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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20:22:47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이름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Ambrogio Boccanegra
출생 미상
제노바 공화국
사망 1373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 팔마 델 리오
아버지 에기디오 보카네그라
아내 베아트리스 페르난데스 카리요
자녀 마리아, 베아트리스, 우라카
직위 카스티야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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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노바 공화국 출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제독. 카스티야 내전, 포르투갈-카스티야 전쟁, 백년전쟁 등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2. 생애

제노바 출신의 카스티야 해군 제독 에기디오 보카네그라의 아들이자 제노바 공화국 초대 총독인 시몬 보카네그라의 조카이다. 1358~1359년 아버지가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와의 전쟁을 치르는 페드로의 해군을 지휘할 때 동행했다. 1367년, 부친이 엔리케 2세 편을 들었다가 페드로에 의해 체포되어 세비야에서 처형되었다. 암브로시오는 페드로의 추격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뒤 엔리케 2세에 가담했다. 1369년 페드로가 무너지고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이 된 뒤, 암브로시오는 아버지의 영지였던 팔마 델 리오의 영주권을 회복했다. 그는 1371년 도시 헌장을 부여해 주민 대부분을 자유인으로 삼았으며, 자기 영지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기독교 여성과 간음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관습법에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1370년 8월 16일, 엔레케 2세는 암브로시오를 카스티야 해군 제독에 선임했다. 그 후 전년도부터 과달키바르 항 입구를 봉쇄한 포르투갈 함대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7척의 소함대와 함께 칸타브리아 항구로 향했고, 그곳에서 무기, 노 및 도구를 비축하는 동시에 다른 갤리선 2척을 추가한 뒤 계쏙 이동했다. 산타마리아 곶에 막 이르렀을 때, 포르투갈 함대 선원들의 급여를 싣고 있던 포르투갈 선박을 발견하고 나포했다. 그 후 과달키바르 항을 봉쇄하고 있던 포르투갈 함대를 급습해 갤리선 3척과 선박 2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를 내쫓았다. 엔리케 2세는 이 승리를 적절히 활용해 포르투갈 왕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1372년, 암브로시오는 엔리케 2세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군과 합세한 뒤 라 로셸을 포위했다. 이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팸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라 로셸을 구원하게 했다. 팸브로크 백작의 함대는 3척의 대형 전함과 14척의 소형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사 160~400명과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을 실은 수송선 50여 척이 뒤따랐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복무하는 잉글랜드군의 6개월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12,000 파운드도 실렸다. 팸브로크의 함대는 6월 초 플리머스에서 출항해 라 로셸로 항해했다. 이에 맞서는 암브로시오의 함대 규모는 갤리선 12척, 범선 8~10척이었는데, 하나같이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컸으며 적 선박에 큰 돌을 던질 수 있는 투석기가 장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 선원들의 항해술은 탁월해서, 적보다 큰 배를 가지고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1372년 6월 22일 늦은 오후, 팸브로크 백작은 강력한 카스티야 함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라 로셸 항구 외곽에 도착했다. 카스티야 함대는 즉시 잉글랜드 함대를 향해 달려들어 적선 2~4척을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장궁병들이 높은 위치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정확히 쏘며 분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은 적이 배를 건너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기에, 카스티야군은 그들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조수가 높아지자, 두 함대는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팸브로크 백작은 항구에서 다소 떨어진 해안으로 철수했고, 카스티야 함대는 항구로 돌아갔다.

그날 밤, 라 로셸 수비대의 기사인 존 하피든이 바지선 몇 척에 소규모 병력을 태운 뒤 잉글랜드 함대에 몰래 가담했다. 그들은 라 로셸 수비대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조속히 적을 물리쳐달라고 호소했다. 부하들은 카스티야 함대의 강력한 전투력을 당해낼 공산이 없다고 보고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팸브로크 백작은 존 하피든의 설득에 넘어가 해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6월 23일 아침, 두 함대는 다시 라 로셸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이때 카스티야 함대는 적선의 갑판과 장비에 기름을 뿌리고 불화살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수많은 잉글랜드 선박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다음 몇 시간 동안 잉글랜드 함대 전체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팸브로크 백작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생포되었고, 존 하피든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날 생포된 기사는 총 140~4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전원이 사슬에 묶인 채 카스티야 항구인 산탄데르로 끌려갔다. 카스티야 측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 라 로셸은 잉글랜드 함대가 파괴된 후에도 계속 버티다 9월 7일에 항복했다. 팸브로크 백작은 왕실 백작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바야돌리드 근처의 로마 시대 요새인 쿠리엘 성에 감금되어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374년 다른 잉글랜드 포로들과 함께 몸값을 지불한 뒤 베르트랑에게 넘겨질 예정이었으나, 그 사이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라 로셸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뒤, 암브로시오는 산탄데르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잉글랜드 선박 4척을 나포했다. 1372년 11월 5일 엔리케 2세로부터 리나레스 마을의 영주권을 수여받았다.

1372년 7월 10일,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할 때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페르난두 1세는 자국 항구에 정박해 있는 카스티야 선박을 압류하게 한 뒤, 발렌시아의 페르난도 알폰소와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엔리케 2세는 포르투갈을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자모라에 작전 기지를 세운 뒤 1372년 12월 알메이다, 핀헬, 첼로리고 마을을 공략하고, 연말에 비세오를 공략했다. 1373년 초, 엔리케 2세는 리스본을 향한 공세를 개시하면서 암브로시오에게 함대를 이끌고 포르투갈 해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암브로시오는 갤리선 12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세비야에서 출항한 뒤 1373년 3월 7일 리스본 인근의 밀짚 해에 진입해 란사로테 페산하 제독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갤리선 4척과 선박 15척을 공격해 갤리선 2척과 선박 11척을 나포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페르난두 1세는 엔리케 2세에게 평화를 요청하기로 했고, 1373년 3월 19일 산타렝 조약을 체결했다. 1373년 말, 암브로시오는 팔마 델 리오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사망했다. 1374년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가 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해군 제독이 되었다.

3. 가족



[1] 세비야의 움니움 산토룸 교회의 나자레노 예배당 창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