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플린 무어 전투 영어: Battle of Dupplin Mo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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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32년 8월 11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 남서쪽의 더플린 무어 | |
원인 | 스코틀랜드에서 재산을 잃은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왕위 쟁취 시도 | |
교전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제8대 마르 백작
돔놀 2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파이프 백작 던컨 4세 ◎ 제2대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
에드워드 발리올 헨리 드 보몽 |
병력 | 15,000명에서 40,000명 사이 | 1,500명 |
피해 | 상당수 | 미미함. |
결과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영향 |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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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32년 8월 6일,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앉히려는 잉글랜드 귀족들이 더플린 무어에서 데이비드 2세를 받든 스코틀랜드 주력군과 맞붙은 전투.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고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혔다.2. 배경
1328년 5월 1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끝에 잉글랜드 왕국의 권신 로저 모티머와 노샘프턴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이때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내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의 재산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모조리 몰수되어 자신을 추종하는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깊은 반감을 품은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과 잉글랜드에 협조하다가 로버트 1세에게 쫓겨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장차 스코틀랜드를 도모하고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했고 아들 데이비드 2세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에 로버트 1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전우였던 초대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았다.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스코틀랜드를 칠 야심을 품었다.
1330년 10월 19일, 에드워드 3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신 로저 모티머를 처형하고 자신의 어머니이자 모티머의 애인이었던 프랑스의 이자벨을 유폐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일랜드 내 잉글랜드 영토가 현지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기로 하고, 1332년 여름 군대를 항구에 집결시키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헨리 드 보몽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거물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 이후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고 싶어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들은 지난날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웠던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자기들 땅을 받아내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은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총사령관은 아내 앨리스 코민이 뷰컨 백작령 계승권이 있다는 걸 빌미로 삼아 뷰컨 백작 칭호를 주장한 헨리 드 보몽이었다. 당시 이들이 보유한 군대는 기사 500명, 보병(주로 궁수) 1,000명이었다.
이들이 침공을 막 시작했을 때,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고 있던 토머스 랜돌프가 급사했고,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새 호국경에 선임되었다. 이 인물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이자 데이비드 2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인은 포스만 북쪽 부분을 경비했고, 포스만 남쪽 부분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맡았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전에 마르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 되기를 바라며 8월 6일 포스만 북부의 웨스터 킹혼(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이 한창 상륙하고 있을 때, 로버트 1세의 사생아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와 파이프 백작 던컨 4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잉글랜드 연대기는 최소 4,000명, 최대 24,000명으로 기술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4,000명이 가장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선 중이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와 지원 보병을의 공격을 받은 후 격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상륙에 성공했다.( 킹혼 전투)
마르 백작은 잉글랜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퍼스로 철수한 뒤 킹혼 전투의 생존자들과 합류하면서 전국에 파발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발리올과 헨리 드 보몽은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 덤펌린으로 이동해 식량을 확보하고 무기고를 확보한 뒤 퍼스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왕위가 걸린 대규모 전투가 임박했다.
3. 전개
마르 백작 돔놀 2세는 퍼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에르네 강 북쪽 기슭에 군대를 배치하고 다리를 파괴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군대는 연대기 상에서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기술되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군의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8월 10일, 잉글랜드군은 에르네 강 남쪽 강둑에 도착했다. 당시 그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의 10배 이상이었고, 강 건너편에 유리한 방어 위치에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지원군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잉글랜드군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군은 해질 무렵까지 에르네 강 반대편에 나란히 주둔했다.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이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배넉번 전투에서의 승리를 회상하고 잉글랜드인에 대한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파괴된 다리 인근에 경비원이 배치되었지만 다른 예방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해가 뜰 때 강 건너편으로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의 측면을 요격하여 혼란을 일으킨 뒤, 적이 패주할 때 추격하여 섬멸해버리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계속 대치하고만 있으면 승리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날 밤, 잉글랜드군 전체가 몰래 강을 건넌 뒤 자정 무렵에 스코틀랜드 숙영지에 도착해 공격을 퍼부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스코트랜드인들은 급히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주력군을 패주했다고 믿었지만, 새벽에 스코틀랜드군이 자기들을 향해 2개 대열을 결성한 채 접근하는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한 장성이 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연설했다. 이 장수의 이름은 연대기마다 다르게 기술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잉글랜드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40명의 용병 기사를 제외하고 전원이 도보로 대열을 결성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보병은 3개의 조밀한 대열로 줄을 섰고, 장창을 든 나머지 보병은 4번째 대열에 위치했다. 보병대는 언덕이 많은 지형으로 좁아지는 계곡 중앙을 점령했고, 장궁병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언덕에 나뉘어 측면에 배치되었다. 기병대는 후방에 남겨졌다.
