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 전투 영어: Battle of Chiset 프랑스어: Bataille de La Roche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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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73년 3월 21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누벨아키텐 지방 시세 | |
원인 |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푸아투 공세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틀:깃발| 존 데버루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 ]][[베르트랑 뒤 게클랭| ]]
병력 | 맨앳암즈 800명, 장궁병 300명 | 1,500명 |
피해 | 궤멸. | 미미함. |
결과 | 프랑스군의 승리. | |
영향 | 프랑스군의 푸아투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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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73년 3월 21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푸아투의 시세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1372년 라 로셸 해전의 승리에 힘입어 아키텐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인 라 로셸을 공략함으로써 잉글랜드의 아키텐 지배력을 한층 더 약화시킨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앙주의 루이 1세와 함께 푸아티에 전투 후 잉글랜드에 넘어갔던 푸아티에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모조리 공략했다. 그 후 루이 1세가 곤트의 존이 단행한 약탈 행진에 대응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남프랑스 방면 프랑스군을 홀로 지휘하게 된 게클랭은 1373년 3월 초 푸아티에 인근의 몽트뢰유보냉을 공략한 뒤 1373년 3월 중순 푸아투의 요충지인 시세를 포위했다.게클랭은 적 구원군이 오기 전에 시세를 서둘러 공략하려 했지만, 기사 로머트 마이턴이 이끄는 60명의 수비대의 결사 항전에 부딪쳐서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 존 데버루가 니오르 주변에 분산된 800명의 기사와 300명의 장궁병들을 규합하여 시세를 구원하고자 출진했다. 이들은 야밤에 숲길을 통해 이동해 적의 감시를 회피했고, 3월 21일에 시세 인근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게클랭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요구했다.
잉글랜드군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에 놀란 게클랭은 부하들을 불러모아서 어찌 대처할 지 논의했다. 그들은 " 왕께서 잉글랜드군과 정면 대결하는 것을 금지했으니 전투를 회피하고 참호와 방어벽을 구축한 채 버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게클랭은 고개를 저으며 전투를 벌이겠다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프랑스의 샤를 왕이 왕위 계승자라는 말을 늘 들어왔소. 폐하께서 나를 무관장으로 임명했을 때, 그 분은 나에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잉글랜드군과 싸우라고 말했소. 나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고 믿소. 우리의 수는 잉글랜드인과 거의 같소. 그렇다면 전투를 거부하고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하여 불명예를 얻을 필요가 있겠소? 우리는 왕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배반하고 싶지 않소. 또한 우리는 잉글랜드인 만큼 전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소. 왕은 우리가 싸우는 것을 금지했소. 우리는 그것을 권장하지 않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수행한 모든 일이 항상 성공적이었으니, 이번에도 내게 순종해주길 바라오."
장군들은 이에 호응하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장군을 승리로 인도하겠습니다!"
게클랭은 영국 전령들에게 전투를 받아들인다고 전하게 한 뒤 시세 참호 앞에 군대를 배치한 후 연설했다.
"자, 나의 용감한 동료들이여. 여기 우리에게 전투를 요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항상 이겼던 자들과 같은 이들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해라. 그러나 약점을 드러낸다면, 그토록 노력하여 얻은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 너희의 영광, 재산, 특히 조국의 명예와 평온을 위해 싸워라!"
게클랭은 일부 병력을 남겨둬서 시세 수비대를 감시하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을 향해 진격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게클랭은 전군에 창을 내린 채 적 궁수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프랑스 장병들은 신속하게 전진했고, 궁수대는 자신들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드는 적의 기세에 기가 질려 화살 몇 발만 쏜 뒤 후퇴했다. 뒤에 있던 잉글랜드 보병대가 백병전을 준비하기 위해 창을 던지고 도끼를 꺼내는 모습을 본 게클랭이 외쳤다.
"전군, 창을 손에 꼭 쥐고 계속 진격하라!"
프랑스 보병대는 즉시 창을 치켜세우고 도끼를 든 적군을 향해 차분히 전진했다. 잉글랜드군은 수많은 창을 앞세워 전진하는 적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고, 일부는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 제노바 석궁병들이 양 측면에서 물러서는 잉글랜드군에게 화살을 연이어 쐈고, 프랑스 기사들은 말을 타고 적의 후방을 꾸준히 공격했다. 성 위에서 아군이 위태로운 것을 목격한 시세 수비대가 성밖으로 나와 구원하려 했지만, 베르트랑이 미리 배치해둔 프랑스 부대에 격퇴되었다.
반나절간 이어진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고지대에서 밀려나 뒷걸음질 치다가 끝내 패주했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600명을 사살하고 500명을 생포했다. 지휘관 존 데버루 역시 미처 도주하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아군이 궤멸되는 모습을 목도한 시세 수비대는 곧바로 항복했다.
게클랭은 잉글랜드 전사자 및 포로들로부터 갑옷과 말을 노획한 뒤 병사들더러 갈아입게 한 뒤 니오르 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진격했다. 잉글랜드인 복장을 한 프랑스인들을 본 도시 주민들은 "아군이 전투를 끝나고 돌아온 모양이다"라고 착각하고 도개교를 내렸고, 병사들은 "뒤 게클랭"을 외치며 요새화된 도시로 돌격했다. 그제야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 및 수비대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이후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수개월간 작전을 이어간 끝에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에 할양되었던 푸아투 전역을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