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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6:48

토머스 램프스턴

성명 토머스 램프스턴
Thomas Rempston
생몰년도 1392년 이전 ~ 1458년 10월 1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램프스턴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빙햄
아버지 토머스 램프스턴
어머니 마가렛 리케
아내 앨리스 베커링
자녀 엘리자베스, 이사벨라, 마저리
직위 기사, 가스코뉴 세네샬[1]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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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기사.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대적했다.

2. 생애

노팅엄셔의 샤이어 기사 토머스 램프스턴과 기사 사이먼 리케의 딸인 마가렛 리케의 아들이다.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치세 초기부터 노팅엄셔의 램프스턴 마을에 정착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1393년 노팅엄셔 보안관을 역임했고, 1398년 더비 백작 블롱브로크의 헨리를 추종했다가 리처드 2세에게 추방된 뒤 프랑스로 건너갔고, 1399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로 등극하는 과정에 함께 했다. 이후 런던 탑 순경을 맡아 리처드 2세를 감시했고, 1400년 템스강 함대 사령관에 발탁되었으며,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06년 퀸버러에서 에식스까지 템스강을 횡단하던 중 프랑스 해적들에게 공격당해 생포되었지만 곧 풀려났고, 그해 10월 31일 런던 탐 인근의 템스강에서 익사했다.

아들 토머스 램프스턴은 1413년과 1416년에 노팅엄셔를 대표하여 의회에 소환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한 뒤 집안이 빈곤해져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프랑스로 가서 군공을 세움으로써 활로를 찾기로 했다. 1415년 8명의 맨앳암즈와 24명의 궁수병과 함께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했고, 1417년 프린트셔의 고위 보안관과 플린트 성의 종신 순경으로 임명되었다. 1418년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루앙이 함락된 뒤 벨렝콩브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1419년 11월 22일 멜룬의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베드퍼드 공작 존의 시종이자 왕실의 청지기가 되었다. 1423년 크라방 전투에 참여했으며, 1424년 초 부르고뉴 사령관인 리그니 백작 장 2세 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칼레에서 출발해 오아시를 포위해 공략한 뒤, 그해 6월 기즈를 포위했지만 1425년 초까지 함락되지 않자 물러나 파리에서 베드퍼드 공작과 합류했다. 1426년 1월 브르타뉴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6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브르타뉴 습격 작전에 참여해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렌까지 침투했다. 그러다가 브르타뉴군이 대규모 역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전리품을 가지고 노르망디-브르타뉴 국경 지대에 있는 성 제임스 요새로 후퇴했다.

1426년 2월 27일,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 민병대 16,000명이 생잠 요새로 접근했다.( 생잠 요새 공방전) 그들은 정찰을 위해 나선 잉글랜드 병사들을 성안으로 몰아낸 뒤 도시를 포위했다. 리슈몽은 수적으로 절대 우세하지만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열악한 민병대로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 여기고, 강력한 포병대를 동원해 여러 방향에서 요새를 포격하게 했다. 포격은 7일간 이어졌고, 수비대가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출격했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급기야 성벽에 2개의 큰 구멍이 생기자, 리슈몽은 전령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 시기 급료가 미지급되어 일부 병력이 탈영하자, 리슈몽은 장교들과 논의한 끝에 지체했다가 군대가 붕괴되는 꼴을 보느니 지금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3월 6일, 브르타뉴군은 생잠 요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램프스턴과 잉글랜드 병사들은 온종일 격전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리슈몽이 재차 공세를 가해오자 점차 밀렸다. 이때 리슈몽이 요새 반대편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겼던 부대가 귀환했는데, 브르타뉴 민병대는 이들이 요새를 구하러 오는 잉글랜드군이라고 착각하고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호기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 큰 손실을 입혔다. 수백 명의 민병대가 인근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고, 많은 이들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리슈몽은 잔여 병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다들 도망쳐버려서 성공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숙영지를 불태운 뒤 퇴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민병대 60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생포되었으며, 18개의 군기가 잉글랜드군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이틀 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생잠 요새에 당도했다. 그는 브르타뉴군이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브르타뉴로 침입해 공국의 수도인 렌을 압박하다가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로부터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이후 장 5세는 1427년 9월 8일 트루아 조약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서 받들기로 했다. 여기에 아들 질 드 브르타뉴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1427년, 램프스턴은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퐁토르송 공방전을 도왔고, 수비대는 그해 5월 8일에 항복했다. 2년 후인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했고, 뒤이어 존 파스톨프의 군대에 편입되어 잔 다르크의 독려에 힘입어 루아르 원정을 감행한 프랑스군에 맞섰다. 이때 그들은 루아르 계곡에서 프랑스군과 맞서던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와 함께 잔빌에서 전쟁 회의를 열어 어찌할 지를 논의했다.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의 군세가 강력하니 일단 멍과 보장시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철수해서 북쪽에 재집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탈보트는 방어를 강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도주할 수 는 없다고 주장했다. 램프스턴은 탈보트를 지지했고, 파스톨프는 탈보트의 강권에 밀려 루아르 강으로 진군해 프랑스군의 압박을 받는 수비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기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자, 잉글랜드군은 파리로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다 1429년 6월 18일 파테에서 프랑스 기병대에게 따라잡혔고, 뒤이은 파테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에게 생포된 뒤 1435년까지 감옥에 갇혔다가 몸값을 가까스로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가스코뉴의 세네샬로 선임되어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의 행정을 돌봤다.

