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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존 드 스트랫퍼드 John de Stratford |
|
생몰년도 | 1275년 ~ 1348년 8월 2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 메이필드 | |
아버지 |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 |
어머니 | 이사벨라 | |
형제 |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 |
직위 | 윈체스터 주교,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 재무장관 및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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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성직자, 정치인.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원정을 떠난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잉글랜드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나중에 에드워드 3세와 마찰을 벌이다가 실각했다.2. 생애
1275년경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는 젠트리 출신으로, 마을 내 세인트 크로스 병원의 공동 설립자였다. 일부 기록은 아버지 로버트가 이 병원의 첫번째 '마스터'였다고 밝혔지만, 마스터라는 직함의 높은 명망과 이에 수반되는 많은 전제 조건(결혼 불허 포함)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이름만 전해질 뿐 그 외의 인적 사항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형제 로버트는 치체스터 주교가 되었고, 조카 랄프는 런던 주교가 되었으며, 친척 토머스는 글로스터 대주교를 맡았다. 또 다른 형제 헨리는 잉글랜드 왕실 장관에 발탁되었다.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머튼 칼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나중에 유언장에서 언급한 발리올 칼리지에 다녔을 거라고 추정한다. 1312년 이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우스터 대성당 수도원에 봉사했으며, 1317년 이전에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주임이 되었고, 링컨 주교인 존 달더비의 사법 대리인이 되었다. 1320년 1월 12일 존 달더비가 사망한 후, 그는 달더비의 유언 집행자를 맡은 뒤 캔터베리 대주교 월터 레이놀드의 배하에 들어갔다. 1320년대 초 아치스 학장이 되었고, 리치필드, 링컨, 요크 대성당의 정경 직을 역임했다.
1317년 2월 9일 클라렌던 궁전에서 열린 왕실의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법학자 자격으로 의회에 종종 출석했다. 1320년 6월 19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이 아키텐 공작과 공작부인으로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에게 아미앵에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 동행했다. 1321년 12월 월터 랭던이 사망한 후 공석이 된 리치필드 주교직에 에드워드 2세의 측근인 로버트 발독을 선출하는 안건을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요한 22세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322년 요크로 돌아온 직후, 그는 킹스 랭글리의 도미니코회 수도원 설립과 왕실의 부과금 참여 등 다양한 왕실 요청을 교황청에 전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아비뇽에 재차 파견되었다.
1323년 4월 12일 윈체스터 주교인 리고 다시에가 사망했을 때, 그는 여전히 교황청에 있었다.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발독을 윈체스터 주교에 앉히기로 하고, 스트랫퍼드에게 요한 22세를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요한 22세는 6월 20일에 발독 대신에 스트랫퍼드를 윈체스터 주교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6일 후, 스트랫퍼드는 베르트랑 뒤 푸제 추기경에 의해 윈체스터 주교로서 축성받았다. 에드워드 2세는 자신의 의향이 존종되지 않은 것에 분노해 사절단을 교황청에 보내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스트랫퍼드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대법원장 제프리 르 스크루프가 주재하는 재판에 소환되었다. 그가 재판에 불응하자, 에드워드 2세는 1323년 11월 항구 70여 개의 소장과 카운티 20여 개의 보안관에게 그가 도망치는 걸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스트랫퍼드를 "속임수를 써서 왕의 인사가 거부당하고 자기가 주교가 되게 한,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한 신하"라고 비난했다.
