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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8:31:38

자크 쾨르

파일:자크 쾨르.jpg
성명 자크 쾨르
Jacques Cœur
생몰년도 1395년에서 1400년 사이 ~ 1456년 4월 2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부르주
사망지 히오스 섬
아버지 피에르 쾨르
어머니 마리 램버트
형제 니콜라 쾨르
배우자 레오데파르의 마세
자녀 장, 앙리, 라보, 페레트, 조프루아, 조프레트
직위 조폐국 관리인, 프랑스 왕실 재무감독관, 국왕 고문, 교황군 사령관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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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상인, 은행가 및 선주. 본래 부르주아 신분이었다가 프랑스 왕실이 막강한 재정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적을 인정받아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451년 모함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추방된 뒤 로마로 망명했다가 교황군 총사령관으로서 히오스 섬에 원정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2. 행적

1395년에서 1400년 사이 프랑스 왕국 부르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에르 쾨르는 모피 상인으로. 당대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가장 부유한 모피 상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는 정육점 주인 장 바클리에의 미망인 마리 램버트와 결혼했다. 그에게는 남동생 니콜라 쾨르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이 있었다. 니콜라 쾨르는 뤼송의 주교를 역임했으며, 여동생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비서인 장 보셰텔의 부인이 되었다. 그의 조카인 페레트는 나중에 칼라브리아 공작의 시종장이 될 장 드 빌리지의 부인이 되었다.

자크는 일찍이 부르주 시의 12개 환전소 중 하나를 관리해 근면하고 독창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1418년 또는 1420년에 부르주의 주교관이자 베리 공장 장 드 베리의 시종이었던 램베르 드 레오데파르와 부르주 출신의 조폐국 주인의 딸인 잔 투사르의 여식인 레오데파르의 마세와 결혼했다. 마세와의 결혼은 그가 프랑스 국왕을 섬기는 경력을 쌓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27년, 자크는 환전상인 피에르 고다르와 협력해 부르주 통화를 덴마크인 라바우의 이름으로 주조했다. 1429년, 그들은 은화 300크라운에 법적으로 정해진 기준 이하로 은을 넣음으로써 화폐 가치를 손상 입히고 120 ~ 140 크라운의 이윤을 빼돌렸다는 고발을 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잔 다르크의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주는 대가로 가벼운 벌금을 지불하고 사면받았다.

그 후 자크는 피에르 고다르와 바르텔레미 고다르 형제와 함께 레반트 무역에 눈길을 돌렸다. 당시 레반트 무역은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프랑스 상인이 여기에 뛰어드는 건 매우 무모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레반트 무역 회사'를 프랑스 최초로 설립한 뒤 론 강변의 셰시, 리옹, 보졸레의 은, 구리 및 납 광산을 개발하여 선박 건조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또한 에그모르트에 조선소를 세웠고, 몽펠리에와 마르세유를 기항지로 삼았으며, 사부아를 기점으로 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를 상업 루트로 설정했다. 1432년 갤리선 한 척을 건조한 뒤,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로 항해했다. 이때 그의 배에는 문장과 함께 “씩씩한 마음 속에 어찌 불가능이 있으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무역 거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프랑스로 돌아와서 몽펠리에에 회사 지부를 설립했다.

자크와 고다르 형제의 레반트 무역 회사는 곧 큰 성공을 거두었다. 12척 이상의 갤리선이 이 회사의 소유로 등록되었으며, 모든 항구와 내륙 주요 도시의 대리인 수는 300명에 달했다. 연대기 작가 마티유 드 쿠시에 따르면 "왕국의 다른 모든 상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또한 그의 회사는 거래 계약을 매우 충실히 지키고 물건 값을 후하게 쳐주는 등 극도의 선의를 보여준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회사는 나중엔 향신료를 프랑스로 수입하고 프랑스 상품을 무슬림 항구로 운송하는 독점권을 누렸다.

