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셸 해전 영어: Battle of La Rochelle 프랑스어: Bataille de La Roche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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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72년 6월 22~23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누벨아키텐 지방 라 로셸 앞바다 | |
원인 | 에드워드 3세의 아키텐 구원 시도와 프랑스 해군의 저지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카스티야 연합 왕국 |
지휘관 | 팸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
병력 | 대형 전함 3척, 소형 전함 14척, 수송선 50여 척 | 갤리선 12척, 범선 8~10척 |
피해 |
모든 전함 침몰 또는 나포 기사 160~400명 체포 |
미미함. |
결과 | 카스티야 해군의 승리. | |
영향 | 잉글랜드 왕국의 아키텐 지배력 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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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72년 6월 22~23일, 프랑스 왕국의 공세로 위급해진 아키텐을 구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함대가 프랑스 왕국과 손잡은 카스티야 해군의 습격으로 궤멸된 해전.
2. 상세
1370년대 초, 잉글랜드 왕국의 통치를 받던 아키텐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하느라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자신이 다스리는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리고 납부를 거부하는 이들을 탄압하는 등 가혹한 정치를 벌이자, 많은 영주들이 에드워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동안의 전쟁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싶었던 샤를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잉글랜드에 전쟁을 선포했다.1370년 봄, 2개의 프랑스 군대가 아키텐을 전격 침공했다. 900개 이상의 마을, 성, 요새들은 프랑스군에게 기꺼이 귀순했고, 흑태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리모주 주교였던 장 드 무라 드 크로스는 프랑스군이 리모주를 포위하자 사흘 만에 항복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격분해 9월 14일 리모주 공방전을 단행하여 닷새 만에 함락시킨 뒤 리모주를 초토화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원정 중 얻은 병세가 악화된 데다 부재중에 큰아들인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비탄에 잠겼고, 형제인 곤트의 존에게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수비를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후 1372년에 공식적으로 아키텐 왕자로서의 지위를 곤트의 존에게 넘겼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렇게 떠난 뒤, 프랑스의 공세는 더욱 매서워졌다. 프랑스 북서부에서 약탈 행진을 벌이며 아키텐으로 남하하던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 6,000명은 1370년 12월 4일 퐁발랭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궤멸되었고, 지난날 흑태자 에드워드가 전설적인 승리를 거뒀던 푸아티에는 1372년 게클랭에게 공략되었다. 급기야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 마저 포위되었다. 이곳 마저 상실한다면, 아키텐과 잉글랜드 간의 해상 보급이 끊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곤트의 존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팸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잉글랜드 육군 및 해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팸브로크 백작의 함대는 3척의 대형 전함과 14척의 소형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사 160~400명과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을 실은 수송선 50여 척이 뒤따랐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복무하는 잉글랜드군의 6개월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12,000 파운드도 실렸다. 팸브로크의 함대는 6월 초 플리머스에서 출항해 라 로셸로 항해했다.
한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제노바 출신의 제독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휘하의 함대를 아키텐으로 파견했다. 함대 규모는 갤리선 12척, 범선 8~10척이었는데, 하나같이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컸으며 적 선박에 큰 돌을 던질 수 있는 투석기가 장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 선원들의 항해술은 탁월해서, 적보다 큰 배를 가지고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1372년 6월 22일 늦은 오후, 팸브로크 백작은 강력한 카스티야 함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라 로셸 항구 외곽에 도착했다. 카스티야 함대는 즉시 잉글랜드 함대를 향해 달려들어 적선 2~4척을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장궁병들이 높은 위치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정확히 쏘며 분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은 적이 배를 건너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기에, 카스티야군은 그들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조수가 높아지자, 두 함대는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팸브로크 백작은 항구에서 다소 떨어진 해안으로 철수했고, 카스티야 함대는 항구로 돌아갔다.
그날 밤, 라 로셸 수비대의 기사인 존 하피든이 바지선 몇 척에 소규모 병력을 태운 뒤 잉글랜드 함대에 몰래 가담했다. 그들은 라 로셸 수비대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조속히 적을 물리쳐달라고 호소했다. 부하들은 카스티야 함대의 강력한 전투력을 당해낼 공산이 없다고 보고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팸브로크 백작은 존 하피든의 설득에 넘어가 해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6월 23일 아침, 두 함대는 다시 라 로셸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이때 카스티야 함대는 적선의 갑판과 장비에 기름을 뿌리고 불화살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수많은 잉글랜드 선박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다음 몇 시간 동안 잉글랜드 함대 전체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팸브로크 백작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생포되었고, 존 하피든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날 생포된 기사는 총 140~4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전원이 사슬에 묶인 채 카스티야 항구인 산탄데르로 끌려갔다. 카스티야 측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 라 로셸은 잉글랜드 함대가 파괴된 후에도 계속 버티다 9월 7일에 항복했다. 팸브로크 백작은 왕실 백작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바야돌리드 근처의 로마 시대 요새인 쿠리엘 성에 감금되어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374년 다른 잉글랜드 포로들과 함께 몸값을 지불한 뒤 베르트랑에게 넘겨질 예정이었으나, 그 사이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패전에 분노해 1373년 4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이끄는 전함 27척, 바지선 18척, 수송선 44척을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이들은 생말로에서 카스티야 상인 호송 함대를 궤멸시키는 등 카스티야 해안 지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카스티야 측은 1374년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가 이끄는 함대를 잉글랜드 해안으로 급파했다. 토바르는 프랑스 제독 장 드 비엔과 연합해 와이트 섬, 라이 항, 로팅딘 항, 윈첼시 항, 루이스 항, 포크스턴 항, 플리머스 항, 포츠머스 항, 헤이스팅스 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렇듯 프랑스와 카스티야 함대가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잉글랜드는 매우 위축되었고, 프랑스군은 이 덕분에 백년전쟁 발발 이래 잃어버렸던 영토를 대부분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