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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8:14:54

2차 파리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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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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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6년 4월 13일 ~ 4월 17일, 프랑스군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탈환한 공방전.

2. 상세

1429년 9월 잔 다르크 등이 주도한 1차 파리 공방전이 실패로 끝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강력한 요새인 파리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보다는 내부의 반란을 유도함으로써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1430년 그와 내통한 인사들이 대거 발각되어 잉글랜드군에게 집단 처형된 사건이 벌어진 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의 경계가 한층 더 삼엄해지면서 파리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샤를 7세는 파리를 봉쇄해서 압박을 가하기로 했다.

1435년, 프랑스군은 일련의 공세를 개시해 파리 근교의 요새들을 공략하고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과 도로들을 모조리 봉쇄해 파리 시민들이 물자난에 시달리게 했다. 이에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측은 샤를 7세에게 협상을 제의해 승낙을 얻어냈다. 1435년 8월 5일부터 아라스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잉글랜드 협상가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와 샤를 7세의 딸을 결혼시키고 영구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샤를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잉글랜드인들에게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샤를 측은 잉글랜드인들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부르고뉴 측을 회유했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아버지 장 1세가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되는 샤를 7세를 개인적으로 혐오했지만, 잉글랜드 측이 노르망디, 일드프랑스 등 점령지에서 빗발치는 반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국왕 헨리 6세는 너무 어리고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은 중병에 걸려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니, 그들과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1435년 9월 21일,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았다. 또한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하기로 했고,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하기로 했으며,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게 하는 데 성공한 샤를 7세는 파리를 탈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때마침 잉글랜드와 프랑스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1주일 전인 1435년 9월 14일에 사망했고, 섭정 직을 놓고 권력분쟁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여지가 사라졌다. 샤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파리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436년 3월 말 5,000여 병력을 일으켜 파리로 진군한 리슈몽은 도중에 부르고뉴 지원군과 합세한 뒤 4월 6일 생드니에서 잉글랜드군 3,000명을 격파하여 생드니 요새를 공략하고 그들을 파리 성내로 밀어냈다. 4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고, 파리 시민들은 밀 가격이 4배로 뛰어오르는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주아인 미셸 드 랄리에, 장 드 라 퐁텐 등 4명의 시민이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자, 샤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군에 협력해 자신과 맞선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 16일, 프랑스군은 우회로를 이용해 파리 동쪽 끝에 있는 샹자크 항구로 진입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레 알르와 노트르담에 도착했다. 로버트 윌러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이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주민들이 창문에서 원거리 무기나 돌멩이를 던지는 등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자 바스티유 생 앙투안 요새로 도피했다. 4월 17일,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고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잉글랜드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요새를 떠나 루앙으로 철수했다. 그 후 샤를 7세는 1437년 11월 12일 파리에 입성하고, 난리를 피해 도망친 파리 시민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리하여 파리는 잔 다르크의 입성을 거부한 지 8년만에 프랑스의 수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