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휴 칼블리 Hugh Calve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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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15년 에서 1333년 사이 ~ 1394년 4월 2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체셔 번버리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체셔 번버리 | |
아버지 | 데이비드 드 칼블리 | |
어머니 | 조앤 | |
아내 | 콘스탄사 | |
직위 |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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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2. 생애
잉글랜드 왕국 체셔의 번버리 출신으로 전해진다. 출생년도는 1315년에서 1333년 사이로 추정되며, 아버지는 번버리의 젠트리였던 데이비드 드 칼블리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조앤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로버트 놀스의 가까운 친척이거나 이복형제일 거라 추정한다. 그는 다른 많은 잉글랜드인과 함께 브르타뉴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샤를 드 블루아에 맞서 싸우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군대에서 활동했다.익명의 브르타뉴 시인이 집필한 <30명의 잉글랜드인과 30명의 브르타뉴인의 전투(La Bataille de trent Anglois et de trente Bretons)>에 따르면, 1351년 30인의 결투에서 "Hue de Caverle"라는 인물이 잉글랜드 측에서 싸웠다가 패배 후 생포되었고, 나중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이 인물이 휴 칼블리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는 휴 칼블리가 1346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기술되었지만, 1354년 때의 기록에는 기사로 언급되지 않았고, 1361년부터 기사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1354년, 휴 칼블리는 잉글랜드가 소유하고 있던 베쉐렐 요새의 수비대장이었다. 그는 그해 4월 10일 콩부르 성을 습격해 프랑스 원수 아르눌 도드랭을 생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르눌의 부관이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칼블리의 공격을 예상해 궁수를 보초로 배치했다. 보초가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게클랭과 아르눌는 즉시 요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칼블리는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고, 나중에 몸값을 지불했다. 1359년 로버트 놀스와 함께 론 강 계곡을 공격해 르 퓌 성을 함락했고, 아비뇽으로 진격하다가 루이 2세 드 부르봉의 부관인 토마 드 라 마르쉐의 군대에게 저지당하자 물러났다.
1361년 1월 쥐녜-슈흐-사르트를 향해 이동하던 중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하고 게클랭을 사로잡았다. 이후 3만 크라운에 달하는 몸값을 받고 게클랭을 풀어줬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에서 존 챈더스 장군의 지휘 아래 샤를 드 블루아를 전사시키고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브르타뉴 공작에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1365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자리에 엔리케 2세를 옹립하기 위한 원정을 단해앴을 때 가담하여 1367년까지 이베리아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 공로로 카리용 백작으로 선임되었으며, 시칠리아 남작의 딸이자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세번째 왕비인 엘레오노르의 시녀였던 콘스탄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엔리케 2세에게 축출된 페드로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망명했고, 에드워드는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해 잉글랜드의 동맹을 늘리기로 했다.
칼블리는 에드워드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아키텐으로 돌아간 뒤 에드워드의 지시에 따라 아라곤 왕국으로 가서 페로 4세가 엔리케 2세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게 했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이베리아 원정에 참여해 나헤라 전투에서 장 1세 다르마냐크와 함께 후방에 배치된 기병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페드로로부터 카리용 백작위를 인정받았다. 1369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가스코뉴 방면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맞섰다. 1370년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6,000 원정군에 가담했지만, 그해 12월 4일 퐁발랭 전투에서 참패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다.
1375년부터 1378년까지 칼레 보안관을 맡았고, 잉글랜드 함대 제독에 선임되어 여러 소규모 해전에 참여했다. 1379년 7월 초대 아룬델 남작 존 피츠앨런이 지휘하는 브르타뉴 습격대에 가담했지만,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폭풍을 만나 배 20척과 장병 1,000명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8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1383년 아비뇽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받드는 프랑스를 이단으로 간주한 헨리 르 디스펜서의 십자군에 가담해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을 침공해 이프르 공방전을 수행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그는 헨리 르 디스펜서와 함께 프랑스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디스펜서는 칼블리 등과 함께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가 프랑스군에게 포위되자 결국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1386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단행한 이베리아 원정에 참여했지만 실패했으며, 1388년 7월 프랑스와 휴전 협상을 벌이는 잉글랜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말년에 버크셔의 순회 판사로 활동하다가 1394년 4월 23일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의 무덤 모형은 체셔 주 벤버리에 있는 세인트 보니페이스 교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