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9:17:52

에드먼드 보퍼트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Edmund Beaufort, 2nd Duke of Somerset
파일:Edmund Beaufort.Duke of Somerset.jpg
성명 에드먼드 보퍼트
Edmund Beaufort
출생 1406년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사망 1455년 5월 22일 (향년 49세)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주 세인트 올번스
배우자 엘레노어 뷰챔프
자녀 헨리, 에드먼드, 존, 엘리노어, 조앤, 앤,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아버지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어머니 마거릿 홀랜드
형제 헨리, , 조앤, 토머스, 마거릿
직위 모르탱 백작, 도싯 후작, 서머셋 백작, 서머셋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대 서머싯 공작. 백년전쟁 말기 잉글랜드군 장성으로서 프랑스군과 대결했고,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로서 요크의 리처드와 대결했으나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406년경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에서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와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가렛 홀랜드의 네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헨리, , 조앤[1], 토머스, 마가렛[2]이 있었다. 토머스 홀랜드의 아내이자 그의 외할머니인 앨리스 피츠앨런은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이며, 리처드 피츠앨런의 아내 랭커스터의 엘레노어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손자인 3대 랭커스터 공작 헨리의 다섯번째 딸이었다. 그의 오랜 정적이 될 요크의 리처드는 그의 사촌이었다.

1427년 4월 22일 노르망디의 모르탱 백작에 선임되었고, 1431년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어 랭커스터의 존의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432년 바젤 공의회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436년 부르고뉴군이 칼레를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가 습격대를 이끌고 칼레에서 출격해 수많은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마리의 소를 약탈했으며, 집결 장소로 향하는 민병대를 기습해 학살했다. 7월 9일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이끄는 3만 부르고뉴군이 칼레를 포위 공격했지만, 그는 수비대를 잘 이끌어 칼레를 끝까지 사수했다. 그러다가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이끄는 구원군 10,000명이 7월 29일에 칼레로 접근하자, 필리프는 철수했다.( 2차 칼레 공방전) 에드먼드는 칼레를 지킨 공적을 인정받아 가터 기사단의 기사에 발탁되었다. 1439년 11월 30일 프랑스군이 아브랑슈를 포위하자, 구원군을 이끌고 그들을 급습해 패주시키고 수많은 보급품과 대포를 획득했다. 1440년 존 탈보트와 함께 프랑스군이 일시 점령했던 아르플뢰르를 공격해 탈환에 성공했다.

1442년 8월 28일 도셋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1443년 6월 24일 도셋 후작으로 승격했다. 1444년 5월 30일 유일하게 살아있는 형이었던 초대 서머셋 공작 이 원정 실패 이후 심한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코펫 성으로 은퇴했다가 그곳에서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형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1448년 3월 31일 정식으로 서머셋 공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1446년 요크의 리처드가 무능과 잘못된 통치로 잉글랜드군의 패배와 노르망디의 쇠락을 초래한 혐의로 노르망디 총독직에서 해임된 뒤, 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부터 요크의 리처드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1449년 전쟁이 재개된 뒤 프랑스군의 연이은 공세로 노르망디가 위태로워지고 각지의 농촌과 도시에서 프랑스군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장성들과 논의한 끝에 야전을 포기하고 노르망디의 주요 도시와 요새들로 흩어져 요충지를 지키면서 본국에서 구원군을 보낼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1449년 10월 9일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의 가장 큰 도시인 루앙을 포위했다. 그는 며칠간 항전했지만, 10월 17일 루앙 주민들이 루앙 대주교 라울 루셀을 중심으로 대표단을 보내 프랑스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프랑스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프랑스군 지휘관 장 드 뒤누아는 루앙 주민들에 대한 사면과 도시 특권 보장, 잉글랜드 주둔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겠다고 제시했지만, 그는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하고 확답을 미뤘다.

