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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20:41

샤를 4세 뒤 멘

파일:샤를 4세 뒤 멘.jpg
이름 샤를 4세 뒤 멘
Charles IV du Maine
출생 1414년 10월 14일
프랑스 왕국 앵드르에루아르 라리슈 샤토 드 플레시레투르
사망 1472년 4월 10일 (향년 57세)
프랑스 왕국 앵드르에루아르 누비르로이
아버지 앙주 공작 루이 2세
어머니 아라곤의 욜란다
형제 루이 3세, 르네, 마리, 욜랑드
아내 코벨라 루포, 이자벨 드 뤽상부르생폴
자녀 루이즈, 샤를 5세, 루이( 사생아), 장(사생아)
직위 멘 백작, 기즈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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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멘 백작, 기즈 백작.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가담해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으며, 루이 11세의 동지로서 공익동맹에 맞섰지만 말년에 총애를 잃었다.

2. 생애

1414년 10월 14일 프랑스 왕국 앵드르에루아르 라리슈 샤토 드 플레시레투르에서 앙주 공작이자 명목상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었던 루이 2세와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의 딸인 욜란다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 3세, 르네, 마리[1], 욜랑드[2]이 있었다. 1419년까지 가족과 함께 앙주 공국의 수도인 앙제에서 자란 뒤 형 루이 3세가 나폴리 국왕이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내려간 동안 그를 대신해 프로방스로 보내졌다. 1434년 루이 3세가 사망한 뒤 멘 백작이 되었으며, 1444년 장인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이 사망한 뒤 기즈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장성한 뒤 샤를 7세의 존경을 받던 어머니 욜란다의 뜻에 따라 샤를 7세의 편에 섰고, 1433년 샤를 7세의 총신이었던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를 몰락시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후 샤를 7세의 궁정에 들어가 그곳에서 형 르네와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고, 자신의 일족 또는 친한 사람들로 정부를 구성하도록 종용했다. 1437년부터 잉글랜드에 대항한 샤를 7세의 원정에 참여했으며, 1437년 몽뜨흐 공방전, 1441년 퐁투아즈 공방전, 1449 ~ 1450년 노르망디 원정, 1450년과 1453년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해, 프랑스 왕국이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또한 1440년 랑그독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440년 샤를 7세를 상대로 프라그리 반란을 일으킨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과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드 부르봉 등은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샤를 4세를 해임하라고 요구했지만, 샤를 7세가 곧바로 진압하러 나서자 반군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샤를 7세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1442년 어머니 욜란다가 사망한 후 피에르 드 브레제 자크 쾨르 등과의 경쟁에서 점차 밀렸고, 급기야 1445년 피에르 드 브레제에게 밀려 궁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1446년 도팽 루이와 동맹을 맺고 브레제를 정계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지만 1455년경에 궁정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고, 샤를 7세가 사망할 때까지 궁정에서 활동했다. 1461년 조카인 루이 11세가 즉위한 뒤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루이 11세가 서로 화해하도록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465년 샤롤레 백작이자 부르고뉴 공작 후계자인 용담공 샤를, 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로렌 공작 장 2세, 느무르 공작 및 라 마르쉐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느무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도매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달브레, 피에르 당부아즈,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그리고 루이 11세의 형제인 기옌 공작 샤를이 루이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루이 1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싸우려는 루이 11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다른 동맹군과 가담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소홀히 했으며, 1465년 7월 16일에 발발한 몽레리 전투에서 좌익 부대를 이끌고 있다가 용담공 샤를이 몸소 이끄는 부르고뉴 우익 부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왕실군 전력의 1/3과 함께 도주해버리는 추태를 보였다. 그럼에도 루이 11세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고, 파리를 포위한 공익 연맹과의 협상을 맡겼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로렌 공작 장 2세가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 11세는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랑그독 보안관 직책을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후 샤를은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72년 4월 10일 앵드르에루아르의 누비르로이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1404 ~ 1434,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왕비 [2] 1412 ~ 1440,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