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혼 전투 영어: Battle of Kinghorn |
||
시기 | 1332년 8월 6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웨스터 킹혼[1] | |
원인 | 스코틀랜드에서 재산을 잃은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왕위 쟁취 시도 | |
교전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파이프 백작 던컨 4세 |
에드워드 발리올 헨리 드 보몽 |
병력 | 4,000명 | 1,500명 |
피해 | 상당수 | 미미함. |
결과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영향 | 더플린 무어 전투 발발 |
[clearfix]
1. 개요
1332년 8월 6일,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앉히려는 잉글랜드 귀족들이 스코틀랜드의 해안 지대인 킹혼에 상륙을 시도하면서 벌어진 전투. 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2. 배경
1328년 5월 1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끝에 잉글랜드 왕국의 권신 로저 모티머와 노샘프턴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이때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내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의 재산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모조리 몰수되어 자신을 추종하는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깊은 반감을 품은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과 잉글랜드에 협조하다가 로버트 1세에게 쫓겨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장차 스코틀랜드를 도모하고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했고 아들 데이비드 2세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에 로버트 1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전우였던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았다.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스코틀랜드를 칠 야심을 품었다.
1330년 10월 19일, 에드워드 3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신 로저 모티머를 처형하고 자신의 어머니이자 모티머의 애인이었던 프랑스의 이자벨을 유폐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일랜드 내 잉글랜드 영토가 현지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기로 하고, 1332년 여름 군대를 항구에 집결시키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헨리 드 보몽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거물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 이후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고 싶어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들은 지난날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웠던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자기들 땅을 받아내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은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3. 전개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총사령관은 아내 앨리스 코민이 뷰컨 백작령 계승권이 있다는 걸 빌미로 삼아 뷰컨 백작 칭호를 주장한 헨리 드 보몽이었다. 당시 이들이 보유한 군대는 기사 500명, 보병(주로 궁수) 1,000명이었다.이들이 침공을 막 시작했을 때,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고 있던 토머스 랜돌프가 급사했고,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새 호국경에 선임되었다. 이 인물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이자 데이비드 2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인은 포스만 북쪽 부분을 경비했고, 포스만 남쪽 부분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맡았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전에 마르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 되기를 바라며 8월 6일 포스만 북부의 웨스터 킹혼(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이 한창 상륙하고 있을 때, 로버트 1세의 사생아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와 파이프 백작 던컨 4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잉글랜드 연대기는 최소 4,000명, 최대 24,000명으로 기술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4,000명이 가장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선 중이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와 지원 보병을의 공격을 받은 후 격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상륙에 성공했다.
4. 결과
잉글랜드 연대기는 스코틀랜드 측 손실에 대해 90명, 900명, 1,000명 등 다양한 사망자 수를 나타냈다. 한 연대기에는 파이프 백작이 그렇게 작은 군대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으로 가득찼다"고 밝혔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있더라도 미미했을 것이다. 그 후 마르 백작은 군대를 퍼스로 철수한 뒤 킹혼 전투의 생존자들과 합류하면서 전국에 파발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발리올과 헨리 드 보몽은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 덤펌린으로 이동해 식량을 확보하고 무기고를 확보한 뒤 퍼스로 진격했다. 며칠 후인 8월 11일, 스코틀랜드 호국경인 마르 백작 돔놀 2세와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에드워드 발리올을 옹립한 잉글랜드군이 퍼스 인근의 더플린 무어에서 격돌했다.
[1]
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