그 후 스트랫퍼드는 에드워드 2세의 압박에 시달린 끝에, 1324년 6월에 왕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만 자기 교구의 일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했으며,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10,000파운드에 달하는 벌금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게다가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는 스트랫퍼드로부터 1,000파운드를 개인적으로 갈취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와 화해한 그는 그해 말 샤를 4세의 가스코뉴 침공으로 발발한 프랑스-잉글랜드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평화 협상을 수행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는 1325년 3월 9일에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요구 조건을 완화하기 위해 아내 이자벨을 프랑스에 보내기 전 첫번째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월 31일 푸아시에서 이자벨 왕비를 방문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25년 9월 12일, 프랑스로 가서 샤를 6세에게 아키텐 공작 후계자로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승선한 에드워드 왕자 일행에 엑서터 주교 월터 드 스테이플던과 함께 동행했으며, 9월 24일 벵센에서 열린 경의식에 참석했다. 이후 이자벨 왕비로부터 잉글랜드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고 11월 18일 도버로 돌아와 에드워드 2세와 의회에 그동안의 일을 보고했다. 1326년 2월 3일 윈처스터 대성당 수도원에 처음 방문해 직무를 수행했다. 그해 9월 24일 프랑스의 이자벨과 그녀의 애인이자 동맹인 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에 군대를 이끌고 상륙해 에드워드 2세와 총신 휴 디스펜서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켰다. 그는 왕의 소환령에 응해 런던으로 향했고, 9월 30일 런던 주교 스티븐 그레이브젠드와 함께 1320년 스코틀랜드인들을 파문했던 교황의 교서를 읽은 뒤 이를 이사벨라의 지지자들에게 대항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런던 시내에서 이자벨의 거병에 동조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스트랫퍼드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1326년 10월 14일 로체스터 주교 하모 헤테와 우스터 주교 토머스 코밤과 함께 왕비와 합류했다. 10월 26일 에드워드 왕자가 브리스톨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섭정으로 선포되었을 때 참석했으며, 11월 14일 이자벨에 의해 고위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뒤 윌링포드에서 그녀와 함께 성탄절을 보냈다. 1327년 1월 13일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의 폐위가 선언되었을 때, 그는 왕에 대항하는 '선서 조항'을 작성했다. 1월 20일 케닐워스 성에 포로로 잡혀 있던 에드워드 2세를 방문해 아들을 위해 퇴위할 것을 권유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1월 28일 재무관직에서 물러났고, 2월 1일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왕실 고문에 발탁된 그는 1327년 3월 10일 도버를 떠나 위상트에 상륙한 후 왕의 대리인으로서 파리로 갔고, 3월 31일 샤를 4세와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은 아키텐의 대부분의 영지를 에드워드 3세의 것으로 인정하되, 그 대가로 50,000 마르크를 받기로 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그는 한동안 어린 왕을 대신해 나라를 이끄는 섭정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으나, 오래지 않아 이자벨 왕비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의 과도한 권력을 비판하면서 충돌을 벌였다. 1328년 10월 솔즈베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로저 모티머에 대적하는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랭커스터의 편에 섰다. 그 후 그는 이자벨과 모티머의 지지자들로부터 조기에 의회를 승인없이 떠났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런던으로 가서 랭커스터 지지자들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는 등 모티머에 맞섰지만, 이어진 압력에 굴복해 1329년 1월 이자벨과 모티머의 권위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하고 투옥이나 처형을 피하는 대신 매우 무거운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모티머에 반대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냈다.
1330년 10월 19일 정변을 일으켜 로저 모티머를 처형하고 이자벨을 유폐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에드워드 3세는 11월 28일에 스트랫퍼드를 총리에 선임했다. 그는 이 직위를 통해 왕국의 대내 정책과 대외 정책을 왕을 대신해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의 형제 로버트는 왕실 행정부에서 잉글랜드 국사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31년 4월, 스트랫퍼드는 에드워드 3세가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새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다. 1331년 5월에는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수도원의 수도자들과 베리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으며, 그해 9월 그레이트 야머스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1332년 3월 에드워드 3세가 부재했을 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의회를 열었으며, 1331년 12월, 1332년 4월과 5월에 프랑스 왕과의 새로운 협상에 참석했다. 또한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에 몰두했을 때, 그는 1333년 9월 23일까지 잉글랜드 북부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33년 10월 12일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메펌이 사망한 후, 캔터베리 교구는 11월 3일에 스트랫퍼드를 대주교로 추대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이를 받아들였고, 교황 22세도 11월 26일에 승인했다. 스트랫퍼드는 1333년 12월 9일 캔터베리에서 대주교 취임식을 거행했으며, 그 직후 특사로서 파리로 가서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1334년 1월에 돌아와서 캔터베리 대교구를 처음으로 순회했으며, 2월 초에 캔터베리 대성당 수도원을 방문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을 섬기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로 가야 했다. 1334년 9월에 총리직을 사임했지만, 1335년 6월 6일에 다시 요크의 총리로 선임되었고, 1336년 2월까지 잉글랜드 북부, 요크 또는 스코틀랜드 국경 인근에서 왕을 섬기는 일을 계속했다.
