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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라곤의 욜란다 Yolanda de Aragón |
출생 | 1384년 8월 11일 |
아라곤 왕국 사라고사 | |
사망 | 1441년 11월 14일 |
프랑스 왕국 소뮈르 | |
아버지 | 추안 1세 |
어머니 | 바르의 욜랑드 |
형제 | 차이메, 페란도, 안토니아, 레오노르, 피에르, 추아나 |
남편 | 앙주 공작 루이 2세 |
자녀 | 루이 3세, 르네, 샤를 4세, 마리, 욜랑드 |
직위 | 앙주 공작부인, 멘 및 프로방스 백작 부인, 나폴리 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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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의 왕녀. 1400년 앙주 공작 루이 2세로 시집간 뒤 40여 년간 프랑스와 아라곤, 이탈리아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샤를 7세의 정신적 지주로서 활약한 인물이다.2. 생애
1384년 8월 11일 아라곤 왕국 사라고사에서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와 바르 공작 로베르 1세의 딸 욜랑드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차이메, 페란도, 안토니아, 레오노르, 피에르, 추아나가 있었는데 모두 유년기에 사망하고 오직 그녀만 무탈하게 성장했다. 추안 1세는 욜랑드와 결혼하기 전에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인 마르트와 결혼했는데, 이중 추아나만이 무탈하게 성년이 되어 푸아 백작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의 부인이 되었다.1390년, 욜란다는 앙주 공작이자 명목상 나폴리 국왕인 루이 2세와 약혼했다. 지난날 아라곤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놓고 전쟁을 벌인 바 있었던 앙주 가문은 이 결혼을 통해 바르셀로나 왕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폴리 왕국을 탈환하길 희망했고, 아라곤 왕국은 프랑스 왕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욜란다는 초기에는 아라곤 왕국과 오랜 세월 갈등을 벌였던 앙주 가문에 가고 싶지 않아 결혼에 반대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라곤 왕실의 강력한 권고에 결국 철회했고, 1400년 12월 2일 아를에서 루이 2세와 결혼식을 거행했다.
1410년 5월 31일,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급사했다. 이후 2년간 아라곤 왕위를 놓고 여러 후보가 경합했는데, 그녀는 루이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루이 3세를 아라곤 국왕으로 내세웠으며, "아라곤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앙주 가문은 시칠리아 왕국, 예루살렘 왕국,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도 칭하고 있었기에, 욜란다는 '네 왕국의 왕비'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412년 6월 25일 카스페 협약에서, 아라곤 귀족들이 페란도 1세를 아라곤 국왕으로 옹립하면서, 아들 루이 3세를 아라곤 국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무렵, 프랑스 내에서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남편 루이 2세는 나폴리 왕위를 되찾는 데 골몰하느라 해외에 떠나 있었기 때문에, 욜란다가 남편을 대신해 앙주에서 권력을 잡고 내전에 개입했다. 그녀는 처음엔 자기 자녀 중 한 명과 용맹공 장의 딸 카트린 드 부르고뉴의 결혼을 주선했지만, 곧 입장을 바꿔 아르마냐크파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프랑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협의해 자기 딸 마리와 샤를 왕자와 결혼을 협상했다. 그 결과 1413년 12월 18일, 샤를 왕자와 마리의 약혼식이 루브르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1414년 2월 5일, 샤를과 마리는 욜란다의 인도 하에 앙주로 이동했다. 그 후 샤를 왕자는 1416년까지 앙주와 프로방스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자신을 자상하게 대하는 욜란다에게 많이 의지했다.
1415년 12월 18일, 프랑스 왕위 후계자 루이 드 기옌이 사망했다. 뒤이어 장 드 투렌이 프랑스의 도팽이 되었으나, 그 역시 1417년 4월 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샤를 왕자가 프랑스의 도팽이 되었다. 1417년 4월 29일 루이 2세가 병사했고, 당시 36세였던 욜란다가 아직 14살이었던 장남 루이 3세를 대신해 앙주 공국을 다스렸다. 예한 드 부르디네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보 왕비가 샤를 왕자를 파리로 보내달라고 하자, 욜란다는 이에 대해 다음의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연인과 함께 사는 여성에게는 아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소. 나는 그 아이가 그의 형제들처럼 당신의 보살핌 아래 죽도록 키우지 않았고, 당신이 그를 당신처럼 잉글랜드인으로 만들거나 그의 아버지처럼 그를 미치게 만들지 않았소. 그는 나와 함께 남을 것이며, 감히 그를 빼앗아 가려고 노력하지 마시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자보가 이후에도 욜란다와 서신을 주고받았음이 확인되는데, 이렇듯 통렬한 질책성 서신을 받은 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며 서신의 진위를 의심한다. 아무튼 샤를 왕자는 1417년 4월 29일 파리로 돌아갔고, 어머니 이자보와 프랑스 무관장 베르나르 7세 다르먀냐크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던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군이 파리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 시에 입성한 뒤 베르나르 7세를 비롯한 아르마냑파를 대거 학살했다. 샤를은 바스티유 원수 겸 총독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에게 이끌려 부르주로 피신한 뒤 부르고뉴파에 맞섰다.