탁월한 상업 수완으로 막대한 돈을 번 자크는 아내의 인맥을 통해 샤를 7세의 궁정과 연결되었다. 1435년 조폐국 관리인에 선임되어 금관 왕관 주화를 전문적으로 생산할 책임을 맡았다. 1439년 2월 2일에는 샤를 7세에 의해 프랑스 왕국 재무감독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왕실의 재정 지출을 정규화하고 광산 개발 무역 확충 등 새로운 재원 창출에 몰두했으며, 토지세(Taille), 난로세(Fouage) 등 직접세와 소금세(Gabelle du sel) 등 간접세를 점진적으로 도입해 재정 수입을 늘렸다. 그 결과, 샤를 7세는 잉글랜드군을 프랑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세 기반을 확립하고 자원을 평가하는 데 있어 통계의 이점을 이해하고 왕국의 인구와 수입에 대한 요약 수치를 왕에게 제시했으며, 치안을 잘 갖춰야 세금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치안을 위한 지침을 작성하기도 했다.

1441년 4월, 샤를 7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자크와 아내,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귀족 증서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귀족 신분이 된 그는 이후 레반트 및 이탈리아와의 무역 전반을 관리했다. 주로 천, 철, 캔버스, 와인, 구리 및 기타 금속을 수출했고, 실크, 금판, 모피, 가죽 제품, 카펫 및 보석을 수입했다. 1442년에는 프랑스 국왕의 고문이 되었으며, 1444년 툴루즈 대주교와 함께 랑그독 삼부회를 소집하고 삼부회를 주재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1446년에는 제노바 공화국으로 파견되어 프랑스와 제노바의 재결합을 요구하는 정파를 후원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447년 로마로 가서 로마 교황 니콜라오 5세 대립교황 펠릭스 5세 간의 중재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때 그는 뛰어난 언변을 선보여 니콜라오 5세의 호의를 얻어냈다.

1447년. 자크는 92% 순은인 양질의 은화를 주조하라는 샤를 7세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브루슈 마을의 팜파일리 산에 있는 은광을 구입하여 대대적으로 개발했으며, 보졸레와 리옹에 있는 은, 철, 납, 구리 광산도 활용했다. 또한 샤를 7세가 잉글랜드로부터 노르망디를 재정복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히자, 자크는 즉시 20만 크라운을 기부했다. 1447년 7월 27일 샤를 7세가 루앙에 입성했을 때, 그는 프랑스 원수 장 드 뒤누아 옆에서 뒤누아와 같은 옷을 입은 채 왕의 행렬에 동행했다. 1450년 8월 12일, 자크는 노르망디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이었던 셰르부르에 고립된 잉글랜드군과 협상해 샤를 7세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파일:자크 쾨르 궁전.jpg

모피 상인의 자제로 태어나 레반트와 이탈리아 무역 전반을 관리하고 프랑스 왕국의 재정을 관리하고 왕의 고문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는 자연스럽게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다. 당시 백년전쟁으로 망한 영주 또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재산을 팔곤 했는데, 그는 이들로부터 부동산을 대거 구입했다. 그 결과, 그는 40개 이상의 대저택을 손에 넣었다. 그의 집은 여러 도시에 걸쳐 있었는데, 2곳은 파리에 있었고 2곳은 몽펠리에에 있었으며, 다른 집은 리옹, 마르세유, 베지에, 생푸르세인쉬르시울, 상세르, 셰시 등지에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한 저택은 부르주에 있는 일명 '자크 쾨르 궁전(Palais Jacques Coeur)'이다. 이 궁전은 1443년에서 1453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건설 비용은 10만 금 크라운에 달했다. 건축학자들은 이 건물을 후기 고딕 건축의 정수라고 극찬한다. 한편, 그는 영주권을 구입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1450년 2월 3일, 자크는 위그 드 카르맹으로부터 므느뚜와 캥티이를 구매하고 두 곳의 영주가 되었다. 여기에 셍파흐고를 구입했으며, 1452년경에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오제빌 성을 구입했다.