그러나 1449년 10월 19일 아침에 루앙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도시 성문을 열고 잉글랜드군을 성채와 방어탑으로 몰아냈다. 에드먼드는 10월 20일에 뒤누아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제안했던 조건에 따라 항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뒤누아는 잉글랜드군이 답변하기 전에 루앙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으니 약속은 무효가 되었다며 거부했다. 결국 재협상 끝에 10월 23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꼬드벡, 탕카르빌, 옹플뢰르, 아르크, 몽티비예 등 센강 하구의 요충지를 프랑스 측에 대부분 양도하고, 주둔군의 몸값으로 5만 살뤼(8300파운드)를 1년 안에 지불하며 그동안 존 탈보트와 헨리 레드퍼드 등 저명한 지휘관 8명을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이 굴욕적인 협정 소식을 접한 잉글랜드인들은 분노했고, 에드먼드의 평판은 추락했다.

이후 에드먼드는 1450년 여름까지 프랑스군의 연이은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나다가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구원군 마저 궤멸되자 더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이후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무능과 횡령 혐의로 온갖 비난을 받다가 추방 통보를 받고 잉글랜드를 떠났다가 선원들에게 피살당하자, 그가 윌리엄 드 라 폴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고문이 되었고, 이내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았다.

1450년 9월 7일,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헨리 6세 에 대한 충성을 밝히면서, 노르망디를 상실하게 만든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나쁜 조언자들을 제거하라고 촉구했다. 몇 주 후 의회에서 헨리 6세와 접견한 리처드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의 주장에 찬성했다. 결국 에드먼드 보퍼트는 그해 11월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리처드는 가신인 윌리엄 올드홀의 도움을 받아 의회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에드먼드 보퍼트는 1450년 성탄절에 왕비 마르그리트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에 의해 석방되었고, 이때부터 리처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451년 1월, 리처드의 가신이 헨리 6세가 지난 해 잭 케이드의 난에 호응한 것에 보복하고자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로 인해 켄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에드먼드 보퍼트는 존 탈보트와 함께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 리처드가 겐트 반란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리처드는 그해 4월에 러들로 성으로 피신했다. 그해 6월, 브리스톨 시장이자 의원인 토머스 영이 헨리 6세가 아직 후사가 없는 상황이니 리처드가 왕위 계승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분노한 서머셋 공작은 의회를 해산하고 토머스 영을 투옥했다.

1452년 2월, 요크의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에드먼드와 보퍼트 가문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2년 전에 서퍽 공작의 무능을 성토했던 요크 공작을 열렬히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는 켄트로 가서 지지 세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으로 재차 진군했고, 에드먼드는 국왕군을 이끌고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웰링에서 마주쳤다. 이후의 협상에서, 요크의 리처드는 에드먼드가 최근에 칼레의 수비대장에 임명된 것을 거론하며, 그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넘길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리처드는 곧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음을 직감하고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공개 선서를 하고 사면받아야 했다.

1453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 순행을 하던 헨리 6세가 심각한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반응하고 인식하지 못했으며,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고, 국정에 손도 대지 못했다. 이 무렵에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유일한 자식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는데, 많은 이들은 저렇게 무기력해진 왕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리 없다며, 앙주의 마르그리트가 에드먼드와 간통해서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을 거라고 여겼다. 아무튼 왕이 이렇게 무기력해지자, 요크의 리처드는 이 기회를 노려 1454년 2월에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 호국경에 취임했다. 에드먼드는 긴급 체포된 뒤 런던 탑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1년간 지내야 했다.

1455년 초 정신이 돌아온 헨리 6세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리처드를 호국경에서 해임하고 에드먼드를 칼레의 대장 직위에 복귀시켰다. 이후 에드먼드는 왕비의 지원을 받아 "적들로부터 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해, 리처드 파벌을 대대적으로 탄핵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요크의 리처드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에드먼드는 이에 맞서 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양자는 세인트 올번스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길 꺼렸기에 며칠간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에드먼드를 체포해 처형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리처드는 협상이 소용없다고 여기고 5월 22일 방심하고 있던 왕실군을 기습 공격했다. 왕실군은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와해되었고, 에드먼드는 인 성으로 피신했다가 적군이 포위하자 성채에서 출격해 적병 4명을 사살했다가 수많은 창과 검에 찔려 전사했다. 이후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권력자로 등극했지만, 리처드의 정적들은 이 사건에 깊은 원한을 품었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를 수십년간 혼란에 빠뜨릴 장미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3. 가족



[1] 1404 ~ 1445,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와 초혼, 기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재혼. [2] 데본 백작 토머스 코트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