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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1:37:05

키프로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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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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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σίλειον τῆς Κύπρου (그리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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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수도
니코시아
위치 키프로스
정치체제
전제군주제[1] 봉건제
국가 원수
인문 환경
종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키프로스 정교회)
민족 프랑스인, 그리스인
공용 언어 중세 프랑스어, 중세 그리스어
공용 문자 로마자
통화 디나르[2], 히피르피론[3], 두카트[4]
주요 사건
1192년 건국
1489년 멸망
성립 이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

1. 개요2. 역사
2.1. 3차 십자군과 성립2.2. 뤼지냥 왕가
3. 정부 및 사법4. 경제5. 왕국의 계보6. 관련 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키프로스에 세워진 기독교 십자군 왕국. 원래 키프로스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제3차 십자군 원정 중에 키프로스의 지배자인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에게 패배한 후로 잠시 잉글랜드 왕국령이 되었다. 그 후 성전 기사단에 수여되었으나 기사단은 한번도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서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후원했던 기 드 뤼지냥이 단독으로 예루살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왕위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하자 딱하게 여긴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기 드 뤼지냥은 그리스도교 십자군 국가인 키프로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1489년 마지막 여왕인 카타리나 코르네르(Catarina Corner)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키프로스 왕국을 강제로 양도하면서 멸망했다.

2. 역사

키프로스는 원래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동로마 제국의 지역 총독인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기를 들고 키프로스에서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1191년 때마침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던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선단의 일부가 키프로스 리마솔 항구 근처에 난파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총독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도움 요청을 거부하는 것으로 모자라 생존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과정에서 이사키오스는 이 생존자 무리 속에 하필 리처드 1세의 약혼녀 나바라의 베렝겔라(Berengela, Berenguela)와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Joan)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만다.

2.1. 3차 십자군과 성립

리처드 1세와 그의 본 함대가 도착한 후, 난파당한 부하들과 그의 예비 신부 및 여동생이 당한 모욕을 듣고 곧바로 전투에 나섰다. 때마침 키프로스 섬은 더 많은 물자와 공성병기를 공급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적 기지가 될 것을 리처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이 땅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사키오스의 횡포는 그가 키프로스에 상륙하는 명분을 제대로 준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자심왕은 우선 이사키오스를 만나기로 했으나 총독이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살라흐 앗 딘과 비밀리에 접촉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리처드는 곧바로 잉글랜드 군대에게 리마솔 해안으로 상륙할 것을 명령했다. 키프로스 군대는 잉글랜드 궁수들과 기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을 보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고 밤이 되자 언덕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리처드 1세의 부대는 그들을 추적했고 새벽이 오기 전에 본대를 따라잡아 급습했다. 총독은 소수의 부하들과 또다시 탈출했으나 그 다음날 수많은 키프로스 귀족들이 리처드에게 충성 맹세를 하면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다. 다음날, 이사키오스는 리처드에게 금 2만 마르크와 5백 명의 중기병 군대를 바쳐 원정에 따르기를 제안했고, 그의 딸과 성을 서약으로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는 침략자들의 손에 배신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리처드 1세에게 서약을 한 후에 칸타라(Kantara)의 거점으로 도망쳤고 몇 주가 지난 1191년 5월 12일 리처드 1세가 약혼녀와 결혼하면서 수색이 느슨해진 틈을 타, 배를 타고 본토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동쪽 지점의 성 안드레아스 곶의 수도원에서 포위당해 항복하고 만다. 이때 조건으로 쇠고랑만은 채우지 말라고 요청했고 리처드 1세는 동의하고 그를 쇠고랑이 아닌 은고랑을 채우도록 명령하며 항복이 이루어졌다. 이사키오스는 시리아의 마르카(Margat) 성에 수감되어 포로 생활을 하다 곧 죽었다. 리처드는 그 사이에 아크레로 행군을 다시 시작하고, 예루살렘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이 합류했다. 십자군은 섬 자체를 일단 캠빌의 리처드(Richard of Camville)와 소넘의 로버트(Robert of Thornham)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성지를 향해 떠난 후 계속되는 반란으로 유지비가 더 드는 상황이 발생하자 십자군 귀족들이 영토를 기사단에 매각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리처드 1세는 성지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동안 키프로스는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 영토임을 시인하고 성전 기사단에 매각하며 10만 베잔트를 요구했고, 특히 그 중 4만 베잔트는 즉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성전 기사단이 이를 받아들이며 섬의 소유권은 성전기사단에게 넘어가는데, 이들은 키프로스인들을 엄격히 통치하여 토착민들에게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1192년 부활절에 키프로스인 기사들이 기사단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밀고가 이루어져 결국 니코시아로 도주했다. 곧이어 포위 공격이 이루어졌고, 기사단은 포위 공격에 저항하는 사람들 중 일부를 달콤한 말로 배반하게 하여 새벽 1시에 성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이후 벌어진 학살은 무자비하고 광범위했다. 십자군의 통치는 이 사건 이후에 복구되었지만, 그들은 살벌한 통치를 계속하는 것을 꺼렸고 리처드에게 키프로스를 다시 가져가라고 간청했다. 리처드는 그들의 제안에 다시 섬의 통치권을 가져갔고 성전기사단은 레반트로 돌아왔지만 섬 안에 몇 개의 부동산들은 유지했다.