자크는 샤를 7세의 정부였던 아녜스 소렐의 총애를 얻기도 했다. 1444년,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에게 2,600개의 보석을 재공했는데, 이 보석을 마련한 장본인이 바로 자크였다. 아녜스는 자크로부터 받은 귀중한 옷감을 대량으로 소비해 자신을 치장하는 데 썼고, 궁정의 모든 여인들은 화려한 복종을 한 그녀를 앞다퉈 모방했다. 일부 작가는 자크와 아녜스가 불륜 관계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다만 아녜스가 자크를 전적으로 지지해 의심이 많았던 샤를 7세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1450년 2월 3일 아녜스 소렐이 사망한 뒤 자크의 입지는 점차 흔들렸다. 그가 프랑스 무역 전반을 다루고 중개인, 은행가로 활약하자, 상인들은 그가 이익을 독점하는 바람에 자신들에게 돌아가는 게 별로 없다고 불평했으며, 정적들은 그의 막대한 재산과 정계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질시했다. 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던 채무자들은 돈을 갚을 길이 막막해지자 그를 아예 제거함으로써 빚을 갚을 필요가 없게 하기를 희망했고, 툴루즈의 재정 재무관인 오토 카스텔라니는 그를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길 원했다. 샤를 7세는 아녜스가 사망한 뒤 자크를 질시하는 무리의 모함을 듣고 그에 대한 신뢰를 차츰 잃었다.

1451년 7월 무렵, 아녜스 소렐이 자크 쾨르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빚진 궁정 여성 잔 드 방돔이 자크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 혐의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아녜스의 죽음에 깊이 상심해 있던 샤를 7세는 자크를 의심했다. 여기에 정적들이 여러 혐의를 자크에게 뒤집어씌우며 고발하자, 샤를 7세는 결국 그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1451년 7월 31일 생장당젤리 인근 타일부르 성에서 열린 대의회에서, 샤를 7세는 자크 쾨르를 최포하고 그의 재산을 압수해 가스코뉴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크 쾨르의 주요 채무자였던 툴루즈의 집행관 앙투안 드 샤반이 직접 자크 쾨르를 체포했고, 오토 카스텔라니가 자크를 대신해 왕실 재무 감독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자크는 무슬림에게 프랑스 금과 주괴를 지급한 혐의, 소액의 돈을 만든 혐의, 갤리선을 위해 노잡이를 납치한 혐의, 자신의 배에 성역을 차지했던 기독교 노예를 돌려보낸 혐의, 사기와 강탈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혼신을 다해 결백을 호소했고, 그의 자녀들과 친구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나 22개월 동안 감옷 다섯 곳을 돌며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1453년 6월 5일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속죄하고 왕에게 벌금 3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왕실 재무부에 10만 크라운을 상환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 벌금을 낼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고, 그 후에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귀국할 수 없었다.

1454년 10월, 자크는 푸아티에 성에 갇혀 있다가 비밀리에 탈출한 뒤 리모주로 피신했고, 1455년 2월 보케르로 이동했다. 이후 조카 페레트의 남편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의 시종장인 장 드 빌리지의 도움으로 프로방스로 이동한 뒤 로마로 이동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기에 자신의 궁전에 머무르고 의사의 치료를 받게 했다. 이후 로마에서 재활하고 재산을 끌어모은 자크는 1456년 새 교황 갈리스토 3세가 선포한 십자군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고, 교황군 사령관을 맡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던 제노바 영토인 히오스 섬으로 향했다. 원정군은 로도스를 통과한 후 히오스에 상륙한 뒤, 히오스 성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오스만군에 맞섰다.

그러던 1456년 11월 25일, 자크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포탄으로 인한 외상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이질 같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병립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유해는 히오스의 코르들리에 교회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히오스가 오스만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 파괴되었다. 그가 오스만군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샤를 7세는 1457년 8월 5일자 왕실 칙령을 통해 "자크 쾨르는 가톨릭 신앙의 적들에게 자신의 몸을 노출시키면서 사망했다"라고 선언하고, 자크의 재산 일부를 자녀들에게 반환하도록 했다. 이후 자크의 자녀들과 자크를 몰락시킨 공으로 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았던 앙투안 드 샤반 간의 분쟁이 지리하게 이어지다가, 샤를 8세 시기인 1489년에 이들의 후손들이 상호 합의를 맺으면서 종식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