욜란다는 샤를 왕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녀는 프로방스 일대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동원해 도팽의 이름으로 잉글랜드군과 맞섰다. 잉글랜드군이 앙주 공국의 수도 앙제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또한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 6,000명이 앙주, 멘, 투르 및 일드 프랑스 일대의 아르마냑파 요새를 방어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420년 5월 21일,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왕자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박탈되었고,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기로 했으며,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자녀가 헨리 5세의 뒤를 잇기로 했다. 샤를 왕자는 이 조약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유일한 상속자라고 선언했고, 욜란다 역시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1422년 4월 22일, 욜란다의 장녀 마리와 샤를 왕자의 결혼식이 부르주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한 후, 8월 31일에 사망한 헨리 5세의 갓난아들 헨리 6세가 트루아 조약에 근거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샤를은 이에 불복해 1422년 10월 30일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에서 아니 마리와 함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칭했다. 이에 부르고뉴파와 잉글랜드 측은 그를 "부르주의 왕"이라고 조롱했고, 정당한 국왕 헨리 6세에 맞서는 반역자, 찬탈자라고 몰아세웠다. 이후 프랑스의 패권을 놓고 헨리 5세를 추종하는 부르고뉴-잉글랜드 연합과 샤를 7세를 지지하는 아르마냑파와 앙주 공국 동맹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423년 9월, 잉글랜드 장성 존 드 라 폴이 이끄는 맨앳암즈 2,000명과 장궁병 8000명이 노르망디에서 출발해 멘과 앙주 전역을 습격했다. 그들은 세그레를 점령한 뒤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1,200마리의 황소와 소떼를 노획한 후 노르망디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욜란다는 자기가 관리하는 영지가 심하게 약탈당한 것에 격분해 아르마냑파 인사들 중 반 잉글랜드 성향이 가장 강한 인사들에게 당장 보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장 8세 다르쿠르,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6,000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고, 1423년 9월 26일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서 노르망디로 귀환하던 존 드 라 폴의 잉글랜드군을 섬멸했다.
1424년 8월 17일, 샤를 7세를 받드는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베르뇌유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이후 샤를 7세는 시어머니인 욜란다의 조언에 따라 1423년 아미앵 조약을 맺은 뒤 잉글랜드에 협력하던 브르타뉴 공국에 접근했다. 욜란다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여러 경로를 통해 협상한 끝에, 장 5세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브르타뉴 공국이 샤를 7세와 동맹을 맺는다는 협약이 맺어지는 데 기여했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샤를 7세가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해 4월, 리슈몽은 욜란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샤를 7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그해 6월 초, 리슈몽과 욜란다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샤를 7세의 군대와 대치했다. 샤를 7세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를 해임했다.
1429년 2월 25일, 동부 로렌 지방의 시골 동레미에서 온 16세 소녀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 거주하고 있던 샤를 7세를 알현했다. 그녀는 자신이 오를레앙을 구하고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 삼으라는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다. 욜란다는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듣자 자기가 머물고 있던 앙제 성으로 그녀를 데려와서 철저히 검사해 처녀라는 사실이 입증되게 했으며,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군대를 맡기도록 독려했다. 이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했고,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와 마리 왕비의 대관식이 프랑스 역대 국왕과 왕비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1]
1431년 5월, 앙제 인근 베와르 섬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욜란다는 각자의 아들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와 샤를이 전우로서 함께 행동하겠다고 맹세하는 행사를 거행했다. 그리고 그해 8월엔 욜란다의 딸인 욜랑드와 장 5세의 아들 프랑수아의 결혼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앙주 가문과 브르타뉴 공국이 굳건한 동맹을 맺었고, 자연히 샤를 7세에 대한 브르타뉴 공국의 지원도 강화되었다. 또한 그녀는 샤를 7세를 설득해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프랑스 무관장으로 복귀하도록 했고, 막내아들 샤를이 왕실 궁정에서 왕을 모시도록 주선했다. 한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적대시해 그가 프랑스 궁정에서 축출되도록 했던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가 실각한 배경에 그녀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불확실하다.
말년에 소뮈르로 은퇴해 그곳에서 조용히 지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정치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앙제의 주교직이 공석이 되었을 때, 샤를 7세는 한 사제를 앙제의 주교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샤를 7세가 선택한 후보가 도시에 나타나면 참수하겠다고 위협했고, 샤를 7세는 앙제의 주교직이 욜란다의 비서에게 넘어가는 걸 허용했다. 한편, 그녀는 손녀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에게 예절과 문학 및 장부를 확인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으며, 마르그리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하도록 주선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442년 11월 14일에 사망했고, 앙제의 생 모리스 대성당에 남편 루이 2세와 함께 안장되었다.
3. 가족
- 루이지 2세(1377 ~ 1417): 앙주 공작, 나폴리 국왕.
- 앙주 공작 루이 3세(1403년 ~ 1434년): 앙주 공작
- 르네(1409년 ~ 1480년): 앙주 공작, 나폴리 국왕.
- 샤를(1414년 ~ 1440년): 멘 백작, 기즈 백작.
- 마리(1404년 ~ 1434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왕비.
- 욜랑드(1412년 ~ 1440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