섬의 소수의 가톨릭 인구는 내륙의 니코시아와 해안 도시 파마구스타(Famagusta)에 터를 잡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권력을 차지했고 정교회의 주민들은 시골에 살았다. 이것은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사회 구조와 거의 같았다.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를 유지하고 정교회 대주교가 섬에 상주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가톨릭 교회는 점점 크게 성장하여 그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2.2. 뤼지냥 왕가

1190년, 예루살렘의 왕국 여왕인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왕국의 정통성은 시빌라에게 있었기에 기 드 뤼지냥은 심각한 정통성 결핍이 발생해 위신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곧 그의 통치에 대한 반대하는 파벌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예루살렘 왕국의 쇠퇴를 그의 책임으로 모는 귀족들이 많아지자 왕의 지위에서 축출될 가능성이 크게 증가했다. 리처드 1세는 이 상황을 놓치지 않았고 키프로스를 기 드 뤼지냥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는 친구 기에게 얼굴 도장을 거하게 찍었고[5], 기는 동부 지역에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시에 불명예스럽게 유지하던 왕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기는 곧바로 키프로스로 달려가 자신만의 키프로스 왕국을 세운다. 리처드 1세가 그에게 영토를 주었는지, 아니면 팔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계약이 체결되더라도 리처드 1세에게 지불된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194년 기 드 뤼지냥은 상속인 없이 사망했으므로 그의 동생인 애므리(Aimery)가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6세가 승인한 왕관을 쓰고 키프로스 왕국의 2대 왕으로 대관식을 치러 애므리가 되었다. 애므리의 죽음 후, 왕위는 어린 소년에게 넘어갔고, 이어 갓난아이에게로 넘어갔다. 어린 왕들이 연이어 즉위하자 예루살렘 왕국 시절부터 많은 권력을 행사해온 이벨린 가문이 섭정의 역할을 대대로 수행했다. 1227년 이벨린 가문의 섭정인 장 디블랭은 서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구엘프 기벨린 사이의 투쟁의 여파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프리드리히의 지지자들은 1233년까지 권력을 누리다가 반대파와의 투쟁에서 패배했다.

키프로스 왕 위그 3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 콘라딘이 후손 없이 죽자, 의회에서 인정받고 왕위를 계승했다. 위그 3세[6]는 두 왕국을 하나로 묶었으나 레반트의 예루살렘 왕국 영토는 맘루크 왕조의 지속적인 공세로 대부분 잃었다. 장 1세의 짧은 통치를 거쳐 앙리 2세 재위 도중 아크레가 함락당하며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했으나 그 후로도 키프로스의 왕은 계속해서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 소유권을 주장했다.

14세기에 이르자 베네치아 상인들이 외교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고립되시키더니 키프로스까지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키프로스 왕국은 아비뇽 교황청과 프랑스의 도움에 힘입어 베네치아의 검은 손을 몰아낼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피에르 1세가 1356년 알렉산드리아를 기습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그에 대한 보복으로 1424~1426년 맘루크 군대가 키프로스를 3차례 원정한다. 국토가 유린되고 반격에 나선 국왕 야뉘까지 사로잡혔다가 10개월 간의 포로 생활 후 귀환하는 등 1426년 이래로 키프로스 왕국은 사실상 이집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후 점차적으로 독립성을 잃다가 1485년 샤를로트는 이복오빠 자크 2세의 반란으로 키프로스 국왕 왕위를 빼앗기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프로스 국왕 작위를 사보이아 공국 카를로 1세에게 매각해버렸다. 자크 2세의 짧은 통치 후 1489년 마지막 여왕[7]이자 최후의 저항자,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베네치아인이었던 카타리나 코르네르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 왕국의 통치권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빼앗겼다. 이로서 십자군 국가로 시작되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계승을 주장한 키프로스 왕국의 역사는 1489년에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3. 정부 및 사법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키프로스는 예루살렘보다 덜 강력했지만 오트 쿠르(Haute Cour, 고등법원)를 가지고 있었다. 섬은 예루살렘보다 풍족했기 때문에 국왕은 많은 개인적 재산을 갖고 있었으며 오트 쿠르를 무시할 여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은 이벨린 가문으로서 수많은 섭정직을 차지했는데 그 이유는 왕의 아내가 거의 이벨린 가문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4. 경제

왕국은 종종 이탈리아 상인들과 분쟁을 겪었다. 특히 키프로스 왕국은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항구도시 아크레가 무슬림들에게 점령된 후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5. 왕국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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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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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지냥 왕조
애므리 위그 1세 앙리 1세 위그 2세
푸아티에뤼지냥 왕조
위그 3세 장 1세 앙리 2세 위그 4세 피에르 1세
푸아티에뤼지냥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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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뤼지냥 왕조 코르네르 왕조
샤를로트 자크 2세 자크 2세 자크 3세 카타리나 코르네르
샤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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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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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남성 우선 장자 상속제 [2] 이슬람 제국 통화 [3] 동로마 제국 통화 [4] 베네치아 공화국 통화 [5] 기는 전술은 한없이 약했지만 명령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시 최정예 지휘관으로 모든 전투를 잘 소화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기를 상당히 좋게 보고 있었다. [6]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위그라는 왕이 이전에 없었으므로 위그 3세가 아닌 그냥 위그다. [7] 자크 2세의 왕비로 자크 3세의 어머니였으나 갓난아기였던 자크 3세가 만 1세를 겨우 넘기고 사망하면서 여왕으로 즉위했다.