을 탈환한 뒤 놀스와 민스터워스의 영국군을 추격했다. 놀스와 민스터워스는 곧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4. 이후

대다수 병력을 잃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로버트 놀스와 존 민스터워스는 심한 비난에 시달렸다. 민스터워스는 패전의 책임을 놀스에게 떠넘기려 했고, 귀족들은 같은 영주인 민스터워스보다는 일개 기사인 놀스 쪽이 책임을 떠넘기기 쉽다고 여기고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놀스를 개인적으로 아꼈던 흑태자 에드워드 곤트의 존이 놀스를 옹호했고, 에드워드 3세는 민스터워스가 놀스의 명령에 불복종했으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민스터워스는 에드워드 3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 편에 가담했다. 이후 샤를 5세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는 1377년 초 카스티야로 가서 침공을 위한 병력, 물자, 수송선을 준비하려 했으나 그해 3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기스코뉴 지주에게 체포된 뒤 잉글랜드로 끌려가서 런던 탑에 수감된 후 반역 혐의로 참수되었다. 한편 놀스는 패전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지는 않았지만 10,000마르크의 벌금이 부과되고 영지가 몰수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와트 타일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명예를 어느정도 회복했으나 다시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고, 1407년 사망했다.

게클랭은 퐁발랭 전투에서 전사한 아군 시신들을 한 곳에 묻고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1828년, 이 무덤 옆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1370년 11월 퐁발랭 전투 이후 영광스러운 기억을 지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그의 충실한 브르타뉴인들을 이 곳에 안식시켰다. 부상자를 위해 오두막이 세워진 근처의 느릅나무와 죽은 자 위에 심어진 나무 십자가가 이곳에 Ormeau 또는 Croix-Brette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프랑스 국민들이여! 내부 불화와 외국의 침략이 더 이상 아름다운 프랑스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오.

[1]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기재된 퐁발랭 전투 삽화. 그레고리오 11세의 즉위식과 함께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