1336년 3월 중순에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의회를 개최했고, 뒤이어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 1336년 9월 13일 콘월 백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남동생인 엘섬의 존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는 존의 유해를 보스웰에서 런던까지 동행한 뒤 1337년 1월 15일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열린 장례식을 화려하게 조직했다.1337년 3월 24일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형제 로버트가 대신 이어받았지만, 로버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의 런던 주교인 리처드 드 웬트워스로 교체되었다. 그는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왕을 대신해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1338년 더럼 주교 리처드 드 버리와 몇몇 추기경들과 함께 백년전쟁의 해결을 협상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을 얻기를 희망하는 왕의 뜻에 따라 코블렌츠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를 찾아갔다. 1339년 1월과 2월에 루트비히 4세와 접견하여 양자간의 상호 협조를 약속하는 계약 체결에 기여했다. 1339년 5월 앤트워프에서 에드워드 3세와 이탈리아 상인 집안인 바르디 가문과의 금융 계약에 대해 보증인 역할을 했으며, 마르쿠잉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요 고문으로 활동했다. 1339년 12월 8일 리처드 드 앤트워스가 사망한 뒤 3번째로 잉글랜드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후 해외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던 스트랫퍼드는 1340년 초 군자금을 마련하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의회를 소집했다. 의원들은 에드워드의 총신들이 조세를 수시로 횡령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조사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을 제정할 위원회를 자기들 선에서 구성하려 하니 그럴 권한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왕에게 국내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가려 했지만, 돈을 떼일까 두려워한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그는 필리파 왕비와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를 인질로 남겨두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의회의 요구를 허락하고 잉글랜드가 프랑스 왕국과 합병되어서는 안 되며 프랑스 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상원과 하원의 청원에도 엄숙히 동의했다. 이에 의회는 4월 3일에 5만 파운드 이상의 전쟁세를 통과시키기로 결의했다.
이후 플란데런 백국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서둘러 함대를 끌어모은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가서 투르네로 진군하길 원했지만, 급료를 지급받긴커녕 아까운 배나 잃을까 두려워한 상인들이 쉽사리 징발에 응하지 않았기에 함대 규합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출항 날짜가 계속 연기되자, 에드워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340년 6월 4일에 당장 출항할 수 있는 40척의 선박만으로 출항하기로 했다. 그런데 프랑스에 보내뒀던 첩보원이 중대한 소식을 알려줬다.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하고 잉글랜드로 쳐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 전에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스트랫퍼드를 비롯한 최고 고문들을 소환한 뒤 가능한 한 빨리 출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트랫퍼드는 40척만 이끌고 213척을 상대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경악해 왕에게 "그런 자살 행위는 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그는 잔뜩 흥분한 나머지 뛰쳐나갔고, 얼마 후인 4월 28일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와 논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늙었다"라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동생 로버트가 총리를 대신 맡았다. 에드워드 3세는 함대를 끌어모아 출진해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뒤이은 투르네 공방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다 잉글랜드 의회가 보내겠다고 했던 5만 파운드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아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1340년 9월 25일 프랑스와 9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10월 28일 켄트 시민들에게 자신이 더 이상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면서 사과하는 글을 남긴 뒤 잉글랜드로 몰래 도주했다.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예고도 없이 도착한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장관들을 비난하고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총리, 런던 시장, 재무관 윌리엄 드 라 폴, 리처드 드 라 폴 등을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었다. 이러한 장관 숙청으로 인해 1341년 첫 4개월 동안 잉글랜드 정부는 마비되었고, 존 챈더스 휘하의 잉글랜드군은 런던 인근 마을과 작은 성을 약탈하고 불태워가며 왕을 위한 자금을 모으려 했다. 스트랫퍼드는 동생이 체포되고 왕실군이 약탈을 일삼는 상황에 격분했다.
