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버트 윌러비 Robert Willough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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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85년경 ~ 1452년 7월 2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에레스비의 윌러비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서퍽 매팅햄 | |
아버지 | 윌리엄 윌러비 | |
어머니 | 루시 르 스트레인지 | |
형제 | 토머스, 엘리자베스, 마저리, 마가렛 | |
아내 | 엘리자베스 몬타구, 모드 스탠호프 | |
자녀 | 조앤 | |
직위 | 에레스비의 윌러비 남작, 방돔 백작, 모몽 쉬르 우아즈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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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2. 생애
1385년경 잉글랜드 왕국 에레스비의 윌러비에서 제5대 에레스비의 윌러비 남작 윌리엄 윌러비와 제5대 노킨의 스트레인지 남작 로저 르 스트레인지의 딸 루시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머스[1], 엘리자베스[2], 마저리[3], 마가렛[4]이 있었다. 1409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고, 1416년 제2대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의 미망인이었던 이사벨라 뷰챔프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뒤 오포드 성과 그 근처에 있는 오포드 마을, 파햄과 우퍼드의 저택 소유권을 획득했다.1412~1413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와 함께 노르망디와 보르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고, 1415년 4월 헨리 5세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승인한 왕실 의회에 참석했다. 1415년 8월 5일 사우샘프턴에서 헨리 5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된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의 재판에 참여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헨리 5세와 함께 프랑스로 원정을 떠났고,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모 공방전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421년 2월 23일 헨리 5세의 왕비가 된 발루아의 카트린의 대관식에서 수석 술 관원장을 맡았으며, 1423년 7월 31일과 8월 1일에 벌어진 크라방 전투에 참여해, 토머스 몬타구의 지휘하에 욘 강을 건너는 다리로 돌파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낼 때 우측 부대를 지휘했다. 이후 8월 15일 이브리 공략에 기여했고,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 참여해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을 사로잡았다. 1424년 9월 베드퍼드 공작에 의해 방돔 백작을 수여받았다.
1425년 7월과 8월, 잉글랜드의 메인 카운티 정복의 마지만 단계인 르망 공방전에서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지휘하에 돌격 부대를 이끌어 르망 공략을 달성했다. 1427년 또는 1428년 2월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의 지휘하에 드뢰 공략전에 참여했다. 1429년 6월 후스파에 맞서는 십자군을 이끄게 된 헨리 보퍼트와 함께 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나, 십자군을 위해 모인 군대는 1429년 6월 18일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참패한 뒤 베드퍼드 공작을 돕기 위해 프랑스로 대신 파견되었다. 이후 프랑스군의 공세로 인해 방돔 영지가 넘어가자, 윌러비는 1430년 10월 4일 이에 대한 보상으로 보몽 쉬르 우아즈 백작을 수여받았다.
1432년 2월 로어 노르망디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비보앵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생세네리르제레이를 상실했지만, 7월에 생발레리앙코를 포위해 8월에 공략했다. 1433년 바이외 대장에 선임되었고, 1434년 퐁 드 라르슈 대장을 맡았다. 1435년 7월 2,000명의 병력을 잉글랜드에서 규합한 뒤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와 함께 생드니를 포위해 10월에 공략했다. 1435년 10월, 탈보트가 루앙으로 떠났을 때 파리의 지휘권을 맡았다. 1436년 3월 말,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5,000여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프랑스군은 4월 6일 생드니에서 잉글랜드군 3,000명을 격파하여 생드니 요새를 공략한 뒤 그들을 파리 성내로 밀어냈다. 4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고, 파리 시민들은 밀 가격이 4배로 뛰어오르는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주아인 미셸 드 랄리에, 장 드 라 퐁텐 등 4명의 시민이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자, 샤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군에 협력해 자신과 맞선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 16일, 프랑스군은 우회로를 이용해 파리 동쪽 끝에 있는 샹자크 항구로 진입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레 알르와 노트르담에 도착했다. 윌러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이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주민들이 창문에서 원거리 무기나 돌멩이를 던지는 등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자 바스티유 생 앙투안 요새로 도피했다. 4월 17일,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고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윌러비는 어쩔 수 없이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요새를 떠나 루앙으로 철수했다. 그 후 샤를 7세는 1437년 11월 12일 파리에 입성하고, 난리를 피해 도망친 파리 시민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2차 파리 공방전)
1439년 7월 17일 성지 순례 허가증을 받았다. 이후 그에 대한 언급은 1443년 5월까지 잉글랜드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걸 볼 때 성지 순례를 갔을 가능성이 있다. 1445년 3월 헨리 6세의 왕비가 된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잉글랜드로 호송한 수행원의 일원이었다. 1452년 7월 25일 남성 상속인을 남기지 못한 채 서퍽 메팅햄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다. 사후 그의 작위와 토지는 사위인 제7대 웰스 남작 리처드 웰스에게 계승되었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몬타구(? ~ 1448):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의 딸.
- 조앤 윌러비(1425 ~ 1462): 제7대 웰스 남작 리처드 웰스의 부인.
- 모드 스탠호프(? ~ 1497): 노팅엄셔의 램프턴 출신 기사 리처드 스탠호프의 딸. 로버트 윌러비 사후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둘째 아들 토머스 네빌과 결혼했고, 토머스 네빌이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한 뒤 기사 거베이스 클리프턴과 결혼했다. 하지만 거베이스 클리프턴 역시 튜크스베리 전투 후 생포된 뒤 1471년 5월 6일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