스코틀랜드인들은 2개의 조밀한 그룹으로 나뉘어 쉴트론[1]을 결성했다. 돔놀 2세는 잉글랜드군에 항복을 권유하려 했지만, 쉴트론 한 부대를 이끌고 있던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가 "당신이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그가 에드워드 발리올과 서신을 주고받는 정황을 알고 있으며, 잉글랜드군이 몰래 강을 건너는 걸 일부러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돔놀 2세는 결백을 호소하면서, 이글랜드군을 공격하는 첫번째 사람이 되어 충성심을 입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브루스는 상대보다 앞서 나가기로 했고, 그 결과 두 쉴트론은 상대보다 먼저 적에 접근하여 무찌르려고 경쟁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군이 적에게 빨리 달려가려고 경쟁하다 보니, 속도가 느린 전사들은 뒤쳐졌고 대열이 흐트러졌다. 이윽고 로버트 브루스와 800명만이 적진에 도착해, 잉글랜드군 중앙 보병대를 10야드(9m) 뒤로 밀어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무너지지 않고 계속 버텼고, 측면에 배치된 장궁병들이 스코틀랜드 장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일반적으로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거나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없는 투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가 화살에 취약했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중앙으로 밀집했고, 이로 인해 쉴트론의 이동 반경이 제약되었고, 중앙에 몰린 스코틀랜드인들은 무기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으며, 균형을 잃고 넘어진 자들은 즉시 짓밟혔다.
한편,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이끄는 쉴트론 역시 문제가 생겼다. 그들 역시 서두르는 바람에 조직력이 흐트러져 구불구불한 평야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횡대열로 이동해야 했고,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브루스의 쉴트론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한 자들이 뒤엉키면서, 스코틀랜드군의 혼란은 한층 더 심해졌다. 잉글랜드보병대는 그런 그들을 손쉽게 해쳤고, 장궁병들도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 보병들은 아직 살아있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시체 산더미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결국 스코틀랜드군의 저항은 무너졌다. 살아남은 귀족은 말을 타고 도망쳤고, 나머지 스코틀랜드인은 도보로 달아났다. 후방에 배치되었던 잉글랜드 기병대는 말을 몰아 해가 질 때까지 추격해 도망치는 적병들을 살해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퍼스를 점령하고 요새를 강화했다.
4. 결과
잉글랜드 측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총 35명이 전사했는데, 그중 종자가 33명이고 기사가 2명이었으며, 궁수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는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2개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는 각각 2,000명 또는 3,000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지며, 잉글랜드 연대기에는 15,000명 이상이 사살되었다고 기술되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시체가 창 길이보다 높은 거대한 더미에 누워 있다고 기술되었다. 마르 백작 돔놀 2세와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제2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전사했고, 파이프 백작 던컨 4세는 생포된 뒤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귀순했다.더플린 무어 전투 일주일 후 퍼스에 도착한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는 전투 생존자들과 합류했지만, 퍼스 시를 장악하고 요새를 강화한 발리올을 공격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그 후 에드워드 발리올은 9월 24일 스코틀랜드 국왕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거행된 연회에서 모두가 갑옷을 입고 테이블에 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스코틀랜드인들의 반격을 우려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과 가까운 록스버러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에드워드 3세를 자신의 대군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연간 총수입이 20,000파운드인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와 주요 국경 요새인 베릭 성을 넘기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한편,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군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발리올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332년 12월 16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아난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 추종자들에게 매복 공격을 당해 참패한 뒤 변장한 채 말을 타고 잉글랜드로 도망친 후 에드워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33년 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이에 항전하면서 할리돈 힐 전투가 발발했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