1440년 8월 2일,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300명과 장궁병 2,000명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압박으로부터 가스코뉴를 보호하고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 남서부 도시 및 마을들을 공략하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타르타를 첫번째 목표로 삼았고, 가스코뉴 지방 의회는 타르타를 6개월간 포위하는 데 들어가는 군사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램프스턴이 이끄는 100여 명의 맨앳암즈, 400여 명의 장궁병, 몇 개의 대포도 가세했다.

1440년 8월 31일, 헌딩턴 백작과 램프스턴은 타르타 공방전에 착수했다. 알브레 공작 샤를 2세 달브레와 그의 조카인 로마뉴 백작 장은 타르타 인근 잉글랜드 영지, 특히 샬로세와 쿠두레스, 오디뇽, 생콜롬브, 에레스 등지를 약탈함으로써 적의 포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포위를 굳건히 이어갔다. 하지만 타르타의 방비가 강건했기 때문에 함락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잉글랜드로 소환되었다. 램프스턴은 타르타를 포위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덧 6개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자 초조함을 느낀 램프스턴은 알브레 영주이자 타르타 자작인 샤를 2세 달브레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샤를 2세 역시 포위된 부하들로부터 성의 식량이 바닥나서 기아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심란해져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양자는 생세베르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1441년 1월 20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타르타 마을을 어린 아들인 샤를에게 넘기고,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가스코뉴 인사들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타르타는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인사들과 알브레 가문의 공동 통치를 받는다.

평화 협약은 여기에 더해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양자는 3개월간 휴전을 맺고, 휴전 기한이 끝나는 날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주 또는 대리인이 타르타 마을의 소유권을 가리는 재판에 군대를 이끌고 참석해 승부를 보기로 했다. 만약 잉글랜드가 승리한다면, 알브레의 땅은 샤를 2세의 미성년 아들인 샤를에게 주어지고, 샤를 2세와 아들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 만약 이것을 거절한다면, 알브레 가문 영지는 몰수되어 랭커스터 왕조의 직할지로 흡수될 것이었다. 이 특이한 조항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사고 싶지 않았던 샤를 2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 조항을 넣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당시 샤를 7세는 일드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던 중이라 가스코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가스코뉴의 조그마한 도시일 뿐인 타르타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타르타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해도, 샤를 7세의 본거지에서 수백 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행군하는 동안 친 잉글랜드 영주들의 거센 저항과 잉글랜드군의 방어와 역습에 직면해야 하니, 신중한 샤를 7세가 그런 모험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상황은 잉글랜드가 예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소환된 이래, 잉글랜드 내부의 정쟁이 갈수록 극심해져서 가스코뉴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고, 가스코뉴 당국은 잉글랜드의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재판'에 투입할 병력을 동원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442년 6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는 사이,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낸 샤를 7세는 타르타에 관심을 돌렸다. 조그마한 소도시인 타르타가 잉글랜드에 넘어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프랑스 남서부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알브레 가문이 잉글랜드로 돌아서는 것은 큰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많은 귀족들이 알브레 가문을 뒤따라 잉글랜드에 귀순함으로써 프랑스 남부에 대한 발루아 왕조의 지배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1442년 5월, 샤를 7세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 포병대장 장 뷔로, 외 백작 샤를 다르투아 등을 대동한 12,000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타르타로 출진했다. 1442년 6월 24일 프랑스군이 타르타에 당도했을 때, 잉글랜드군과 가스코뉴 동맹군은 타르타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 샤를과 샤를의 스승을 맡던 카우나 영주와 오제로 드 생페르는 타르타 성문 열쇠를 리슈몽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타르타를 접수한 샤를 7세는 여세를 이어가 가스코뉴 방면 공세를 개시했다. 램프스턴은 이에 맞서 항전했지만 셍세베르가 도팽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공략되었을 때 생포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탈출한 뒤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급습해 생세베르를 탈환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계가 요크의 리처드 에드먼드 보퍼트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혼란에 휩싸이면서 가스코뉴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원은 갈수록 약해졌고, 결국 1451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역을 석권했다. 1452년 10월 존 탈보트가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와서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서부를 탈환했지만,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사하고 가스코뉴는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빙헴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458년 10월 15일에 사망했고, 빙헴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기사 토머스 베커링의 딸인 앨리스와 결혼해 딸 엘리자베스, 이사벨라, 마저리를 낳았다. 이후 빌햄과 랭프스턴 영지는 이사벨라의 남편인 브라이언 스테이플턴이 속한 스테이플턴 가문에 넘어갔다.


[1] Senechal : 봉건시대 군주 밑에서 일했던 다양한 관직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