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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18:27:48

샤를 2세 달브레

이름 샤를 2세 달브레
Charles II d'Albret
출생 1407년
프랑스 왕국 알브레
사망 1471년
프랑스 왕국 알브레
아버지 샤를 1세 달브레
어머니 마리 드 쉴리
형제자매 잔, 기욤, 장
아내 안 다르마냐크
자녀 장 1세, 루이, 아르노 아마뉴, 샤를, 질, 마리, 잔
직위 알브레 영주, 드뢰 백작, 타르타 자작, 드 마랭 자작, 닥스 자작, 드 네라크 영주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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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행적

1407년경 프랑스 왕국 알브레 가문의 영지에서 알브레 영주, 드뢰 백작이자 프랑스 무관장이었던 샤를 1세 달브레와 부아벨, 쉴리, 라 샤펠 당길롱, 엑스당기옹, 생공동, 샤토메양, 생트에르민의 영주였던 루이 드 쉴리의 외동딸인 마리 드 쉴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잔[1], 기욤[2], 장[3]이 있었다.

1415년 10월 25일 아버지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한 뒤 9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다만 드뢰 백국은 잉글랜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1417년 10살의 나이에 아르마냐크 백작이며 도팽 샤를을 지지하는 아르마냑파의 수장이었던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딸 안 다르마냐크와 결혼했다. 이후 부르주 왕실 의회의 일원을 맡던 그는 1427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도팽의 총신 피에르 드 지악을 처단하는 걸 지원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원정에 참여했고, 베리 지방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1440년 8월 31일,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와 가스코뉴의 영주 토머스 램프스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알브레 가문 영지에 속한 타르타 시를 포위했다. 샤를 2세는 조카인 로마뉴 백작 장과 함께 타르타 인근 잉글랜드 영지, 특히 샬로세와 쿠두레스, 오디뇽, 생콜롬브, 에레스 등지를 약탈함으로써 적의 포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포위를 굳건히 이어갔다. 하지만 타르타의 방비가 강건했기 때문에 함락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잉글랜드로 소환되었다. 램프스턴은 타르타를 포위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덧 6개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자 초조함을 느낀 램프스턴은 샤를 2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샤를 2세 역시 포위된 부하들로부터 성의 식량이 바닥나서 기아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심란해져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양자는 생세베르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1441년 1월 20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타르타 마을을 어린 아들인 샤를에게 넘기고,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가스코뉴 인사들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타르타는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인사들과 알브레 가문의 공동 통치를 받는다.

평화 협약은 여기에 더해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양자는 3개월간 휴전을 맺고, 휴전 기한이 끝나는 날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주 또는 대리인이 타르타 마을의 소유권을 가리는 재판에 군대를 이끌고 참석해 승부를 보기로 했다. 만약 잉글랜드가 승리한다면, 알브레의 땅은 샤를 2세의 미성년 아들인 샤를에게 주어지고, 샤를 2세와 아들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 만약 이것을 거절한다면, 알브레 가문 영지는 몰수되어 랭커스터 왕조의 직할지로 흡수될 것이었다. 이 특이한 조항은 샤를 7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사고 싶지 않았던 샤를 2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 조항을 넣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당시 샤를 7세는 일드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던 중이라 가스코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가스코뉴의 조그마한 도시일 뿐인 타르타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타르타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해도, 샤를 7세의 본거지에서 수백 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행군하는 동안 친 잉글랜드 영주들의 거센 저항과 잉글랜드군의 방어와 역습에 직면해야 하니, 신중한 샤를 7세가 그런 모험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상황은 잉글랜드가 예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소환된 이래, 잉글랜드 내부의 정쟁이 갈수록 극심해져서 가스코뉴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고, 가스코뉴 당국은 잉글랜드의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재판'에 투입할 병력을 동원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442년 6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는 사이,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낸 샤를 7세는 타르타에 관심을 돌렸다. 조그마한 소도시인 타르타가 잉글랜드에 넘어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프랑스 남서부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알브레 가문이 잉글랜드로 돌아서는 것은 큰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많은 귀족들이 알브레 가문을 뒤따라 잉글랜드에 귀순함으로써 프랑스 남부에 대한 발루아 왕조의 지배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1442년 5월, 샤를 7세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 포병대장 장 뷔로, 외 백작 샤를 다르투아 등을 대동한 12,000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타르타로 출진했다. 그해 6월 24일 재판 날에 정확히 도착한 리슈몽은 어린 샤를과 샤를의 스승을 맡던 카우나 영주와 오제로 드 생페르로부터 타르타 성문 열쇠를 받고 타르타 시를 프랑스의 영토로 확정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의 지배를 받던 드뢰 백국은 1441년에 프랑스군에게 도로 넘어갔고, 샤를 7세는 샤를 2세 달브레가 드뢰 백국을 소유한다고 확인했다.

1465년,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과 부르고뉴 공국로부터 아라스 조약 때 양도되었던 솜을 회수하는 조치에 반발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등을 끌여들어 반기를 들고 공익 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공익 동맹에 가담했지만,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고 자기 영지를 지켰다. 이후 루이 11세와 공익 연맹이 화해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을 때, 그는 공익 연맹에 가담한 일에 대해 사면받았다. 1471년 알브레 영지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1403 ~ 1433, 푸아 백작 장 1세 드 푸아의 부인 [2] ? ~ 1429, 오르빌 영주. 루브레 전투에서 전사했다. [3] ? ~ ?,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