에드워드 3세는 제3대 칸틸루프 남작 니콜라스 드 칸틸루프를 그에게 보내 루벤 상인들에 대한 빚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먼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라고 덧붙였다. 스트랫퍼드는 신변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할 거라 여기고 런던으로 가기를 주저했다. 1340년 12월 29일,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했을 때 자신이 세속적 일에 연루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불평함으로써, 군자금을 보내지 않은 것에 책임을 묻는 왕실의 비난에 공개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자신을 미워하고 반역자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대헌장의 규정을 위반해 장관과 판사들을 무단으로 체포했다며, 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340년 12월 31일, 스트랫퍼드는 잉글랜드의 모든 주교들에게 <Sacrosancta ecclesia(거룩한 교회)> 편지를 배포했다. 이 편지는 런던 주교이자 캔터베리 교회 관구의 학장이며, 그의 조카이기도 한 랄프 스트랫퍼드가 쓴 <교회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늙은 신하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지 않은 르호보암 왕을 거론하면서, 에드워드 3세를 간접적으로 비판했으며, 에드워드 3세가 대관식 때 성직자, 귀족 및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겠다고 서약한 사실과 에드워드 2세가 이를 무시했다가 폐위된 사실을 상기했다. 에드워드 3세는 랄프 드 스태퍼드를 파견해 스트랫퍼드에게 런던으로 오라고 재차 요구했지만, 스트랫퍼드는 왕이 자신에게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소환에 응할 수 없다고 답했다.
스트랫퍼드는 이후에 2개의 다른 편지를 성직자들에게 보냈다. 첫번째 편지에서, 그는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부르시에에게 과도한 세금을 불법적으로 부과한 것에 항의했다는 것을 알렸고, 2번째 편지에서는 성직자에게 부과된 높은 재정적 요구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비판했다. 1341년 2월, 에드워드 3세는 윈체스터 주교 아담 올턴을 시켜 <Libellus famosus(유명한 책)>을 작성 및 배포하게 해, 캔터베리 대주교가 왕국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스트랫퍼드는 이에 대응해 변론서를 배포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을 완고한 젊은 왕과 맞서는 노인 정치가로 소개하면서, 왕이 자신에 대해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을 가져올 나쁜 조언자들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본문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공로에 대해 왕으로부터 어떤 보상이나 호의도 받지 못했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총리로서의 자신의 행동에 변론해야 한다면 의회만이 이를 위해 자신을 소환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이렇듯 스트랫퍼드의 연이은 비판으로 인해 민심이 격앙되고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일자, 에드워드 3세는 뒤늦게야 자신이 아버지 에드워드 2세처럼 반란군에 의해 폐위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1341년 4월 23일 윈체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귀족들과 화해하고 과세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재정, 행정에 대한 왕권 행사에 규제를 두는 법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의회에 참석하려던 스트랫퍼드는 왕실 근위병들에게 접근이 거부되었다. 근위병들은 폭력을 행사하길 기피했지만, 그의 열렬한 반대자인 존 다아시와 윌리엄 킬스비가 그를 향해 돌진해 폭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온건한 고문들에게 저지되었다. 이후 스트랫퍼드는 8명의 세속 귀족과 4명의 주교로 구성된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의회에 출석해 모든 혐의를 밝히겠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대주교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며 압력을 가하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4월 28일에 스트랫퍼드를 의회에 출석시켜 그에 대한 혐의를 밝히게 했다. 그 후 하원 의원 뿐만 아니라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들 대다수가 스트랫퍼드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는 청원서를 작성했고, 에드워드 3세는 5월 3일에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의회가 왕실 예산을 감찰하는 권한이 인정되었고, 왕국의 주요 장관들이 의회에서 취임 선서를 하도록 요구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또한 잉글랜드 왕국의 영주와 장관은 체포될 수 없으며 오직 "평등한 법원의 의회"에서만 재판을 받을 수 있고, 왕은 이 결정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 법령이 왕의 특권을 침해한다고 여겼기에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1341년 10월 1일, 에드워드 3세는 분위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 의회가 제정한 일련의 법령을 폐지했다. 10월 23일, 에드워드 3세와 스트랫퍼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하지만 왕에게 군자금을 제대로 보내지 않고 불경한 언사를 내뱉은 혐의는 계속 이어지다가 1343년에 이르러서야 왕의 특명으로 해제되었다. 이후 그는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원로 정치가로서 존중받았고, 에드워드 3세가 1345년과 1346년에 잉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의회 의장 직을 맡았다. 1348년 8월 23일 서식스의 메이필드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고, 9월 9일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